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1. 조선 후기의 통신사행
  • 통신사행의 구성과 노정
하우봉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12회의 통신사는 주로 쇼군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하였다. 일본에서 막부의 쇼군이 새로 즉위하면 막부에서는 쓰시마 섬에 이를 전하고, 쓰시마 섬 도주는 관백승습고경차왜(關白承襲告慶差倭)를 조선에 보내 이 사실을 알린다. 이어 다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보내오면 조선에서는 비변사(備邊司)에서 논의를 거쳐 통신사 파견을 결정한다. 그 후 쓰시마 섬 도주는 다시 통신사행의 도항(渡航)에 따른 절차와 여러 사항을 협의하기 위해 통신사호행차왜(通信使護行差倭)를 파송하고, 동래부(東萊府)에서 역관(譯官)과 외교 실무자들을 보내 통신사행 파견에 관한 제반 사항을 규정하는 통신사행 강정 절목(通信使行講定節目)을 정한다. 이후 조선에서는 통신사 일행의 구성과 예단(禮單) 준비 등에 착수한다. 일본의 막부에서는 정승급 관리인 로쥬(老中)를 통신사 영접의 총책임자로 하는 기구를 설치하고, 쓰시마 섬을 비롯하여 통신사행이 통과하는 연로(沿路)의 각 번(藩)에서는 접대 준비를 서두르도록 한다.

통신사 일행은 우선 문관 당상관(堂上官) 가운데에서 선발하는 정사(正使)를 비롯하여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으로 구성되는 삼사(三使)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으로 역관, 군관(軍官), 제술관(製述官), 양의(良醫), 사자관(寫字官), 의원(醫員), 화원(畵員), 서기(書記), 자제군관(子弟軍官), 별파진(別破陣), 마상재(馬上才), 전악(典樂), 이마(理馬), 소동(小童), 취수(吹手)와 각종 기수(旗手)를 비롯한 악대 및 의장대 등의 인원이 200명이고, 여기에 사공(沙工)과 격군(格軍)을 합하여 평균 470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이 편성되었다.76)통신사행의 구성에 대해서는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권5, 통신사행(通信使行)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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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렬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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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렬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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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렬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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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일행착복지도(通信使一行着服之圖) 부분(아래)-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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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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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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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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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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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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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시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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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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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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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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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대인원이 편성된 이유는 바닷길을 가야 하므로 배를 젓는 사공과 격군이 300명 정도 되었고, 악대 및 의장대를 담당하는 인원이 100명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 밖에 역관 20명, 군관 17명, 노자(奴子) 50여 명 등이 있었다. 통신사행의 원역(員役) 구성의 특징은 문화 교류를 담당하는 인원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문 창수(詩文唱酬)를 임무로 하면서 통칭 사문사(四文士)로 불렸던 제술관과 서기 세 명, 의원 세 명, 사자관과 화원 네 명 등 문화 교류를 전담하는 인원이 10여 명 편성되어 있었다. 이 밖에 삼사의 자제로서 통신사를 수행하는 자제군관이 다섯 명 있었는데, 이들은 별다른 임무가 없었던 만큼 시문 창수를 비롯한 문화 교류 활동을 하였다. 문화 교류를 전담하는 인원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점은 중국에 파견한 부경사(赴京使, 연행사라고도 함)나 다른 나라의 사행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든 통신사행만의 특징이었다.

다음으로 통신사의 노정과 일본의 접대 상황을 살펴보자. 통신사 일행은 창경궁(昌慶宮)에서 국왕에게 출발 인사를 드린 후 충주, 안동, 경주를 거쳐 동래부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는 쓰시마 섬에서 나온 통신사호행차왜의 안내를 받으며 간다. 기선(騎船) 세 척과 화물을 싣는 복선(卜船) 세 척으 로 구성된 통신사행의 선단(船團)은 부산포의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海神祭)를 지낸 다음 출항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부산포에서 쓰시마 섬-이키 섬(壹岐島)-아이노시마 섬(藍島)-아카마가세키(赤間關)를 거쳐 세토(瀨戶) 내해의 가마카리(鎌刈)-도모노우라(鞆浦)-우시마도(牛窓)-무로쓰(室津)-효고(兵庫)-오사카(大阪)까지의 해로를 거쳐 상륙한 다음 교토에 도착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무로마치 막부가 있던 교토가 목적지였으나, 후기에는 도쿠가와 막부의 소재지였던 에도까지 다시 육로로 북상해 가야 하였다. 왕복 거리가 도합 1만 1500여 리에 달하였고, 통신사가 출발하여 귀국해 임금에게 보고하기까지 대개 8개월이 소요되는 대장정이었다. 쓰시마 섬에서 일본 혼슈(本州)를 왕래하는 행차에는 쓰시마 섬 도주가 직접 호행(護行)하였으며, 수천 명의 쓰시마 섬 사람이 수행하였다. 쓰시마 섬 도주는 통신사행의 왕래가 끝나면 이 공로로 막부에게서 조선 무역의 독점권 보장과 더불어 히젠(肥前)에 별도의 영지(知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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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년 통신사행의 노정
1764년 통신사행의 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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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일행이 에도에 도착하면 막부에서는 로쥬가 통신사 숙소까지 와서 영접하였고, 다시 막부의 유력 친족인 고산케(御三家)가 주관하는 환영 연회를 베풀었다. 국서 전달이 끝난 후의 연회에는 막부 쇼군이 직접 삼사에게 술을 권하는 등 극진히 대접하였다. 쇄국 체제의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유일하게 국교를 맺었던 조선에서 국왕 사절단이 내빙한 것에는 큰 의미가 있었다. 그야말로 ‘쇼군 일대(一代)의 성사(盛事)’였던 만큼 막부는 조선의 통신사행을 국빈(國賓)으로 환영하였던 것이다. 통신사행을 한 번 접대하는 데 100만 냥(兩)의77)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일본 돈으로 4000억 엔(圓)에 상당한다고 한다. 1711년 사행 때 접대를 주관하였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계산에 따르면 1709년 당시 막부의 1년 세입 총액이 77만 냥이었다고 하니 그 액수를 짐작할 수 있다. 막대한 금액이 소요되었으며, 동원된 연인원이 3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부 번에서는 통신사행의 접대를 위해 6개월 전부터 일회용 객관(客館)을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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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방정성도 부분
통신사방정성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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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이와 같은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까지 통신사를 초청한 이유는 정치적으로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칠 만큼 화려하게 진행된 통신사행의 접대는 막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로 인해 지식인 사회 일부에서는 일본에게 불평등한 의례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8세기에 들어 통신사행의 정치적 의미가 줄어들자 경 비 절감을 위해 빙례(聘禮)를 오사카나 쓰시마 섬에서 하자는 역지 통신(易地通信)의 개혁안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결국 19세기에 들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국제 정세가 변하자 1811년(순조 11) 쓰시마 섬에서의 교빙(交聘)을 마지막으로 통신사행은 막을 내렸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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