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
  • 4. 실학파의 일본 인식
  • 한치윤, 일본과의 문화 교류사를 정리하다
하우봉

정약용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해동역사(海東繹史)』를 저술한 한치윤(韓致奫, 1765∼1814)도 일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의 학맥은 뚜렷하지 않으나 일본 문제와 관련해 볼 때 기호계 남인의 선배 실학자인 안정복과 정약용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이와 함께 유득공, 이덕무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156)한치윤과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대해서는 황원구, 「한치윤의 사학 사상」, 『인문 과학』 72, 연세 대학교 문과 대학, 1962 ; 한영우, 「해동역사의 연구」, 『한국 학보』 38, 일지사, 1985 참조.

한치윤은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운 경제 여건과 서얼(庶孼) 출신이라는 사회적 제약으로 관계(官界) 진출을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799년(정조 23) 그는 족형(族兄) 한치응(韓致應)을 수행하여 부경사행원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이를 계기로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계발하는 기회를 가졌다. 한치윤은 돌아오자마자 『해동역사』 저술을 시작하였고, 유득공 같은 북학파 학자들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 그의 당색은 기호 계 남인이었지만, 한양에서 태어나 살고 연경에 사행을 다녀온 것 등을 인연으로 유득공, 이덕무, 김정희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가깝게 교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두 부경사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경험이 있고, ‘북학’을 주장하였으며, 일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저술을 남겼다.

한치윤은 필생(畢生)의 대작인 『해동역사』에서 23종의 일본 서적을 인용하였다. 이는 통신사행원을 포함하여 조선시대 지식인이 인용한 일본 서적으로는 가장 많은 숫자이다. 인용한 책의 종류도 사서류를 비롯하여 유서류(類書類), 문집류, 경서류, 전기류, 창화집, 시집, 지리지 등으로 다양하다. 그는 이런 일본 서적과 함께 중국과 조선의 문헌에 나와 있는 일본 관계 기록을 비교 검토하면서 조일 관계사를 체계화하였다. 그리하여 『해동역사』에는 ‘본조비어고(本朝備禦考)’, ‘교빙지(交聘志)’를 비롯한 일본에 관한 글이 상당히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해동역사』에서 독자적인 일본관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550여 종에 달하는 방대한 문헌을 인용하며 조일 간의 외교사, 전쟁사, 문화 교류사에 대해 독자적인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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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해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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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에 나타나 있는 한치윤의 일본 인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치윤은 일본을 고대로부터 조선과 대등한 국가라고 인식하며 우호와 문화 교류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특별히 일본을 이적시하거나 야만시하지 않았다. 그는 『해동역사』를 서술할 때 중국 중심주의의 화이관을 부정하였으며, 17세기 이래 심화되어 온 소중화 의식과 그에 바탕을 둔 정통 론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는 『해동역사』의 ‘세기(世紀)’에서 독자적인 조선사의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편목(編目)의 명칭으로 본기(本紀)나 세가(世家)가 아닌‘세기(世紀)’, 사대지(事大志)나 교린지(交隣志)가 아닌 ‘교빙지(交聘志)’ 등 기존의 화이 명분론을 거부하는 독특한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기존의 화이적 질서를 거부하고 ‘평등적 국제 질서’를 지향함으로써 일본 이적관을 청산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한치윤은 ‘교빙지’에서는 외교사를, ‘본조비어고’에서는 전쟁사를 중심으로 하여 조일 관계사에 대한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양국 간의 문화 교류였다. 그는 조일 간의 문물 교류 또는 일본에의 문화 전수에 대해 ‘교빙지’, ‘예문지(藝文志)’, ‘악지(樂志)’, ‘인물고(人物考)’ 등 『해동역사』 전편에 걸쳐 일관되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는 조일 간의 문화 교류사에 조선의 일방적 전수 또는 우위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 문화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호기심을 가지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일본 문화관은 이덕무, 정약용, 김정희 등과 다소 차이가 있다.

셋째, 한치윤은 문화 교류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일본의 재침 가능성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대응책을 모색하였다. 그는 조일 간의 전쟁사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문헌을 근거로 ‘본조비어고’에서 체계화를 시도하였고, 왜구의 침입로에 대한 고찰을 통해 해방 대책(海防對策)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식과 노력은 안정복, 정약용과 유사한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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