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3장 수신사 김기수가 바라본 근대 일본
  • 4. 제1차 수신사의 성과와 그 의의
한철호

김기수의 견문 활동과 보고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지 못하였다는 부정적인 것과 개화 혹은 대외 정책을 펼쳐 나가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긍정적인 것으로 엇갈려 있다. 그 까닭은 당시 조선 조야의 반일적인 분위기와 일본 정부의 적극적이고도 무리한 견문 권유 및 의도 등을 단선적으로 분석한 채 수신사의 의의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긍정적인 평가는 수신사 일행이 소극적으로 시찰에 임하는 과실을 범하였지만, 김기수의 복명으로 일본의 개화 실상을 이해한 고종을 비롯한 좌우의 신인(新人)이 보수파의 반대를 배제하면서 신일본의 문화 수입에 노력하여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선구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선사(善使)’였다는 것이다.263)田保橋潔, 앞의 글, 68쪽 : 앞의 책, 577쪽 참조. 반면에 수신사 일행이 일본의 조선 진출 정책을 간과한 채 외무성 관리들이 제공한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결국 조일 수호 조규 부록 및 통상 장정을 맺어 조선의 반식민지화를 초래하였고, 그 과정에서 정계가 분열 항쟁함으로써 국위를 오손(汚損)하고 국익을 희생하는 불행한 운명으로 인도한 ‘악사(惡使)’로 규정한 평가도 있다.264)신국주, 앞의 책, 98∼100쪽 참조.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 관해 당시 조선의 위정자를 비롯한 식자들의 사 고방식과 일본 및 서구의 개화 문명에 대한 인식 태도와 안목의 한계성을 비판하면서 수신사행은 ‘선사’도 ‘악사’도 아니었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비록 수신사 김기수는 자신의 주관이나 비평보다 시찰 견문한 사실을 기술한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일본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뒤 개화 실정을 알기 위해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과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을 파견하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265)조항래, 앞의 책, 49∼56쪽 참조. 이는 김기수가 일본에 대한 관찰자로서는 부적당한 인물이었으나, 일본의 실상을 구체적이고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만으로도 고종을 위시한 정책 담당자에게 개화에 대한 관심과 일본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와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김기수가 귀국 직후 국왕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황해도 곡산 부사로 좌천되었던 사실 자체가 그의 사행이 조정의 개화 정책 실현으로까지 연결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징이라는 견해도 있다.266)하우봉, 앞의 글, 2001, 230, 24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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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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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수신사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조선 조야의 정황과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고려하면서도 이를 수신사 혹은 김기수 개인의 활동 및 한계와 결부하여 해석하는 데에는 미흡한 측면이 적지 않다. 비록 고종은 수신사의 파견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지만, 당시에는 개화 정책을 추진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미흡하나마 최초로 일본의 국정을 탐문한 김기수의 경험을 활용하기는커녕 그를 지방관으로 내려보낸 조치는 그의 무능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 정계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었다.

김기수는 견문을 통해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받아 기존의 일본 이적관 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내수외양론(內修外攘論)의 입장을 취하고 왕도론적 교화관과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267)하우봉, 앞의 글, 2001, 252∼258쪽 참조. 그럼에도 김기수의 견문은 적어도 국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에게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의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특히 그와 동행한 수행원들이 귀국 후 조선 정부의 개화 자강과 외교 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268)귀국 후 김기수의 행적이 일본 최초의 견미 사절단(遣米使節團) 정사(正使) 신미 마사오키(新見正興)와 엇비슷하였던 점은 흥미롭다. 신미 역시 귀국 후 외국 봉행(外國奉行)이 되었지만, 1864년 파면당해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다가 1869년 병사하였다. 이후 1917년 주일 미국 대사 모리스가 귀국하기 직전 양국 관계의 단초를 열었던 신미의 묘소를 참배하고 싶다고 외무성에 통보할 때까지, 외무성 관리는 물론 역사가들조차 그의 묘소 위치를 몰랐을 정도로 그는 철저하게 잊혀져 있었다. 아울러 견미 사절단의 수행원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가쓰 가이슈(勝海舟) 등이 귀국 후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시기는 달랐으나 한일 양국 최초의 대외 사절단 정사와 수행원들의 귀국 후 행로와 운명은 당시 양국이 처하였던 정치 상황의 소산이었다고 생각된다(宮永孝, 『万延元年遣米使節團』, 講談社(재출판), 2005, 327∼33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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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테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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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수신사 일행 중에는 귀국 후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본이나 청나라에 파견하였던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활약한 인물이 많았다. 이용숙은 귀국 후에도 1879년(고종 16) 청나라에 파견되어 이홍장(李鴻章)에게 서양과의 조약 체결 권고를 거부하는 문서를 전달하면서 병기 제조와 군사 훈련 등 무비 자강(武備自强) 문제에 대한 자문과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일본의 류큐(琉球) 병합으로 조선 침략 여부에 관심이 높아지자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을 파견할 때에도 1차 때와 똑같은 별견한학당상이라는 직임을 맡아 수행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주일 청나라 공사 하여장(何如璋)과 여섯 차례에 걸쳐 국제 정세 및 외교 정책의 진로, 통상상의 실무 등에 대해 회담하였다. 이어 1881년에도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어 무비 학습과 통상 문제를 협의하였다.269)『승정원일기』 1880년 4월 30일. 이듬해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청나라에 납치되어 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을 수행한 적도 있었다.270)송병기, 『근대 한중 관계사 연구』, 단국 대학교 출판부, 1985, 3∼36쪽 및 52∼53쪽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2,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1991, 107∼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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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관
부산 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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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고종 19) 현석운과 고영희는 제3차 수신사 조병호(趙秉鎬)의 수행원으로 참가하였다. 이 사행은 인천 개항을 앞두고 조일 수호 조규 체결 당시 미처 챙기지 못하였던 관세 자주권을 찾기 위해 파견되었던 만큼, 일본 견문 경험과 관세율을 협의할 실무 능력을 갖춘 그들이 발탁되었다고 여겨진다.271)하우봉, 앞의 글, 2001, 220∼221쪽. 또한 김용원은 기선과 총포 구입을 담당하였다가 실종된 참모관 이동인(李東仁)을 대신하여 조사 시찰단의 조사로 일본에 재차 파견되었다. 특히 김용원은 제1차 수신사행 때 총포, 기계, 아연을 구입하였던 적이 있는데, 대부분의 조사들이 귀국한 뒤에도 일본에 계속 남아서 화학(化學)과 양잠학(養蠶學)을 배웠다.272)허동현, 앞의 책, 62쪽.

둘째, 그들은 조일 수호 조규 체결 이전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대외 정책의 전개 과정에서 실무자로 지속적으로 등용되었다. 현석운은 귀국 후 그해 10월에 부산 훈도가 판찰관(辦察官)으로 개칭되자 두모포(豆毛浦, 동래) 판찰관직을 맡았으며, 1878년(고종 15) 부산 해관(釜山海關)이 설치된 이후 관세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79년 주일 대리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입경하면서 지형을 살필 목적으로 육군 중위 가이즈 미쓰오(海津三雄) 등으로 하여금 남양부(南陽府) 고온포(古溫浦)를 통해 육로로 상경하게 하였을 때, 그는 이를 항의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어 그는 1881년 왜학 역관으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참사에 임명되었다.273)『승정원일기』 1876년 10월 22일, 1879년 4월 20일 및 4월 24일, 1881년 1월 18일. 또 고영희는 1882년 일본 공사 하나부사의 차비 역관(差備譯官)이 되었고, 1884년에는 외아문 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 당시 학무아문 참의로 보빙대사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의 수행원으로 도일하였으며, 1895년 삼국 간섭 직후 일본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성이 절실한 상황에서 주일 공사로 발탁된 데 이어 1903년에도 주일 공사를 역임하였다.274)한철호, 「갑오개혁기(1894∼1896) 주일 조선 공사의 파견과 외교 활동」, 『백산 학보』 70, 백산 학회, 2004, 881∼887쪽.

또한 박기종과 김채길은 귀국 후에도 통사로 재직하면서 두모관의 관세 업무에 종사하였다.275)『승정원일기』 1880년 5월 20일. 특히 박기종은 1881년 조사 시찰단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부산에 머물렀을 때 이헌영(李永)을 찾아갈 정도로 큰 관심을 가졌으며, 1886년 부산 첨사가 겸직하였다가 독립된 부산항 경찰관으로 발탁된 뒤 1894년까지 근무하였다.276)이헌영, 문선규 옮김, 『일사집략』 지(『해행총재』 11), 민족 문화 추진 위원회, 1977, 60쪽 ; 『승정원일기』 1886년 10월 3일 ; 『일성록』, 1894년 7월 2일. 한편 김용원은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권동수(權東壽) 등과 함께 러시아 황제에게 조선의 보호를 간청하는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제1차 조러 밀약설이 누설되는 바람에 그는 더 이상 활동하기가 곤란해졌지만, 이 사실은 그에 대한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반증해 준다.277)이광린, 앞의 책, 1981, 201쪽.

다음으로, 수신사 일행 가운데 1880년대 전반에 걸쳐 새로 조직된 개화 자강 기구에 근무하거나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도 있었다. 고영희는 1880년(고종 17) 원산을 개항할 때 사무관, 1883년 인천을 개항할 때 조계 획정 사무를 맡았으며, 갑신정변으로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886년 기기국 방판 겸 종목국 사무를 역임하였다. 고종의 신 임이 두터운 데다가 유길준(兪吉濬)을 비롯해 김학우(金鶴羽)·장박(張博) 등 신진 개화파와도 긴밀하게 교유해 왔던 그는 갑오개혁 때에도 학무·농상아문 협판으로 등용되어 적극적으로 개혁에 참여하였다.278)大村友之丞 編, 『朝鮮貴族列傳』, 大村友之丞, 1910, 70∼71쪽 ; 細井肇, 『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 日韓書房, 1910, 49∼52쪽 참조. 김용원은 1884년 초 일본인 혼다 슈노스케(本多修之助)를 초청하여 ‘촬영국(撮影局)’ 즉 사진소를 설립하였다.279)『한성순보(漢城旬報)』 15호, 1884년 2월 21일자. 또한 박기종은 1896년 부산 개성 학교를 창설하여 기술과 일어 교육에 힘썼으며, 1898년부터 최초의 민간 철도 회사인 부하(釜下) 철도 회사·대한 철도 회사·영남 지선 철도 회사 등을 창립하여 열강의 철도 부설권 획득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280)大村友之丞 編, 앞의 책, 87∼89쪽 ; 조기준, 「박기종의 생애와 기업 활동」, 『박원표 선생 회갑 기념 부산사 연구 논총』, 박원표 선생 회갑 기념 부산사 연구 논총 편찬 위원회, 1970 등 참조.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박영선이다. 그는 김기수의 추천으로 수신사행의 서기로 참여하였지만, 각종 약품을 가지고 간 점으로 미루어 의학에 관심이 많고 의원을 겸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일본 체류 중 수신사 일행 가운데 발생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숙소를 방문한 준텐도 병원(順天堂病院)의 의사 오타키 도미조(大瀧富三)를 만나서 종두에 관해 대화를 나눈 뒤, 그와 함께 병원으로 가서 종두법을 최초로 전습받아 소개한 인물임에도 이러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281)다보하시는 수신사의 일본 시찰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지만, 박영선이 종두법을 조선에 전해 준 것만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삽화일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항한필휴』 8, 신사체경일기 곤, 6월 16일자 ; 田保橋潔, 앞의 책, 577쪽). 그뿐 아니라 그는 귀국할 때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가지고 들어와 지석영(池錫永)에게 전달해 줌으로써 종두법을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282)그를 통해 종두법을 알게 된 지석영은 부산의 일본 병원인 제생 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익힌 다음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를 시행하였으며,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으로 참가하여 두묘의 제작법, 저장법, 독우 사양법 등을 배웠다(이선근, 앞의 책, 444∼445쪽 ; 김두종, 『한국 의학 발전에 대한 구미 및 서남방 의학의 영향』, 한국 연구 도서관, 1960, 89∼91쪽 참조).

아울러 그는 지석영을 비롯하여 개화파 성향의 인물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이는 1881년 고영철(高永喆)이 영선사(領選使)의 학도로 기계를 학습하기 위해 톈진(天津)에 가게 되었을 때 강위(姜瑋)를 비롯한 47명의 시사(詩社) 동인들이 만든 『육교연음집(六橋聯吟集)』에 그의 시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서 확인된다. 1870년대 말에 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육교 시사(六橋詩社)는 청나라에 다녀온 한어 역관 출신이 주축을 이루고, 시문에 뛰어난 일부 양반과 중인이 참여한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 시사에서는 단순히 시나 짓는 것이 아니라 한어 역관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중국 및 서양의 동향과 근대적 문물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으며, 그에 관련된 서적을 구입해서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283)정옥자, 「시사를 통해서 본 조선 말기 중인층」, 『한우근 박사 정년 기념 사학 논총』, 지식 산업사, 1981 ; 이헌주, 『강위의 개국론 연구』, 고려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4, 23∼34쪽 참조.

그런데 이 시사에는 모임을 주도한 강위를 비롯하여 백춘배(白春培), 지석영, 그리고 박제경(朴齊絅)의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 평자(評者)로서 국민의 권리 보장과 서양과의 통상 및 기술 도입 등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피력한 배전(裵㙉) 등 개화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84)이광린, 앞의 책, 1981, 244∼257쪽 참조. 따라서 박영선이 중국을 비롯한 서양의 사정과 실상에 대한 정보가 빠르게 교환되는 육교 시사에 참여하였으며, 갑신정변을 일으킨 변법 개화파와 관련이 깊었던 인물들과 교유하였다는 점은 그가 수신사에서 돌아온 뒤에도 지속적으로 개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1883년(고종 20) 박문국(博文局)을 설립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간행하였을 때, 그는 강위·고영철 등과 더불어 신문 편집에 관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85)차상찬, 「조선 신문 발달사」, 『개벽』 신간 제4호, 1935 ; 계훈모 편, 『한국 언론 연표 1881∼1945』, 관훈 클럽 신영 연구 기금, 1979, 5쪽.

이상과 같이 제1차 수신사의 수행원들은 풍부한 외유 경험과 외교 교섭 또는 어학 능력을 갖추었기에 수신사의 일원으로 발탁되었지만, 수신사행을 계기로 직접 근대적 제도와 문물에 대한 견문과 식견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귀국 후에도 일본, 청나라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새롭게 전개된 외교 정책의 실무자로 계속 종사하거나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비록 당시 조선 정계의 상황으로 인해 수신사의 귀국 직후에는 대일 인식과 대일 정책이 근본적으로 전환되지는 않았지만, 수신사행을 통해 얻은 그들의 경험과 견문이 1880년대 개화 자강 정책을 추진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은 제1차 수신사가 거둔 귀중한 성과이자 의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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