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2장 가족과 친족 생활
  • 4. 친족 조직과 활동
  • 문중의 조직과 활동
  • 종가와 종손 보호
전경목

문중의 활동 중의 하나가 종가와 종손 보호였다. 대개 문중의 조직이나 활동 등에 대해 논의할 때, 종가나 종손은 마치 별개의 조직으로 간주하여 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왔다. 이는 문중과 종가가 때로는 대립과 반목을 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느 문중도 종가나 종손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앞의 김용철과 김봉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문장을 비롯한 문중의 원로와 종손이 서로 단합하여 선조의 위업을 현창하는 경우가 대립이나 반목보다 한층 많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문중과 종가의 관계에 대해서도 주목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 문중의 가장 큰 역할 중의 하나가 종가와 종손의 보호였다.

조선 후기에 종가에서 해야 할 가장 큰 일 중의 하나는 종통을 잇는 것이었다. 종손과 종부(宗婦)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종통이 끊어질 처지가 되면, 문장을 비롯한 문중의 모든 임원은 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우 우반동의 부안 김씨들은 실제 어떻게 대처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742년(영조 18)에 우반동 부안 김씨 종손인 김방길 이 아들을 낳지 못한 채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러자 종부인 나주오씨는 종손 입양에 대해 문중 원로들과 상의하고 종손이 될 만한 인물을 널리 물색하였다. 원로들의 의견이 김방길의 4촌인 김방보(金邦保)의 둘째 아들 현득(賢得)이 적격이라고 모여지자134)『부안 김씨 족보』를 살펴보면 김현득은 김방보의 장자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장자의 출계를 허용치 않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입양을 위해서 김현득을 김방보의 둘째 아들로 위조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살펴본 바 있다. 당시의 문장인 김수관(金守寬)은 문중을 대표하여 김방보를 설득하였다. 김방보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의 둘째 아들을 종가로 출계하도록 허락하고서 이를 증빙하는 문서를 1743년(영조 19)에 작성해 주었는데, 바로 이 문서를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건륭(乾隆) 8년 계해(癸亥) 7월 초1일 동성 4촌 동생 방길의 아내 오씨에게 허여하는 명문135)『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03쪽, 분재기류 9.

명문을 작성하는 사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 가문의 운세가 흉험하여 집안의 종손인 종제(從弟) 방길이 지금 불행하게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그가) 적실이나 첩 사이에서 모두 자녀를 낳지 못하였으니 그 (딱한) 사정에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진다. (문중에서는) 종손의 대를 잇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두 집안 (어른)과 문장이 상의하여 나의 둘째 아들 현득을 계후로 정하고서 문장의 착명(着名)하에 허여하는 문서를 (이와 같이) 작성한다.

문장 유학 김수관(수결)

생부 유학 김방보(수결)

이 문서에도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문중에서는 종손의 대를 잇도록 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문장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 국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예조에 입양과 관련된 서류를 제출할 때 문중을 대표하여 ‘조목(條目)’이라는 일종의 사실 확인서를 제출해야 하였다. 이는 양부가 적실이나 첩 사이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또 생부와 양부 양측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양자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문서였다. 문장은 이와 같이 종손을 입양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를 설득하고 거중조정(居中調整)하며 사실 확인서까지 작성해 주는 등 깊숙이 개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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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길 처 오씨 전 허여 명문(金邦佶妻吳氏前許與明文)
김방길 처 오씨 전 허여 명문(金邦佶妻吳氏前許與明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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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또 종가의 재산을 분배하고 관리하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종가의 재산은 종재(宗財)와 약간 달랐기 때문에 종손이나 종부가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종손의 유고 시(有故時) 종부가 혼자서 이를 분배하거나 관리해야 할 때에는 문장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례는 이미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김정하의 아내 평택임씨가 1799년(정조 23) 5월에 네 아들에게 사망한 남편을 대신하여 재산을 분배하였는데 이때 문장 김방철이 입회하고 있다.136)『부안 김씨 우반 고문서』, 224∼225쪽, 분재기류 34 참조. 그것은 혹시 후일 재산 분쟁이 야기되면 그때 이 재산분배가 전적으로 종가 선대의 유훈에 따라 적법하게 이루어진 것임을 증언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문장이 종가의 입양이나 분재에 간여하거나 참여한 것은 종손을 보호하고 종가를 유지하도록 하는 임무가 그와 문중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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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임씨 자녀 분재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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