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3장 수신사 김기수가 바라본 근대 일본
  • 2. 김기수의 견문 태도와 활동
  • 사전에 일본의 정보를 수집하다
한철호

김기수는 ‘문재(文才)’가 뛰어났다는 이유로 수신사로 발탁되었던 만큼, 신문물(新文物)에 대한 이해와 개화 정책에 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던 인물로 평가를 받아 왔다. 또한 김기수가 『일동기유』에서 견문한 바를 자신의 주관이나 비판보다는 사실대로 기술하는 데 치중하였으며, 그에 관한 느낌을 ‘완상(琓賞)’이라는 제목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도 그의 소극적 태도를 잘 드러내 준다. 실제로 김기수는 원래 과학 기술과 서구 문명에 대한 예비지식(豫備知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근대적 실상을 좀 더 치밀하게 파악하거나 현실적인 이용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한 측면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김기수가 고종의 간곡한 지시와 달리 그저 경탄(驚歎)과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은 채 일본의 국정 정탐 임무를 절실하게 여기기 않았거나 소극적으로 시찰·견문에 임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일 수호 조규 체결 직후 여전히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해 있던 당시 조야(朝野)의 상황에서, 그가 『일동기유』에서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놓기보다 직접적인 판단을 유보한 채 일본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한 것 자체가 일본의 국정 정탐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울러 김기수가 『일동기유』를 공개할 목적으로 집필하였던 의도 역시 일본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리려는 데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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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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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가 수신사로 임명된 뒤에도 조야에서는 여전히 일본에 대해 의구심이 팽배해 있었다. 일본의 무력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조약을 맺었지만, “왜인은 서양의 앞잡이이니, 귀신이면서 창귀(倀鬼)이고, 적(賊)이면서 간첩”이라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에 의거한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경제적으로 탐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속셈을 헤아릴 수 없고, 풍속도 문란하며, 나아가 수신사가 유람을 일삼을 경우 일본에게 우리나라를 유람할 명분을 제공할 것이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다수는 아니지만 일본이 “한때 힘이 모자라 굴복하여, 그들 서양인의 웃음과 꾸짖는 소리를 흉내 내게 되어, 겉으로는 하나의 서양인이지만 속은 실상 그렇지 않다.”는 왜양분리론(倭洋分離論)에 근거해서 일본과 친교를 맺어야 한다는 사상도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은 “자립한 나라이니 자유로이 행동할 것이고 외국인의 견제는 받지 않을 것”이며, “화륜선(火輪船)은 한 번 출발하면 천 리 길을 평온하게 갔다가 빠르게 돌아올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고 그 실정을 잘 살피고서 돌아오라는 격려였다.170)김기수, 『일동기유』 권1, 상략(商略), 351∼353쪽.

이처럼 개화에 우호적인 사상보다 반일적인 위정척사 사상이 우세한 정계의 동향을 감지하고 있던 김기수도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지 매우 고심하였을 것이다. 그는 출발 전 여러 사람이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다양한 말 가운데 다음의 충고를 가장 ‘심복(心服)’하였다.

그대의 이번 행차는 전번의 다른 사람 행차보다는 정세(情勢)가 달라져 있으니, 일언(一言)·일동(一動)·일유(一遊)·일람(一覽)이 대경대법(大經大法)에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요, 또한 권도(權道)에 어긋나서도 안 될 것입니다. 저들(일본인)은 장차 그대의 행차를 증빙 자료로 삼아 천하에 성명(聲明)할 심산이기 때문에 그 지론(持論)이 반드시 전일(專一)할 것이며 그 요구도 반드시 간절할 것이니, 그대는 수레를 탄 사람처럼 앞을 단단히 잡고 뒤로 기대어, 굳이 도리에 벗어나는 점이 없는 한 아직은 그들의 호감(好感)을 사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정색을 하고 핀잔을 준다든지 매몰스럽게 돌아선다든지 한다면, 그것은 오늘의 전세로 살펴볼 때 또한 변통수 없는 자막(子莫, 전국시대 노나라 사람) 따위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서는 그대가 어찌할 것인가는, 저들이 도리에 위반하지 않는 일이라면 우리는 아직 따라 하기로 하고, 저들이 비록 도리에 위반하지 않는 일일지라도 우리 편에서 먼저 서두르지는 말아야 합니다.171)김기수, 『일동기유』 권4, 문사(文事), 부관육군성정조국기(附觀陸軍省精造局記), 502∼503쪽.

일본의 정세가 종전의 통신사 파견 때와 크게 달라졌으므로 정도와 권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두 가지를 절충해서 신중하고도 융통성 있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사신 이름을 수신사라 하였으니, ‘수신’이란 구호(舊好)를 닦고 신의를 두터이 하며, 사명(辭命)으로써 인도하고 위의로써 이루어, 과격하지도 않고 맹종하지도 않으며, 태도를 장중근신(莊重謹愼)하게 하여, 임금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해야 그것이 거의 적당하게 될 것이다.172)김기수, 『일동기유』 권1, 상략, 351쪽.

당시 일본에 대한 조선 정계의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양국의 옛 우호를 도모하는 ‘수신’에 기본적으로 역점을 두되 국가 혹은 국왕의 체면을 잃지 않도록 신중한 태도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격하지도 않고 맹종하지도 않겠다.”는 신중하고도 중용적인 입장은 바로 그가 일본의 국정을 탐문하는 자세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귀국 후 김기수는 자신의 주 임무가 양국의 ‘수신’에 있었으며, 일본의 국정 ‘정탐’을 ‘외사(外事)’이자 ‘말단(末端)’이라고 토로하였다. 스스로 정탐할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다만 조리 있게 응대하고 위의를 존엄하게 지켜 차라리 일본이 자신 혹은 조선을 정탐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는 것이다.173)김기수, 『일동기유』 권4, 일동기유후서(日東記游後序), 515∼517쪽. 이 점으로 미루어, 김기수는 스스로 시인하였듯이 일본을 관찰하는 데 적격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상대적이나마 일본의 국정을 적극적으로 정탐하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김기수가 근대 문물을 정확히 파악할 만한 식견이 모자랐던 점을 인정하더라도, 양국의 수호를 도모하는 데 치우친 나머지 일본 국정 탐문을 등한시하였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국왕이 직접 일본의 실상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만큼, 또한 이런 목적 달성을 위하여 문장력이 뛰어난 자신이 발탁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만큼, 그가 이 임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각오는 4월 4일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국왕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궐에 가서 사별(辭別)할 때에 주상(主上)께서는 거듭 칙유(勅諭)하시고, 또 길의 이수(里數)와 돌아올 기일까지 헤아리면서 정녕측달(丁寧惻怛)하시기를 마치 가인(家人) 부자처럼 하시었다. 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얼굴 들고 천안(天顔)을 뵈옵도록까지 하시니, 임금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우러러 추측할 수 있었다. 신은 황공하고 감읍(感泣)함을 견디지 못하였으니, 비록 그날 죽더라도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174)김기수, 『일동기유』 권1, 별리(別離), 354쪽.

실제로 4월 29일 일본으로 출발하기 위해 고류마루(黃龍丸)에 승선하였을 때, 그는 “배의 제도는 자세히 보아도 설명할 수가 없는” 데다가 “몸가짐을 진중히 하여 마음대로 구경을 할 수도 없는 처지”라고 아쉬워하면서도 직접 옷을 걷고 증기선을 자세히 관찰함과 동시에 그 원리를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175)김기수, 『일동기유』 권1, 승선(乘船), 362∼363쪽 이처럼 겉으로는 신중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자신의 견문 대상을 치밀하게 관찰하려는 자세야말로 사행 기간 내내 김기수가 견지한 기본적인 태도였다. 일본 국정의 탐문은 국왕의 특별 지시였지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그 의도를 드러내 놓고 수행할 성질의 임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176)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問答), 418∼421쪽.

예컨대 외무권대승(外務權大丞) 모리야마 시게루가 먼저 기계의 모방, 군제(軍制) 등 제도의 개혁, 풍속의 채용을 위해 견문을 권고하였을 때, 김기수가 “옛날 속담에 ‘편리한 기계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귀국(貴國)에서는 다만 이것을 보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모방하도록 하니 귀국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특별히 애호하는 점이 있음을 알겠다.”고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견문을 강권하자 김기수는 거부감을 드러내면서도 사실 전달에 주력하겠다고 답변하였던 것이다.

한편 주목할 만한 사실은 김기수가 일본에 대한 정보를 미리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그는 수신사로 임명된 뒤 행장(行裝)을 꾸리기에도 바쁜 와중에 일본의 실정을 간접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과거 통신사가 남긴 서적을 참고하였을 뿐 아니라,177)김기수, 『일동기유』 권2, 문답, 415, 417쪽 ; 『일동기유』 권3, 정법(政法), 452쪽 ; 『일동기유』 권3, 기예(技藝), 469쪽 ; 『일동기유』 권3, 물산(物産), 472쪽. 전신 등 근대적 기계·문물에 대해 지식을 입수하거나178)김기수, 『일동기유』 권2, 완상(琓賞), 389∼391쪽. 이미 청나라에서 들여와 유포되었던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1844), 서계여(徐繼畬)의 『영환지략(瀛環志略)』 등 각종 서양 관련 서적도 읽었던 것이다.179)『승정원일기』 1876년 6월 1일. 청나라에서 유입되어 1880년대 우리나라 사람의 대외관 형성에 영향을 끼쳤던 양무(洋務) 관계 서적에 관해서는 이광린, 「『해국도지』의 한국 전래와 그 영향」 ; 「『이언(易言)』과 한국의 개화사상」 ; 「개화사상의 연구」, 『한국 개화사 연구』, 일조각, 1974 참조. 아마도 이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박규수(朴珪壽)·신헌 등의 격려 혹은 자문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박규수는 그에게 “내가 나 이와 작위가 공연히 이같이 되어, 이번의 장유(壯遊)를 드디어 그대에게 양보하게 된 것이 유감스럽다.”는 서한을 보낸 적이 있었고, 신헌은 그에게 일본 체재 시 활동에 대해 자문해 주었으며, 어윤중(魚允中)도 평소에 그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180)김기수, 『일동기유』 권1, 차견(差遣), 349쪽 ; 『일동기유』 권1, 별리, 355쪽 ; 『일동기유』 권2, 문답, 422쪽 참조. 따라서 그가 『일동기유』에 자신의 견문을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가 문장력이 뛰어난 문사(文士)였다는 점 외에 나름대로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이해하기 위해 사전에 준비하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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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환지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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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본 체재 중 김기수가 일본의 국정을 탐문하려고 애쓴 모습은 모리야마에게 일본의 조약 체결 상황 등 여섯 가지 질문을 직접 손으로 써서 전달한 뒤 문서로 답변해 달라고 요청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질문은 교제하는 나라가 몇인지 그 국호를 적어 달라, 현재 각국 공사 중 몇 나라 공사가 주재하는지 적어 달라, 통상하는 장소는 몇 곳인지 그 지명을 적어 달라, 성상(聖上, 천황)이 어느 곳은 행행(行幸)하며 언제 환궁하는지 적어 달라, 도쿠가와 씨(德川氏)는 어떤 관직을 가졌으며 지금 어느 곳에 거처하는지 적어 달라, 타국인이 귀 조정에 출사(出仕)하고 있는지 적어 달라 등이었다.181)『명치9년조선국수신사김기수래빙서』 9. 이러한 사항은 당시 일본의 국정을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되는 중대한 내용이었지만, 단순히 견문이나 시찰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기수는 일본 국정 탐문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나름대로 충실히 수행할 목적으로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 손수 질문을 적어 답변을 얻어 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기수가 여전히 일본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하였던 상황 속에서 왜 『일동기유』를 집필하였는지도 되짚어 보아야 한다. 최고 통수권자인 고종조차도 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거론할 수 없었던 당시 정계의 분위기를 고려해 보면, 그가 내용 공개를 전제로 쓴 『일동기유』에서 일본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이, 그는 『일동기유』에서 자신의 주 임무를 ‘수신’에 있다고 거듭 강조하거나 단순히 “훗날 내가 전원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낼 때 농부나 노인네와 더불어 이국(異國)의 기이(奇異)한 풍속을 밭이랑 사이에서 이야기하기 위해” 『일동기유』를 저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182)김기수, 『일동기유』 권4, 일동기유후서, 519쪽

그러나 김기수가 일본의 국정 정탐 임무를 절실하게 여기지 않았거나 시찰과 견문을 소극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일본 체재 중 견문한 사항을 『일동기유』에 단순히 ‘완상’의 차원을 넘어서 매우 상세하고도 객관적으로 묘사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그가 공개를 전제로 집필한 『일동기유』에 일본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한 것 자체가 일본의 국정 정탐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하였으며, 나아가 깜짝 놀랄 정도로 예전과 달라진 일본의 실정을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정확하게 소개하려는 의도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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