문중은 대부분 선조의 위업을 널리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후손을 위한 사업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 중 하나가 문중 서당(書堂) 혹은 문중 서재(書齋)의 설립이었다. 이와 같이 문중에서 서당이나 서재를 설립하여 어린 자제들을 교육시킨 이유는 문중에서 관리나 학자를 지속적으로 배출시켜야만 선조가 이룬 위업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각 문중에서 서당이나 서재를 설립하고 훌륭한 훈장(訓長)을 영입하여 어린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우반동의 부안 김씨들도 문중 서당을 설립하고 자제들을 교육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와 관련된 자료가 상세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숙종 연간(1674∼1720) 무렵에는 문중 서당이 설립되어 있었고 종가에서 이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88년(숙종 14)에 김번이 자녀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바 있는데, 이때 차자 김수창(金守昌)의 몫 가운데 고공 한 아무개에게 사들인 7마지기의 논이 있었다. 그런데 김번은 그 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당부의 글을 첨부하였다.
이 논은 (내가) 서당(의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잠시 빌려 주었으니 (혹시 훗날) 서당이 훼철된 후에는 (너희들이) 돌려받아 차지하라.132)『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13∼217쪽, 분재기류 29.
종손이던 김번은 이와 같이 문중에서 설립한 서당에 7마지기의 논을 내놓아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러한 지원 덕택에 이 서당은 상당히 오래 유지되다가 정조 초기에 훼철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79년(정조 3)에 김정하가 형제들과 부모의 유산을 나누고서 작성한 문서를 살펴보면,133)원문에는 김정렬(金鼎烈)로 되어 있는데 이는 김정하의 초명이다. 서당기전(書堂基田), 즉 서당이 있었던 터와 그 주위의 텃밭이 ‘전래승중전민(傳來承重田民)’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 초에는 서당이 이미 훼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서원 터와 그 텃밭이 종가의 승중전민으로 포함된 이유는 김수창이 일찍 사망하고 동생 김수경의 손자 김득문이 종손으로 입양되어 이들에게 분배되었던 재산이 다시 종가로 회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번의 당부대로 된 셈인데, 이를 통하여 우반동의 부안 김씨들도 문중 서당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자제들을 교육시켰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