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3장 수신사 김기수가 바라본 근대 일본
  • 1.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파견 배경과 목적
  • 옛 우호를 회복하고 일본의 정세를 탐문하라
한철호

1876년(고종 13) 조선 정부는 일본과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 조약)를 맺은 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외교 사절단인 제1차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를 파견하였다. 1811년(순조 11)의 마지막 통신사(通信使) 이후 65년 만에 공식 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통신사가 역지빙례제(易地聘禮制)로 변질되어 에도(江戶)가 아닌 쓰시마 섬(對馬島)에서 국서(國書)와 예물(禮物)을 교환하였던 사실을 감안하면, 1763년(영조 39) 통신사행이 일본 본토를 다녀온 이래 113년 만에 비로소 수신사가 일본의 수도를 밟은 셈이 된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에 편입하였기 때문에 수신사는 종전의 통신사와 성격이 매우 달랐다.

원칙적으로 통신사는 일본 막부(幕府)의 쇼군(將軍)이 교체될 때마다 파견되었다. 하지만 통신사는 실질적으로 일본과 정치적·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거나 대일 정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일본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였으 며,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데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반면에 수신사는 전통적인 화이관에 의거해서 구례(舊禮)를 회복하고 선린(善隣)을 도모한다는 명분 아래 파견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따라서 제1차 수신사는 단순히 전통적인 대일 관계를 회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서구화된 일본의 변화상을 최초로 견문·시찰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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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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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1차 수신사는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일본에 파견되었을까?

1876년 2월 3일(양력 2월 27일) 체결된 조일 수호 조규 제2관을 살펴보면 일본 정부는 15개월 뒤 수시로 서울에 사절을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상의할 수 있으며, 제11관에는 6개월 이내에 양국은 위원을 파견하여 통상 장 정(通商章程)과 수호 조규의 부록(附錄)을 체결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은 자국이 사절을 파견하였던 만큼 답례로 조선도 사절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약 체결 당시 일본 전권대신(全權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는 조선의 접견대관(接見大官) 신헌(申櫶)에게 일본에서 전권 정·부 두 대신을 파견하였으니 조선도 그에 대한 답례로 회례사(回禮使)를 파견해 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교린(交隣)의 도(道)는 풍속을 상세히 알고 난 후에야 의혹이 풀릴 것이므로 일본의 물정을 탐색하기 위한 사절단을 파견하되, 그 의례는 간략하게 하고 시기는 가능한 한 통상 장정을 체결해야 하는 6개월 이전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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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
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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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기요타카
구로다 기요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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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신헌은 전국시대(戰國時代)와 같은 형세에서 작은 나라들도 한편으로 큰 나라를 섬기면서 교린하고 다른 한편으로 방어를 갖추고 나라를 지켜 낼 수 있었다는 논리에 따라 일본의 개화 문물(開化文物)을 시찰하고 외 침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건의를 정부에 올렸다.157)『고종실록』 1876년 2월 6일. 의정부에서도 “은혜로써 회유하고, 의리로써 제재하며, 정도(正道)로써 굴복시키고, 신의로써 화호(和好)를 맺는다면,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지내고 또 우리의 울타리가 될 것이다.”라는 견해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자는 쪽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일본에 은혜를 베푼다는 종래의 성리학적 명분을 유지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예전과 달리 강성해진 일본의 의구심을 풀고 재침의 꼬투리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2월 22일에 의정부는 일본의 사신 파견에 대한 회례(回禮)로 양국의 우호를 돈독히 하기 위해 수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지난번에 일본 사신의 배가 온 것은 전적으로 우호를 맺기 위한 것이었으니, 선린하려는 우리의 뜻에서도 마땅히 이제 전권 사신(全權使臣)을 파견하여 신의를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사신의 칭호는 수신사라고 할 것이며 응교(應敎) 김기수(金綺秀)를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임명하되 따라가는 인원은 일에 밝은 사람으로 적당히 선택하여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호를 맺은 뒤 처음 있는 일이니, 이번에는 특별히 당상(堂上)이 서계(書契)를 가지고 들어가도록 하고, 이후부터는 서계를 종전대로 동래부(東萊府)에 내려보내어 에도(江戶)에 전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158)『고종실록』 1876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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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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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례’ 또는 ‘보빙(報聘)’의 의미를 지닌 수신사는 ‘선린’ 즉 이웃 나라 일본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신의를 두텁게 하려는 의도에서 파견된 셈이 다. 이는 조선 정부가 조일 수호 조규의 체결을 전통적인 교린 체제의 회복 혹은 연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지만 조선 정부도 당시의 조일 관계가 교린 체제와 다르다는 점을 나름대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행과 구분해서 수신사로 명칭을 바꾸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수신사행에 대한 조선 정부의 인식은 혼합적이면서도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159)하우봉, 「개항기 수신사행에 관한 일 연구」, 『한일 관계사 연구』 10, 한일 관계사 학회, 1999, 141∼142쪽.

이어 의정부는 예조(禮曹)로 하여금 옛날의 우호를 회복하기 위해 수신사를 파견한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일본 외무성(外務省)에 보내도록 조치하였고, 청나라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4월 4일 고종은 김기수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이번 길은 단지 멀리 바다를 건너가는 일일 뿐 아니라 처음 가는 길이니, 모든 일은 반드시 잘 조처하고 그곳 사정을 반드시 자세히 탐지해 가지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지시하면서 “들을 만한 모든 일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반드시 기록해 오라.”고 거듭 당부하였다.160)『일성록』 1876년 4월 4일 ; 『고종실록』 1876년 4월 4일. 통신사가 일본 본토를 방문한 지 110여 년이 지난 데다가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만큼,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일본에 대해 정확한 최신 정보가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신사는 회례사라는 명목상의 임무와 함께 일본의 국정 및 정세 시찰과 개화 문물의 탐색이라는 실질적인 목적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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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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