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2. 경제 생활, 거래와 공증
  • 노비 거래와 공증
김경숙

조선시대 거래의 주요 대상은 노비, 토지, 주택이었다. 그 가운데 노비는 신분적 위치와 경제적 가치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신분적으로 최하위층에 해당하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 동산(動産)이어서 토지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재산이었다. 특히 노비는 상전(上典)의 명령을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을 낳아 재산을 증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효용성이 매우 높았다.

특히 15, 16세기에는 농장 경영 방식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보다는 노비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노비들은 상전 농장의 전답을 경작하는 데 동원되어 노동력을 제공하였고, 그에 대한 대가로 농장의 일부 토지를 배정받아 갈아먹었다. 그때 노비가 받는 토지를 ‘작개지(作介地)’라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농장 경영 방식을 ‘작개제’라 한다.156)안승준, 「1554년 재경 사족(在京士族)의 농업 경영 문서 ; 안씨 치가 법제(安氏治家法制)」, 『서지학보』 8, 한국 서지학회, 1992 ; 김건태, 「16세기 양반가의 ‘작개제’」, 『역사와 현실』 9, 한국 역사 연구회, 1993.

이러한 농장 경영 체제하에서 노비 노동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노비에 대한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관심 또한 매우 높았다. 노주(奴主)들은 노비 수를 늘리기 위하여 사내종에게 양인(良人) 여성과 혼인하는 노양처교혼(奴良妻交婚)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다른 집 여종과 혼인하면 그 소생은 다른 집 소유가 되기 때문이었다.157)한영국, 「조선 중엽의 노비 결혼 양태(상)-1609년의 울산 호적에 나타난 사례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75·76, 역사학회, 1977 ; 이영훈,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 전기 노비의 경제적 성격」, 『한국 사학』 9,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7.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기물(己物)의 일부를 기상(記上)하여 상전가에 끼친 손실을 보상해야 하였다.

노비에 대한 높은 사회 경제적 관심 속에서 노비 매매 또한 활발하였고, 노비 가격도 높게 형성되었다. 고려 말에는 노비 값이 소나 말 값의 2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여 노비 두세 명을 합해야 겨우 소나 말 한 필 값에 해당될 정도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성인 남자 노비 한 명의 가격을 저화(楮貨) 4,000장, 여자 노비는 저화 3,000장으로 규정하였다. 품질 좋은 말 한 필 값인 저화 4,000장과 동일한 가격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현장에서는 노비 거래와 공증 절차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을까? 1507년(중종 2) 3월 경주에 거주한 손중돈(孫仲暾)의 처 최씨가 4촌 오빠 최세징(崔世澄)의 처 이씨에게서 노비를 매득하고 경주관에서 발급받은 입안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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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 댁 노 옥석의 노비 매매 빗기입안
손씨 댁 노 옥석의 노비 매매 빗기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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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①매득인 소지, ②매매 문기, ③방매인 답통(答通), ④증인, 필집의 초사, ⑤금산관(金山官)의 빗기입안 등 모두 다섯 건의 문서가 점련되어 빗기입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소지에 점련하여 올린 매매 문기에 의하면, 거래는 1507년 3월 25일에 이루어졌는데, 최세징의 처 이씨가 손중돈의 처 최씨에게 23살된 사내종 말종(末乙從)을 저화 4,000장을 받고 방매하였다. 말종의 소종래(所從來)는, 이씨가 친정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노(奴) 동진(同進)이 양인 여성과 혼인하여 낳은 5소생(五所生)이었다. 이렇게 노비의 소종래를 상세하게 밝힌 것은 훗날 있을지 모를 분쟁의 소지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최씨는 문기를 작성한 바로 이튿날인 3월 26일 노비 옥석(玉石)을 통해 금산관에 공증을 요청하는 소지를 올렸다(①). 소지는 담당 아전인 형방(刑房)이 접수하여 옥석에게 “증인과 필집을 데리고 오라.”는 처분을 내리고 금산관이 착관과 착압을 하였다. 공증 절차 과정에서 필요한 증인과 필집의 진술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였다.

노 옥석의 소지를 받은 금산관에서는 그날 곧바로 공증 절차를 진행하였다. 먼저 방매인인 최세징의 처 이씨에게 공함(公緘)을 보내 거래 사실이 확실한지의 여부를 문의하였다. 원래 방매인이 관에 직접 나와서 거래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양반 부녀자가 관정(官庭)에 직접 출두하는 것은 제한되었다. 이는 세종대 이숙원(李淑援)의 처 권씨의 송사가 직접 계기가 되었다.

법관이 양반 부녀자를 공청(公廳)에 불러서 취조하거나, 부녀자가 혹 스스로 법정에 나가서 송사에 변명함은 온당치 못하다. …… 지금부터 양반 부녀자로서 법정에 자진하여 나오는 자는 일체 금지하며, 법관도 부녀자나 조정 관리를 불러다 취조하지 말고, 다만 서면으로 조사하는 것이 옳으니 상정소(詳定所)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158)『세종실록』 권48, 세종 12년 6월 1일 경오.

이때의 규제를 계기로 양반 부녀자는 자진하여 관정에 나갈 수도 법관이 부를 수도 없게 되었다. 이는 유교 사회에서 지배층 여성들의 외출을 규제하고 부도(婦道)를 지키도록 강요한 일련의 규제들 속에서 취해진 조처였다. 따라서 관청에서는 사족 부녀자에게 심문할 일이 있으면 공함을 보내고 부녀자는 답통으로써 대신하였던 것이다.

증인과 필집은 관청에 직접 나가 거래할 때 증인과 필집으로 참여한 사실이 분명함을 진술하였다. 그들의 진술은 아전에 의하여 초사로 성문화(成文化)되었는데, 진술 내용이 정확함을 확인한 후에 증인과 필집은 각각 ‘백(白)’ 자를 쓰고 서압(署押)하였다.

관에서는 거래물의 유래를 확인하기 위하여 구문기를 검토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때 검토한 문서는 1463년(세조 10) 3월 8일 배씨가(裵氏家)의 동생 화회 문기(同生和會文記)와 1489년(성종 20) 10월 6일 이귀진(李貴珍)이 적손녀(嫡孫女) 및 첩자(妾子) 3남매에게 상속한 허여(許與) 문기였다. 이들 문기를 통해 노 동진은 1450년생으로 원래 배씨가에서 소유한 노비였는데, 15살 때 이귀진의 처 배씨에게 상속되었고 39년 후(1489)에는 이귀진의 손녀딸인 최세징의 처 이씨에게 상속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노 말종의 내력과 거래 사실을 확인한 후 금산관에서는 모든 절차 과정을 기록하여 입안을 발급하고, 여기에 관련 문서를 모두 점련한 후 정소자에게 발급하였다. 이로써 노 말종의 소유권은 최세징의 처 이씨에게서 손중돈의 처 최씨에게로 이전되었고, 말종은 새로운 상전을 모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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