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5장 국가 및 관리 생활과 문서
  • 2. 과거 문서
  • 홍패
박재우

조선시대에 관리가 되는 길은 과거, 음서(蔭敍), 천거(薦擧) 등 다양하였으나 가장 대표적인 입사(入仕) 방법은 역시 과거였다. 조선의 과거는 예비 고시인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와 본고시인 문과(文科), 무과(武科) 등이 있었다. 과거의 시험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07)이성무, 「과거 제도」, 『조선시대 생활사』, 역사 비평사, 1996 ; 이성무, 『한국의 과거 제도』, 한국 학술 정보, 2004.

과거 응시자는 시험을 보기 전에 녹명소(錄名所)에 시험지인 시권(試券)과 신원 보증서인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하였다. 시권은 스스로 마련하였는데 여기에는 본인의 관직, 이름, 나이, 본관(本貫), 거주지와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의 이름과 본관을 기록하였다. 서울은 사관(四館, 성균관·예문관·승문원·교서관) 관원이, 지방은 입문관(入門官)이 받아 검토하였는데 이때 인적 사항이 적힌 부분을 따로 보관하였다. 그리고 보단자는 6품 이상의 관리가 서명하여 보증하도록 되어 있었다.

시험은 초장(初場), 중장(中場), 종장(終場)으로 구분되었는데, 초장에는 경서를 강독하는 강경(講經), 중장에는 제술(製述), 종장에는 책문(策文)을 시험하였다. 시험이 끝나면 예조 좌랑이 시험지에 예조인(禮曹印)을 찍었는 데 응시자가 많아지자 100장마다 묶어 도장을 찍기도 하였다. 시권을 봉미관(封彌官)에게 넘기면 봉미관은 답안지를 등록관(謄錄官)에게 보냈다. 등록관은 붉은 글씨로 베껴 사본을 만들었고 채점관은 사본을 가지고 채점하였다. 이는 채점관이 응시자의 글씨를 보고 점수를 매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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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서 합격한 사람은 합격증을 받았다. 문과나 무과 합격자는 홍패를, 생원시나 진사시 합격자는 백패를 받았다. 그러면 먼저 홍패에 대하여 알아보자. 현재 전하는 홍패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이보정 홍패(李補丁紅牌)’이다.208)정구복 외, 「이보정 홍패(李補丁紅牌)」, 『조선 전기 고문서 집성』, 국사 편찬 위원회, 1997.

1  왕지

2   승사랑의영고부직장 이보

3   정 을과 제2인 급제출신자

4   영락 18년 3월 22일

이 문서는 1420년(세종 2) 3월에 승사랑의영고부직장(承仕郞義盈庫副直長) 이보정이 을과(乙科) 제2인에 급제하여 발급받은 홍패이다. 양식을 보면 1행은 문서 종류인 ‘왕지(王旨)’, 2∼3행은 수취자(受取者)와 문서 내용으로 이보정에게 을과 제2인 급제출신(及第出身)을 준다는 것이며, 4행은 발급 날짜인 ‘영락(永樂) 18년 3월 22일’이다.209)왕지로 시작되는 홍패의 다른 사례로는 1434년(세종 17)에 발급한 다음의 ‘조서경 홍패(趙瑞卿紅牌)’가 있다. ‘왕지. 전수의부위우군부사정(前修義副尉右軍副司正) 조서경 무과 3등 28인 급제출신자(及第出身者). 선덕(宣德) 10년 4월 20일’ 이 문서는 조서경이 무과 3등 28인에 급제하여 발급받은 홍패이다. 주목할 것은 급제의 표기 방법이 ‘무과 3등 28인’이라는 점이다. 이는 당시 문과의 급제 표현이 ‘문과 정과 제21인’이라 하여 갑을정(甲乙丁)으로 표현한 것과 차이가 있고, 대신 생원시의 합격자를 ‘생원 3등 제18인’으로 표현한 것과 비슷하다. 이는 1434년 당시에만 해도 무과의 위상이 문과와 같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양식의 홍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만들어졌는데 고려시대의 홍패 양식과 비교해 보면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1305년(충렬왕 31)에 작성한 ‘장계 홍패(張桂紅牌)’는 “왕명에 준하여 국학진사권지도평의녹사(國學進士權知都評議綠事) 장계에게 동진사(同進士) 급제를 내린다. 대덕(大德) 9년 5월 일. 동지공거(同知貢擧) 정헌대부밀직사지신사국학대사성문 한사학충사관수찬관지내지(正獻大夫密直司知申事國學大司成文翰司學充史館修撰官知內旨) 송(宋) (초압(草押)), 지공거(知貢擧) 광정대부도첨의찬성사연영전대사학사제수사(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延英殿大司學司提修史) 정(鄭) (초압)”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210)노명호 외, 「장계 홍패(張桂紅牌)」, 『한국 고대 중세 고문서 연구』, 서울 대학교 출판부, 2000. 여기서 ‘장계 홍패’는 발급 근거가 “왕명에 준하여 …… 내린다(准王命賜).”이고, 수취자와 문서 내용은 장계에게 동진사 급제를 준다는 것이며, 발급 날짜는 ‘대덕 9년 5월 일’, 발급자는 지공거와 동지공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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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정 홍패
이보정 홍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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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 홍패’와 ‘이보정 홍패’를 비교해 보면 차이가 확인된다. 첫째, 이들 홍패가 모두 왕명에 의해 발급된 것은 틀림없으나 전자는 “왕명에 준하여 …… 내린다.”라고 하여 왕명이 발급 근거로만 제시되고 있을 뿐인 반면에 후자는 양식 자체가 ‘왕지’였다. 둘째, 발급자가 전자는 동지공거와 지공거였던 반면에 후자는 국왕이므로 발급자에 대한 표시가 따로 없다.

이는 고려 후기의 홍패에 비해 조선 초기의 홍패가 문서의 위격이 높아졌음을 뜻한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제의 개혁과 관련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행해졌던 좌주 문생(座主門生) 제도의 폐단에 관한 논의가 조선 초기에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마침내 1413년(태종 13)에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이는 당시 왕권 강화 정책으로 인해 인재의 선발은 국왕의 고유 권한이라는 관념이 심화되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었다. 이렇게 해서 급제자 선발의 주체는 지공거, 동지공거가 아니라 국왕으로 바뀌었고, 이로써 홍패 양식도 변화가 생겨나 ‘왕지’를 내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보정 홍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과거제의 변화와 맞물려 새롭게 만들어진 홍패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홍패 양식이 계속 변화되어 갔음은 다음 ‘권항 홍패(權恒紅牌)’를211)정구복 외, 「권항 홍패(權恒紅牌)」, 『조선 전기 고문서 집성』, 국사 편찬 위원회, 1997. 통해서도 확인된다.

1  교지

2   성균생원 권항 문과 정과

3   제21인 출신자

4   정통 6년 5월 18일

이 문서는 1441년(세종 23) 6월에 성균생원(成均生員) 권항이 문과 정과 제21인에 급제하여 발급받은 홍패이다. 양식을 보면 1행은 문서 종류인 ‘교지(敎旨)’, 2∼3행은 수취자와 문서 내용으로 권항에게 문과 정과(丁科) 제21인 급제출신을 준다는 것이며, 4행은 발급 날짜인 ‘정통(正統) 6년 5월 18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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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항 홍패
권항 홍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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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항 홍패’를 보면 ‘이보정 홍패’와 약간 차이를 보인다. 첫째, ‘이보정 홍패’는 ‘왕지’로 되어 있는 반면에 ‘권항 홍패’는 ‘교지’로 되어 있다. ‘이보정 홍패’ 이래로 홍패는 국왕이 지급하는 왕명이라는 점을 양식에 뚜렷이 밝혔으나 이제는 왕지에서 교지로 명칭이 달라진 것이다. 조선 초기에 문서 양식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1435년(세종 17)을 전후로 왕지가 교지로 바뀌었는데 이 홍패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 준다.

둘째, 전자는 ‘문과’라는 용어가 없는데 후자는 ‘문과’ 출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원래 고려 광종대에 시작된 과거는 고려시대에는 1109년(예종 4)에서 1133년(인종 11)까지를 제외한 나머지 기간 동안 무과 없이 문과만 있었다. 그래서 고려의 홍패에는 문과와 무과를 구분하는 용어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문무의 균형을 꾀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1390년(공양왕 2)에 무과가 설치되었는데, 다만 무과의 실시는 조선 건국 후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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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홍패
이순신 홍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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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태조 1)에 관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문과, 무과, 이과(吏科), 문음(門蔭)을 정하였고, 이듬해에 문과와 무과의 방방의(放榜儀)를 제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402년(태종 2)에 비로소 무과가 시행되었다. 무과 홍패로는 다음 ‘이순신 홍패(李舜臣紅牌)’가212)「무과 급제 교지」, 현충사 유물관. 있다.

1  교지

2   보인 이순신 무과 병과

3   제4인 급제출신자

4   만력 4년 3월 일

이 문서는 1576년(선조 9) 3월에 보인(保人) 이순신이 무과 병과 제4인에 급제하여 발급받은 홍패이다. 양식을 보면 1행은 문서 종류인 ‘교지’, 2∼3행은 수취자와 문서 내용으로 이순신에게 무과 병과 제4인 급제출신을 준다는 것이며, 4행은 발급 날짜인 ‘만력(萬曆) 4년 3월 일’로 이루어져 기본적으로 ‘권항 홍패’와 차이가 없고 다만 ‘문과’ 대신에 ‘무과’가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홍패는 고려시대의 홍패와 분명한 차이를 가지면서 세종대에 정비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고, ‘이순신 홍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후에도 사용되어 조선시대 내내 이용되었다. 다음은 『경국대전』 「예전(禮典)」의 홍패식(紅牌式)이다.

1  교지

2   구관 누구 문과(무관은 무과로 칭함) 어떤 과(갑을병으로 칭함)

3   제 몇인 급제출신자

4   년 보 월 일

다만 『경국대전』의 홍패식에는 발급 날짜가 ‘년 월 일’로만 되어 있지만 ‘이보정 홍패’·‘권항 홍패’·‘이순신 홍패’ 등 고문서 자료에는 ‘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이로 보건대 『경국대전』의 ‘년’은 연호를 포함하는 연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다른 종류의 문서도 마찬가지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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