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3. 사회 생활, 민원과 민의
  • 관료의 민원, 휴가를 청하다
김경숙

정소 제도는 민인이 사적인 일로 국가에 청원하는 제도였고, 관료도 개인적인 민원 사항이 있을 때에는 일반 민인과 다름없이 동일한 자격을 가지고 정소 절차를 거쳤다. 그렇다면 관료가 관직과 관련하여 소지를 올리는 일은 없었을까? 정소 제도는 기본적으로 사적인 일에 해당하기 때문에 관직자가 공적인 일로 정소하는 경우는 상정할 수 없다. 또한 공적인 일은 관청과 관청 사이에 관(關), 첩정(牒呈), 감결(甘結) 등의 이문(移文)을 주고받는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결국 관료의 민원은 관직과 관련된 사적인 일로 한정되는데, 어떠한 일이 이에 해당할까?

관료의 휴가 및 사직 신청이 이에 해당하였다. 특히 외방에서는 관찰사가 관할 내 군현의 업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군현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담당하였다. 때문에 군현 수령이 사직이나 휴가를 청할 때에는 일차적으로 관찰사에게 소지를 올렸다. 1680년(숙종 6) 5월 충청도 이산현감(尼山縣監) 윤이석(尹爾錫)의 사직 소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모친 병환과 자신의 병으로 계속 근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관찰사에게 사직을 청하였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 이미 모친 병환을 시병(侍病)하고 자신의 병도 조섭(調攝)하기 위하여 휴가를 청하는 소지를 올려 휴가를 얻었다. 그런데 휴가일이 끝나가도록 모친의 병환은 나아지지 않고 자신의 병 또한 차도(差度)가 없자 공무를 오래 비워 둘 수 없기 때문에 사직을 결심하고 다시 소지를 올린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관찰사는 이미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이전의 처분대로 시행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그의 사직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휴가를 허락한 것이었다.

확대보기
이산현감 윤이석의 소지
이산현감 윤이석의 소지
팝업창 닫기

한편, 오늘날 월급에 해당하는 녹봉(祿俸)을 받을 때에도 관료가 소지를 올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녹봉제는 실직(實職)을 가진 현직 관료를 대상으로 하였는데, 관직을 제수할 때 주는 임명장, 즉 고신(告身)이 기준이 되었다. 고신을 받은 모든 관원은 매년 봄의 첫 달에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증명서인 녹패(祿牌)를 받았는데, 문관은 이조(吏曹)에서, 무관은 병조(兵曹)에서 지급하였다. 녹패를 받은 관원은 직접 광흥창(廣興倉)에 가서 녹 패에 근거하여 녹봉을 지급받았다.165)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5장 참조.

확대보기
사옹원 주부 윤덕희의 소지
사옹원 주부 윤덕희의 소지
팝업창 닫기

1736년(영조 32) 2월 사옹원(司饔院) 주부(注簿) 윤덕희(尹德熙)는 봄 분기 녹봉 지급을 요청하는 소지를 호조에 제출하였다. 그는 전라도 해남 지역의 명문가인 해남 윤씨로, 윤선도(尹善道)의 현손(玄孫)이자 윤두서(尹斗緖)의 장남이다. 그는 노 순동(順同)의 이름으로 호조에 소지를 제출하였는데, 광흥창에 녹봉 지급을 분부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소지를 받은 호조에서는 먼저 윤덕희의 출사 기간 중 수유(受由)와 월봉(越俸) 내역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수유는 휴가, 월봉은 감봉을 뜻하는데, 이들 내역이 있게 되면 실제 녹봉 액수에서 감하고 지급하기 때문이었다. 확인 결과 윤덕희는 휴가 또는 감봉 내역이 없었기 때문에 담당자 확인을 받은 후, 호조에서는 전례에 따라 녹봉 지급을 명하는 처분을 내렸다. 윤덕희는 이 소지와 이조에서 받은 녹패를 가지고 광흥창에 가서 녹봉을 받았을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