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8권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 제5장 국가 및 관리 생활과 문서
  • 5. 왕명과 상주문
  • 신료의 상주
  • 초기
박재우

초기는 업무상 중요하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 사실만 간단히 적어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이다. 문서를 검토한 국왕은 처분을 내리고 담당 관청에 보내 시행하였다.294)최승희, 「초기(草記)」, 『한국 고문서 연구』, 지식 산업사, 1989 ; 심영환, 「고문서 용어 풀이 : 초기(草記)」, 『고문서 연구』 20, 한국 고문서 학회, 2002. 초기는 조선 초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경국대전』에도 문서 양식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전기에 초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597년(선조 30) 10월에 “시강원(侍講院)의 초기로서 윤담무(尹覃茂)가 계(啓)하여 말하기를, ‘세자가 기운을 회복한 후에 양 경리(楊經理, 양호(楊鎬))와 상견해야 합니다. …… 청컨대 예관으로 하여금 미리 먼저 정하여 상견하는 예모(禮貌)에 예를 잃어 미진하게 되는 염려가 없도록 함이 어떻습니까?’ 하니, 전교하여 말하기를 ‘계에 따르라.’고 하였다.”는295)『선조실록』 권93, 선조 30년 10월 경오. 기록이 있다.

여기서 시강원의 ‘초기’가 확인되므로 적어도 선조대에는 초기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시강원의 초기는 도승지 윤담무를 통해 국왕에게 전달되고 있어 윤담무의 건의로 보이지만, 정확하게는 초기의 내용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렇게 보면 초기의 내용은 ‘세자가 기운을 회복한 후에 …… 어떻습니까(何如)?’였고, 이에 대해 국왕은 ‘계에 따르라(依 啓)’로 답변하고 있어, 이 기록이 비록 연대기 자료이기는 해도 초기의 문서 양식을 상당히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점은 다음 『전율통보』 「별편」에 실려 있는 초기식(草記式)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   어떤 관사

2 계왈. 운운 어떻습니까?

여기서 초기식은 1행은 발급자인 ‘어떤 관사’, 2행은 문서 양식인 ‘계왈(啓曰), 운운, 어떻습니까(何如)?’로 구성되었는데, 시강원의 초기도 발급자인 ‘시강원’과 문서 양식이 ‘어떻습니까’로 되어 있어 양식상 유사성이 인정된다. 그렇다면 『전율통보』의 초기식은 적어도 선조대에는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다음 ‘형조 초기(刑曹草記)’를296)『고문서』 권2, 초기(草記),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1987. 살펴보자.

1    형조

2  계왈. 이번 식년 감시 때에 경주 유학 방주한은 경상우도 초시에서 합

   격하였습니다.

3    그런데 이번 복시 이소에서 경주 유학 방주숙과 성균관 서리

4    홍성욱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방목에서 방주한의 한 자를 숙 자로

     개서하여

5    함부로 시험장에 들어왔다가 시소에서 잡혔습니다. 그러므로 방주숙

     및 반리 홍성욱을 잡아

6    와서 사실을 조사하니 그 간사한 짓을 한 정황을 낱낱이 인정하였습

     니다. 율문을 살펴보니

7    대전통편 제과조에 “대과나 소과의 시험장에 녹명 단자를 바치지 않

     고 난입한 자는 유학 이하는

8    자기 몸에 한하여 강등하여 수군에 충당하고 간사한 짓을 한 자는 변

     방에 충군한다.”고 하였으니 방주숙과 홍성욱을

9    이 율에 따라 살펴 처벌하면 성욱은 전라도 함평현으로 변방에 충군

     하는 것으로 배

10   소를 정하였으니 압송하겠습니다. 주숙은 규례대로 병조로 하여금 거

     행하게 하심이 어떻습니까?

11 허락한다.

12   병조 좌랑 유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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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 초기
형조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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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1810년(순조 10)에 형조가 식년(式年) 감시(監試)에서 시험장에 함부로 난입한 사람에 대하여 처벌을 요구하여 허락을 받은 초기이다.

양식을 보면 1행은 발급자인 ‘형조’, 2행은 문서 양식인 ‘계왈(啓曰)’, 2∼10행은 문서 내용, 10행은 문서 양식인 ‘어떻습니까(何如)’, 11행은 국왕의 처분인 ‘허락한다(允)’, 12행은 시행 관청인 ‘병조’와 담당 관리인 ‘좌랑 유춘동(柳春東)’이다. 여기서 ‘형조’ ‘계왈 운운 어떻습니까?’의 기록을 통하여 이 문서가 『전율통보』의 초기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문서에는 국왕이 ‘허락한다’는 처분과 병조에 위임하는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초기는 관청에서 작성되면 승지에 의해 국왕에게 전달되어 결재를 받은 후에 담당 관청에 보내져 시행되는 왕명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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