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1장 조선 전기의 세계관과 일본 인식
  • 3. 조선 전기 대일 사행원의 일본 인식
  • 『해동제국기』로 본 신숙주의 일본 인식
하우봉

신숙주는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75년(성종 6) 세상을 떠나기까지 조선 초기 통치 체제 확립과 대외 관계의 관장, 학문의 발전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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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초상
신숙주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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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1439년(세종 21)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1441년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입직(入直)하여 1450년까지 10여 년간 학문 연구와 정치적 경륜을 쌓은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진행된 활발한 학술·문화 활동의 중추 역할을 하면서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1443년(세종 25) 27세 때 서장관으로 통신사행을 수행하여 일본을 다녀온 것도 이때였다.

후기는 1452년(문종 2)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는 수양 대군(首陽大君)을 수행하면서 그와 인연을 맺은 이래 수양 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후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였던 시기이다. 이때 그는 판서, 영의정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국가의 추기(樞機)에 참여하였고, 네 차례에 걸쳐 공신 책봉을 받았으며, 부원군(府院君)의 지위에 올랐다. 신숙주는 세조가 ‘그대는 나의 위징(魏徵)’이라 일컬었고, 성종이 ‘나의 관중(管仲)’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세조대와 성종대의 정치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58)『성종실록』 권56, 성종 6년 6월 무술, 영의정 신숙주 졸기(領議政申叔舟卒記). 특히 그는 1467년(세조 13) 예조 판서에 임명된 이래 죽을 때까지 외교와 문교(文敎)를 관장하면서, 당시까지 불안정하고 체계화되지 못한 대외 관계의 개혁과 체제 정비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 신숙주는 문장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가 약관의 나이에 통신사행의 서장관으로 선발된 이유도 문장력 때문이었다. 실제 그는 외교 관계에서 사명(詞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예조의 일을 관장하면서 중요한 외교 문서를 직접 작성하였다.59)『성종실록』 권56, 성종 6년 6월 무술, 영의정 신숙주 졸기. 또한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일본 사신과 여진 사신을 접할 때는 통역을 통하지 않고 직접 접견하였다고 한다.60)『세조실록』 권30, 세조 9년 7월 무인 ; 권45, 세조 14년 3월 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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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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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외교 활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그가 당시 조선과 직접적으로 관계있던 명나라, 여진, 일본을 직접 견문하거나 접함으로써 당시 조선의 대외 관계에 대하여 가장 종합적인 시각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일 관계에서는 1443년 통신사행의 서장관으로 일본 교토까지 가서 사행을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에 들러 쓰시마 섬 도주를 설득하여 계해약조를 체결하는 데 일조하였다. 대명 관계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다. 1452년 사은사로 수양 대군을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5년(세조 1)에는 주문사(奏聞使)로 다시 파견되었다. 대여진 관계에서는 1459년(세조 5)에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여진족 종족 간의 불화를 조정하였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모린위(毛隣衛) 야인(野人)을 1460년과 1461년 두 차례에 걸쳐 정벌함으로써 북쪽 변경을 개척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61)신숙주는 여진 정벌의 전말을 기록한 『북정록(北征錄)』을 남겼다.

이와 같은 활동을 바탕으로 신숙주는 세조대와 성종대 초기 사대교린 외교의 사무를 총괄하였으며, 일본 문제에서도 당대 제일의 전문가였다. 그가 죽은 후 사신(史臣)이 그를 평해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그 나라의 산천(山川), 관제(官制), 풍속(風俗), 족계(族系)에 대하여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해동제국기』를 지어 성종에게 올렸다.”라고62)『성종실록』 권56, 성종 6년 6월 무술, 영의정 신숙주 졸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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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
『해동제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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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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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는 1471년(성종 2) “바다 동쪽 여러 나라와 조빙하고 왕래한 연혁(沿革)과 그들의 사신을 접대하는 규정 등에 대한 구례(舊例)를 찬술(撰述)하라.”는 성종의 명에 따라 당시 예조 판서였던 신숙주가 저술한 것이다.63)신숙주, 『해동제국기』 서(序). 이에 그는 조선과 일본의 옛 전적을 참고하고, 일본에 사행 갔을 때의 견문, 오랫동안 예조에서 근무하며 얻은 외교 경험, 성종대 초기 주로 자신에 의해 활발히 추진되었던 대일 외교 의례의 개정 등 당시 사정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해동제국기』를 완성하였다.

『해동제국기』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 지도 :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 유구국도(琉球國圖) 등 지도 7장

○ 「일본국기(日本國紀)」 : 천황대서(天皇代序), 국왕대서(國王代序), 국속(國俗), 도로리수(道路里數), 8도 66주

○ 「유구국기(琉球國紀)」 : 국왕대서(國王代序), 국도(國都), 국속, 도로리수

○ 「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 사선정수(使船定數) 등 조빙 응접에 대한 29개 항의 규정

이 가운데 「일본국기」와 「조빙응접기」가 분량으로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내용으로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대일 외교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해동제국기』가 많은 자료를 집대성하고 있어 가장 자세하다. 또한 성종대 초기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사료 가치가 높다. 그래서 『해동제국기』는 조선의 대일 통교상의 ‘교범(敎範)’이 되었고, 조선 후기에도 통신사행원들이 일본에 갈 때 반드시 가지고 가는 필수품이었다.

『해동제국기』는 신숙주 개인의 사행록이라기보다는 왕명에 따라 찬진(撰進)된 ‘외교 자료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문에 그의 일본관과 대일 외교에 관한 견해가 밝혀져 있고, 「일본국기」의 ‘국속’과 ‘8도 66주’ 등에는 자신의 견문에 바탕을 둔 일본 인식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해동제국기』를 중심으로 신숙주의 일본 인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민족관과 대일 정책에 관한 문제이다. 송희경과 마찬가지로 신숙주도 기본적으로 화이론적 관점에서 일본을 이적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일본을 ‘이적(夷狄)’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책의 저술 목적도 ‘이적을 대하는 방책’의 일환이라고 하였다. 또 일본의 모든 통교자에 대해 ‘내조(來朝)’라고 표현하여 화이관적 인식을 드러냈다.

일본 민족의 성격에 대해 그는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우리나라는 그들이 오면 어루만져 주고 급료를 넉넉히 주어서 예의를 후하게 해 왔는데도 저들은 관습적으로 예사롭게 여기며, 참과 거짓으로 속이기도 하고 곳곳마다 오래 머무르면서 기한을 경과한다. 변사(變詐)하기를 온갖 방법을 다 쓰며 욕심이 한정이 없고 조금이라도 의사에 거슬리면 험한 말을 한다.”고 하여 약속을 잘 어기며 이(利)를 탐하는, 무력이 강한 민족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일본 민족관을 가진 신숙주의 대일 정책은 어떠하였을까? 신숙주는 일본 이적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본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 대해 ‘해동의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나라’라고 하면서 대일 정책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이웃 나라와 수호(修好)·통문(通問)하고, 풍속이 다른 나라의 사람을 안무 접대할 적에는 반드시 실정을 알아야만 예절을 다할 수 있고, 예절을 다해야만 마음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듣자옵건대 “이적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內治)에 있으며, 변경의 방어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으며, 전쟁을 하는 데 있지 않고 기강을 진작하는 데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이제야 징험(徵驗)이 됩니다.

신숙주가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대일 정책의 기본은 무력적 대응보다 외교를 통해 화평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속이 다른 일본의 실정을 잘 알아야 하고 예의와 성의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통교하러 오면 어루만져 주고 급료를 넉넉히 주는 ‘증여 무역’과 예의로 교화하는 방책을 건의하였다. 그는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가 ‘사방에서 적을 맞이하는 형세’라고 하여 국방의 어려움을 지적하면서 외교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가 임종할 때 성종이 유언을 권하자 “일본과 화평을 잃지 않기 바란다.”고 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둘째, 일본의 정치 형태와 정치권력, 조선 조정과의 외교 교섭의 주체에 대한 그의 인식이 어떠하였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일본의 정치 체제에 대해 신숙주는 “국왕 이하 여러 대신들은 모두 분봉된 땅이 있어 봉건 제후처럼 세습한다.”라고64)신숙주, 『해동제국기』, 일본국기(日本國紀), 8도 66주, 산성주조(山城州條). 하여 중국의 봉건 제도와 같은 지방 분권적인 체제로 보았다. 또 당시 막부와 지방의 제후 세력 간의 권력 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한 관찰력을 보여 주었다. 실제로 신숙주는 무로마치 막부와 지방 영주의 세력 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왜구 금압과 관련하 여 조일 통교의 기본 목적과도 관계가 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는 막부 쇼군과 천황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천황은 국정과 이웃 나라와의 외교 관계에도 일절 간여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천황이 내정뿐만 아니라 외교에 대해서도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였다. 따라서 조선 조정의 외교 교섭 대상에 대해서는 막부 쇼군이 ‘일본 국왕’으로서 조선 국왕과의 대등한 지위를 갖는다고 일단 인정하였다.

그러나 신숙주는 일본 천황이 대내외적으로 실권이 없다 할지라도 상징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임을 인식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해동제국기』 ‘천황대서’에서 일본 천황에 대해 최초로 본격적인 기록을 남겼다. 일본 천황에 대해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세히 기술한 것은 이전의 다른 조선 지식인과 비교해 독특한 점이라 하겠으며, 은연중에 조선 국왕과 동격의 외교 교섭 대상 주체는 막부 쇼군이 아닌 천황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신숙주가 ‘막부 약체관’에 근거하여 막부 쇼군과 조선 국왕이 동등한 의례를 갖추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표하였지만,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개혁 의사는 표명하지 않았다. 당시 현실적으로 막부 쇼군이 대외적으로 일본 국왕으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고 있었고, 천황은 외교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숙주의 독자적인 일본 천황관과 그에 따른 외교 의례상의 문제 제기는 후대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인식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건너간 통신 부사(通信副使)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강조하여 외교 분쟁으로 비화(飛火)되었고, 조선 후기에 와서도 계승되어 하나의 명분론으로 계속 제기되었다.65)예컨대 안정복(安鼎福), 이익(李瀷), 이맹휴(李孟休), 조엄(趙曮) 등이 그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하우봉, 『조선 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일지사, 1989 참조.

셋째, 일본의 경제와 사회에 대한 인식이다. 일본의 경제에 대해 신숙주는 사행 시 일본에서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화폐 사용의 일반화와 상업의 발달을 인정하였으며, 하카다를 중심으로 한 해외 무역도 활발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당시 조일 무역과 관련하여 일본 에서 들어오는 주된 수입품과 특산물이었다. 당시 조일 관계에서 조선은 왜구 금압 등 정치적인 측면에 비중을 두었지만,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도 결코 작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8도 66주’에서 당시 지배 계급의 수요와 무기 제조상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조선에서 산출되지 않아 일본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던 유황, 금, 동, 수철, 철, 염료, 약재, 호초 등에 대해 산지별로 나누어 상세히 기록하였다.66)1429년(세종 11)에는 세종이 통신사 박서생 일행에게 직접 『백편상서(百篇尙書)』를 구입할 것, 왜지(倭紙) 제작법을 알아 올 것, 일본의 금을 사 올 것 등을 지시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면 일본의 국내 사정에 관해 상당한 지식이 축적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의 실용적·과학적 인식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이 계승, 발전되면서 『해동제국기』에서는 일본의 경제와 특산물에 대해 좀 더 포괄적인 지식을 기술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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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 ‘국속’
『해동제국기』 ‘국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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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가 일본의 사회적 성격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지만 일본인이 무술에 정련(精練)하고 창검(槍劍)을 잘 쓰며 주즙(舟楫)에 익숙하다는 점과 형벌 제도가 엄격하다는 점 등을 기술하여 일본 사회가 상무적(尙武的) 사회임을 지적하였다.

넷째, 일본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다. 신숙주의 일본 문화에 대한 기록은 정치나 경제에 비해 매우 간략한 편이지만 특징적인 것은 일본의 ‘이국적’ 문화와 풍속에 대해 가치 판단을 자제하고 그 문화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풍속에 대해서는 『해동제국기』 ‘국속(國俗)’에서 간략히 기술하였다. 그런데 그는 일본의 기이한 풍속, 예컨대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과 매춘하는 풍습 등에 대해서도 담담히 소개할 뿐 그것을 이적시하거나 야만시하지는 않았다. 이는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언급한 “풍습이 다른 나 라의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해서는 그 실정을 알아야 한다.”는 자세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일본 풍속에 대한 신숙주의 이러한 가치 중립적인 태도는 각 민족의 문화적 독자성을 인정하려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천황대서’에서 일본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도 같은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67)신숙주는 『동국정운(東國正韻)』 서문에서도 각 나라의 풍토가 다르면 문화가 다르기 마련이고, 각기 풍토에 맞는 문화가 형성될 뿐이라는 개방적인 문화관 또는 세계관을 천명하였다.

일본의 불교 문화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수록된 일본 승려들과의 창화 기록에 언급되어 있다. 『보한재집』은 1484년(성종 15) 신숙주의 유고를 모아 편찬한 문집으로 총 1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일본과 류큐 사신의 요청으로 써 준 시문, 쓰시마 섬 도주에게 보낸 외교 문서 등 일본 관계 기록이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이 자료들에는 일본의 사회상과 풍물에 관한 신숙주의 견문과 감상, 일본의 외교 승려에 대한 느낌 등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일본국서방사우진기병부(日本國栖芳寺遇眞記幷賦)’라는 시는 1443년(세종 25) 통신사행의 서장관으로 갔을 때 교토에서 사찰들을 둘러보던 가운데 서방사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부(賦)를 붙인 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서방사 정원의 구조와 경치를 상세히 묘사하면서 ‘청정고묘(淸淨高妙)의 극치’라고 칭찬하였다. 이것이 일본의 불교 문화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아니지만, 정치적·민족적인 편견 없이 솔직한 감정으로 긍정적으로 평하였다. 또 숙소에 돌아온 후 꿈속에서 일본의 고승을 만나 시문을 창화하였는데, 이 장면의 묘사도 순수한 문화적 교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68)고려 말 사신으로 일본에 갔던 정몽주(鄭夢周)도 창화시를 남겼지만, 여기에는 일본 이적관 또는 문화적 우월관이 드러나고 있다. 그에 비해 신숙주의 이 부(賦)는 어떤 선입관도 배제된 순수한 교류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귀국 후 그는 예조 판서를 지내면서 일본의 외교 승려들과 대화를 나누고, 창화할 때 서방사가 가끔 꿈에 나온다고 회상하면서 전란으로 인해 많은 보배로운 사찰이 불타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또 그가 만난 일본의 외교 승려들에 대해 그들의 인품과 시문을 칭찬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69)신숙주, 『보한재집(保閑齋集)』 권11, 일본국사승해운선사중산도인(日本國使僧海雲禪師中山道人) 시권(詩卷).

『보한재집』에 수록되어 있는 이러한 기록은 『해동제국기』 「일본국기」 ‘국속’에 나타나는 신숙주의 가치 중립적인 일본 풍속관과 더불어 그의 일본 문화관 또는 국제 인식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조선 후기 통신사행원들은 사행을 가서 일본의 문인, 유학자, 승려 등과 활발한 필담(筆談) 창화를 나누었는데, 신숙주의 기록이 그러한 선례라고 할 만하다. 신숙주가 일본에 갔을 때 문명(文名)을 떨쳤다고 하였으나 그것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었는데, 이 기사는 그 실례이자 조일 지식인 간에 이루어진 창화의 좋은 보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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