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3장 사회 경제 생활과 문서
  • 4. 법 생활, 소송과 사회 갈등
  • 소송 절차, 시송다짐에서 결송 입안까지
김경숙

조선시대 소송 절차는 소송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 그리고 소송관의 삼자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원고는 원고(元告·原告), 피고는 피척(被隻), 원척(元隻), 척(隻) 등으로 불렀고 원고와 피고를 합칭하여 원(元)·척(隻)이라고 하였다.169)박병호, 『한국 법제사고』, 법문사, 1970, 255쪽.

원고는 조선이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여성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으며, 노비도 상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전통시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 및 노비에게까지 소송을 제기할 권한을 부여한 예는 드물다. 이는 애민, 휼민 정치를 지향한 조선 사회의 특성으로 평가될 수 있다.

소송은 당사자 원칙이었지만, 사대부 양반은 자신이 직접 관사(官司)에 출두하는 것을 꺼려해서 자서제질(子壻弟侄)이나 노비를 대신 내세워 대송(代訟)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족 부녀자의 소송 또한 『경국대전』에 자손제질(子孫弟侄) 및 노비로 하여금 대송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소송관은 피고 측 지방관이 담당하였다. 때문에 소송을 제기하는 원고는 피고가 살고 있는 척재관(隻在官)에게 가서 소지 특히 원정을 제출함으로써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관은 원고에게 피고와 함께 송정(訟庭)에 나올 것을 요구하고, 원고와 피고가 송정에 나와 ‘시송다짐(始訟侤音)’을 하면 본격적으로 소송이 개시되었다.

심리 절차에는 정송(停訟) 원칙을 지켰다. 소송 때문에 농민들이 실농 (失農)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외방의 소송은 농번기(農繁期)가 되면 일체의 심리 절차를 정지하였던 것이다. 정송 기간은 춘분날에 정지되어 추분날에 해제되었으므로, 실제적인 심리 절차는 추분날에서 다음해 춘분날까지 농한기(農閑期)에 이루어졌다. 다만 십악(十惡), 간도(奸盜), 살인(殺人), 도망 노비, 풍속을 침해하는 등의 중대한 사안일 경우에는 정송 기간에 관계없이 일 년 내내 심리 절차가 진행되었다.170)『경국대전』, 형전, 정송(停訟).

심리 절차는 소송 당사자가 직접 송정에 나와 진술하면서 진행되었다. 이를 초사(招辭)라고 하였는데, 소송 판결문에는 ‘등(白等)’ 다음에 진술 내용을 기록하는 형태로 반영되었다. 다만 사족 부녀자 또는 관료는 직접 송정에 나오지 않고 서면으로 진술을 대신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심리 과정에서는 소송 당사자의 진술과 함께 증인의 증언, 증거물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송유취』의 청송식(聽訟式)에 따르면 증거 문서가 제출되었을 경우 원고와 피고가 함께 열람하고 봉인(封印)한 뒤 함께 서명하면 다짐을 받고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다시 그 문서를 열람해야 할 때는 또다시 양측의 다짐을 받고 개봉하여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증거 문서는 특히 판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엄격한 절차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표> 『속대전』의 작지 값
토지 노비
기와집 1간에 2권 초가집 1간에 1권 10부(負)에 2권 1구(口)에 3권
✽저주지를 사용하고 총 20권을 넘지 못함.
✽빈 집터 4간은 기와집 1간에 준함.

당사자 양측의 진술과 증인, 증거 문서 검토가 모두 끝나고 더 이상 심리를 진행할 내용이 없게 되면 소송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때 원고와 피고가 함께 소송관에게 판결을 내릴 것을 요청하는 ‘결송다짐(決訟侤音)’을 하 고, 당사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소송관은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은 결송 입안으로 작성하였는데, 승소자가 입안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관청에 신청해야 하였으며 이때 빗기입안 발급과 마찬가지로 작지 값을 납부하였다. 작지 값의 규모를 보면 표 ‘『속대전』의 작지 값’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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