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4장 조선 시찰단이 일본에서 맛본 근대
  • 1. 조사 시찰단의 파견과 활동
  • 조일 양국의 입장과 협의 내용
허동현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시절, 중국 문화권에서 일본은 변방(邊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를 맞이하여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에 발 빠르게 대응하여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 국민 국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하였다.286)西川長夫, 「日本型國民國家の形成—比較史的觀点から」, 西川長夫·松宮秀治 編, 『幕末·明治期の國民國家形成と文化變容』, 新曜社, 1995, 3∼42쪽. 새로운 동아시아 지역의 중심 국가로 거듭난 일본은 이 지역에서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문화 공급자로 급부상하였다.287)Key-Hiuk Kim, The Last Phase of East Asian World Order : 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 Berkeley and Los Angeles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pp. 328∼351 ;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 정치」, 『한국사 시민 강좌』 7, 일조각, 1990, 1∼23쪽. 1875년(고종 12) 일본은 미국이 자국의 문호(門戶)를 열게 할 때 썼던 포함(砲艦) 외교를 본뜬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켜 조선이 쇄국(鎖國)의 기치(旗幟)를 내리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1876년의 개항은 조일 양국 간 문화의 수혜자와 공급자의 위치를 뒤바꾼 문화 교류 사상 역전 현상을 초래하는 시점이다. 이때부터 문화의 강물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역류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왕조의 위정자, 특히 세계의 신조류(新潮流)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려 한 개화파 지식인의 눈에 일본은 따라 배워야 할 모델로 다가섰다.

조선 조정은 1876년 제1차 수신사(修信使)로 김기수(金綺秀)를 파견하 여 메이지 일본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그들의 군사 기술을 배우고, 나아가 양국의 신뢰를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양국 관계가 서구 중심의 국제법에 입각한 새로운 국제 관계의 시작임을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신사행의 일본 시찰 활동은 기존의 의례 외교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288)강재언도 “김기수나 국왕 및 위정자 모두가 당시의 수신사행을 에도기(江戶期)의 교린 외교의 부활로 보았다.”고 평가하였다(강재언, 정창열 옮김, 『한국의 개화사상』, 비봉 출판사, 1981, 189쪽). 당시 일본에 주재하던 영국의 한 신문 기자가 전통 복장을 착용하고 위엄 있게 행진하는 김기수 수신사의 행렬을 ‘화석과 같은 일행’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김기수 수신사행은 쇄국 조선의 무지(無知)가 빚은 시대착오의 해프닝이었다.289)佐佐木克, 『日本近代の出發 : 日本の歷史 17』, 集英社, 1992, 223쪽. 김기수는 기존의 통신사절과 다름없이 철저한 유교 의식의 소유자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에게서는 유교적 우월감에 젖어 일본 문물을 멸시하거나 폄하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서구식으로 개화된 일본 문물을 직접 목격한 김기수는 갈등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한 일본인에게서 조선도 서양의 근대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권유를 받고, 조선은 “선왕(先王)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선왕의 의복이 아니면 입지 않는 것을 한결같이 지켜 온 지가 이미 500년이나 되었는데, 설사 죽고 망하는 한이 있다 하여도 기기음교(奇技淫巧)로 남과 경쟁하겠느냐.”고 대답하였다.290)김기수(金綺秀), 『일동기유(日東記遊)』, 국사 편찬 위원회, 『수신사 기록』, 국사 편찬 위원회, 1971, 51쪽. 결국 그는 망국(亡國)의 길이 보이는 중화주의를 고수할 것인가, 일본처럼 서구를 따라 배워야 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하였던 것이다.

사실 조선 조정이 근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는 시점은 1879년(고종 16)이었다. 그해 들어 일본이 류큐(琉球, 현재의 오키나와) 왕국을 병합하고,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이리(伊犁, 지금의 중국 신장성(新疆省) 서북부 텐산 산맥 중부에 있는 분지)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자, 전략적으로 조선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홍장(李鴻章)은 조선 조정에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고 군사력을 강화하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밖으로는 개국(開國) 정책을, 안으로는 자강(自强)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으며, 1880년에 파견한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조선책략(朝鮮策 略)』은 조정의 이러한 정책 전환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291)Martina Deuchler, 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 Seattle and London :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77, pp. 87∼90 ; Key-Hiuk Kim, 앞의 책, pp. 285∼289 ; 송병기, 『근대 한중 관계사 연구』, 단국 대학교 출판부, 1985, 23∼32쪽 ; 권석봉, 『청말 대조선 정책사 연구』, 일조각, 1986, 157∼158, 185쪽 ; Young Ick Lew, “Dynamics of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1879-1889 : A Survey with Emphasis on the Korean Leaders” ;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淸季自强運動硏討會論文集』 上, 臺北 :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87, 595∼596쪽. 이 책은 당시 영토 확장을 호시탐탐 노리며 조선 왕조의 생존을 가장 위협하는 세력으로 러시아를 지목하면서, 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중국, 일본과 같은 전통적인 우방(友邦)과 더불어 새로 약소국을 돕는 부강한 문명국 미국과 연대해 세력 균형을 도모하라는 대외적 균세론(均勢論)을 제기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할 것과 이의 촉진을 위한 서양인 교사와 기술자 초빙 및 서구의 선진 과학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유학생의 해외 파견도 모색하라는 자강론(自强論)도 제시하였다.292)황준헌, 조일문 옮김, 『조선책략』, 건국 대학교 출판부, 1977, 15∼18, 31∼33쪽 ; 김영작, 『한말 내셔널리즘 연구 : 사상과 현실』, 청계 연구소, 1989, 99∼101쪽. 이에 조선 조정은 왕조의 존립을 도모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1880년(고종 17) 말에 이르러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기관으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개설하고, 미국과의 수교도 모색하는 등 일련의 개화·자강 정책을 발동하였다. 1881년에 들어서면서 조선 조정은 일본식 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고, 근대 기술을 수용하기 위한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였으며, 미국과의 수교를 추진하는 등 일련의 새로운 정책을 단행하면서 그 일환으로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에 파견하였다.293)허동현, 「1881년 조사 시찰단의 활동에 관한 연구」, 『국사관 논총』 66, 국사 편찬 위원회, 1995 참조.

확대보기
김옥균
김옥균
팝업창 닫기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의 주역은 고종(高宗)을 비롯하여 민영익(閔泳翊) 등 척족(戚族) 세력, 김홍집·어윤중(魚允中)·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 같은 개화파 관료였다. 문호 개방과 부국강병이 조정 정책으로 확립되고 그것을 추진해 나갈 기구도 설치되었지만, 이를 담당한 세력에게는 아직 해결해야 할 난제(難題)가 산적(山積)해 있었다. 특히 통리기무아문을 운영할 인재를 어떻게 기르고, 부국강병 정책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하며, 그 모델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지 등이 관건이었다. 이에 1881년 고종은 일본에 조사 시찰단을 보내 필요한 정보와 참고 자료를 수집하기로 하였다. 이 시찰단의 파견은 일본의 근대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견문한 바를 조선의 정책에 반영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근대화 운동 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중견 고위 관료인 조사(朝士) 12명과 유학생 등 수행원 27명, 일본인 통역 2명을 포함한 12명의 통역관, 하인 13명으로 구성된 총원 64명의 조사 시찰단은 1881년 4월 초부터 윤7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메이지 일본의 문물제도를 둘러보고 견문한 것을 조선의 개화·자강 정책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사실 조선이 일본에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한 것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확대보기
부산항
부산항
팝업창 닫기

조사 시찰단은 흔히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알려져 왔다.294)‘신사 유람단’이라는 명칭은 1930년 1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윤치호의 “12 신사 유람단”이라는 제목의 회고담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정옥자, 「신사 유람단고」, 『역사학보』 27, 역사학회, 1965가 발표된 뒤 보편화되었다. 본래 ‘유람’은 문물과 제도를 살핀다는 의미이지만 현재에는 다른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 의의가 간과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1881년 당대에 조선 조정은 이 시찰단을 이끈 12명의 조사를 각각 동래 암행어사(東萊闇行御史)로 임명하였을 뿐 대외적으로 공식 직함이나 명칭은 부여하지 않았다. 현존하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 기록을 살펴볼 때 이들을 ‘신사’로 부른 것은 일본 조정이었으며, 조선 정부는 일관성 있게 이들을 ‘조사’라고 지칭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이들은 공식적인 국가 사절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살피는 것으로 양국 조정이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사 유람단’보다는 ‘조사 시찰단’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였다.

사실 일본은 1876년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무력으로 강요하여 조선을 경략(經略)하는 데 필요한 무역권, 치외 법권, 종가(從價) 8%의 협정 관세, 조차권(租借權), 주사권(駐使權), 주병권(駐兵權) 등 여러 특권을 확보한 ‘제국주의적 침략자’였다. 그러나 일본은 소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류를 조선에 기증하면서 유학생 파견과 무기 구입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전달하며 조선을 일본식 제도 개혁으로 유도하려고 애썼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 조정에 러시아 침략에 대비할 것을 경고하였으며, 1880년에는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앞세워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중재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1876년 이래 일본은 조선에 대해 실상은 ‘제국주의적 침략자’였지만, 겉으로는 ‘개화와 독립의 옹호자’라는 양면적 태도를 보였다.295)유영익, 「한미 관계 전개에 있어서의 일본의 역할」, 『한미 수교 1세기의 회고와 전망』,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3, 136∼142쪽.

확대보기
하나부사 요시모토
하나부사 요시모토
팝업창 닫기

이러한 양면성은 조사 시찰단의 파견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 사전 교섭 없이 시찰단을 파견할 수 없었다. 이는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한성(漢城)에 들어간 후 국서(國書) 봉정(奉呈)을 빙자(憑藉)하여 먼저 조선 조정의 환심을 산 뒤 인천 개항을 의논하면서 꾸준하게 조선 조정이 쇄국 정책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점을 설파(說破)하면서 진신 자제(縉紳 子弟)들도 빨리 일본에 유람시킬 것을 권하였지만, 조정의 의론은 움직이지 않았다. 3일(양력 1881년 1월 5일)에 이동인(李東仁)이 와서 말하기를 “근일에 진신 자제 가운데 서너 명이 일본으로 몰래 가려 하니 급히 군함을 인천으로 회항시켜 줄 수 있느냐?”고 물어 왔기에 시기가 엄동설한(嚴冬雪寒)임을 이유로 날씨가 풀리기를 기다려야만 회항할 수 있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그 진신이라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의 도항(渡航)이 가능하다면 몰래 가는 것보다 떳떳하게 건너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여, 먼저 조정의 의론이 어떠한가를 시험해 보고자 본월 8일(1월 10일)에 (유학생 파견 문제 등에 관한) 7조 약안(七條約案)을 기초하여 조정이 생각을 바꿀 것을 촉구하고, 같은 달 10일에는 별지 갑호(1887년 11월자 하나부사 공사가 예조 판서 조영하(趙寧夏)에게 보낸 유학생 파견 촉구 서한) 및 『중서관계론(中西關係論)』, 서백리아도(西伯利亞圖)(시베리아 지도), 아세아동부도(亞細亞東部圖) 등을 직접 영의정에게 보내 학생 파견을 금일에 결행할 것을 촉구하였다.296)日本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 14 : 7, # 123, (2/28), 하나부사가 이노우에에게 전한 문서, 日本國際聯合協會. 1936, 295쪽.

1881년 1월 5일 조선 조정은 이동인을 통해 조사 시찰단 파견과 기선 구입 등의 계획이 있음을 하나부사 요시모토에게 알리면서 일본이 도와줄 수 있는지를 타진하였다. 이에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기상 여건 등을 이유로 시찰단의 파견 시기를 늦출 것을 종용하였으며, 자국의 직접적 이익과 관련된 인천 개항을 늦추어 달라는 요청은 거부하였다. 그러나 시찰단 파견이나 포함 구입을 위한 자금 조달에 대하여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동인과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대담에 잘 나타난다.297)『日本外交文書』 14 : 8, # 143, 344∼345쪽.

확대보기
이동인
이동인
팝업창 닫기

[이동인의 조사 시찰단 파견 통보 및 협조 요청]

금일 조선과 일본을 위해 인천 개항이나 공사 주경(駐京)보다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될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조선의 귀현(貴顯)한 소장(小壯) 지사(志士) 가운데 서너 명을 몰래 일본으로 가도록 돕는 일입니다. 군함을 급히 인천으로 회항시켜 이들을 태우고 공사도 함께 일본에 돌아가 그들이 문견(聞見)을 넓힐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겠습니다. 인천 개항에 앞서 이들이 일본에 왕래해 국외 정세를 깨달아 개혁의 첫걸음을 내디디는 것이 극히 중요합니다. 또 민심을 안정시켜야 하는 것은 경기만이 아니라 삼남(三南)의 경우가 가장 시급합니다. 이미 삼남의 유지 수천 명이 합의해 인천 개항의 불가함을 주장하기 위해 정월 20일(양력 2월 18일)까지 한성으로 들어오려 한다는 내보(內報)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심 안정이 이때의 급선무이므로 속히 기선(汽船) 수 척을 구입해 미곡 운수에 지장이 없게 하고, 방어의 방책도 보충하며, 크고 작은 총포도 구입해 방어의 기틀을 세워 믿고 의지할 바를 만드는 것 외에는 인심을 안정시킬 방안이 없습니다. 지금 이들이 일본에 갔다 오면 국정의 기축(機軸)을 쥔 사람의 방향이 정해질 수 있고 방향이 정해지면 개혁의 목적도 따라서 정해지며, 또 운수 장비와 적을 막을 무기가 갖추어진다면 개항한다 하여도 인심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포함을 구입하려면 상당한 재원이 필요한데 금일 조선은 궁핍하니 일본에 상담해 5%의 이자로 100만 원(圓)을 기채(起債)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 조정은 몸소 이를 하기는 꺼리지만 호족(豪族) 무리를 모아 민간 회사를 창립해 이들을 채주(債主)로 한다면 일본이 대여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부사 공사의 답변]

지사 서너 명이 한두 달을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군함은 이와 달리 수백 명이 타고 있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올 수 없으므로 기후가 따뜻해질 때를 기다려 오도록 하겠습니다. …… 두세 명의 뜻있는 선비가 도쿄(東京)에 가는 것은 매우 유익하므로 찬성하지만, 목전(目前)의 인천 개항을 지연하는 것은 실리(失利)가 자못 많기 때문에 내년을 넘길 수 없습니다. 포함을 구매하는 일은 귀국이 의결하기만 하면 이곳에서도 계약할 수 있고, 매입(買入) 방식도 지불 방법을 연부(年賦)로 하면 일시에 거액을 기채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조정에서 담보해 주는 경우 채주가 사사(私社)이거나 액수가 크다 하여도 성사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시찰단을 몰래 보내기보다 공개적으로 파견할 것을 유도하고자 1월 10일에 유학생 파견 문제 등에 대한 일본 측의 협조를 언급한 ‘7조 약안’을 조선 조정에 제시하였다.298)『日本外交文書』 14 : 7, # 123, 300쪽.

[7조 약안]

1. 일본과 조선은 국토가 인접하니 입술과 이가 서로 보호하듯 함은 이치와 형세상 당연하므로, 앞으로 조선이 다른 나라에게 공정하지 못한 일을 당하는 경우 일본 조정이 반드시 서로 도와 잘 조처할 수 있도록 중재하겠다.

2. 일본 조정이 서로 도와 쉽게 조처할 수 있으려면 조선 연해에 해군을 파견, 주둔할 필요가 있으므로, 부산포의 절영도(絶影島)를 주둔지로 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조선 조정이 보낸 해군 생도를 교수(敎授)하기에도 편리할 것이다.

3. 일본 군함이 항해 중 조선 선박을 만나면 반드시 힘써 보호해 우의와 친목을 표한다.

4. 조선의 선박이나 사민(士民)이 외국에 나간 경우 그 나라 주재 일본 영사가 각국과의 정규(定規)에 의거해 우의와 친목이 더하도록 힘써 보호하겠다.

확대보기
영도
영도
팝업창 닫기

5. 조선 조정이 앞으로 해군과 육군의 군제를 확장하고 각종 공업을 진흥하기 위해 교사와 기술자가 필요하다면 일본 조정이 이들을 천거하도록 하겠다.

6. 조선 조정이 군사, 공업 등을 배울 생도들을 일본에 파견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이들을 선발해 보내면 일본 조정은 이들을 각각 적당한 학교에 보내 열심히 교수하도록 하겠다. 소요되는 학자금도 본국의 생도들과 동일하게 하여 내외를 구분하지 않겠다.

7. 조선 조정이 필요로 하는 총포와 선함(船艦) 등은 일본 조정이 구입을 주선해 조선 조정도 일본 조정이 자용품(自用品)을 구입하는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

이 7조 약안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조사 시찰단 파견과 같은 조선의 대외 개방 조치를 환영하면서도 이를 틈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속셈이 잘 드러난다. 조선과 제3국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일본이 조정을 맡겠다는 조항이라든가, 해외에서 조선 선박을 보호하고 조선인에 대한 영사 업무를 대행해 주겠다는 조항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절영도를 일본 해군의 기지로 달라는 조항과 일본인 교사와 기술자를 조선에 보 내고 일본 유학생과 군사 장비 구입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조항에서도 조선을 군사, 기술, 문화 등의 방면에서 종속(從屬)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 조약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같은 달 20일 김홍집이 하나부사 요시모토에게 제시한 수정안을 보면, 절영도를 일본 해군의 거점으로 삼겠다는 조항만 빼고 나머지 조항은 몇몇 자구(字句)만 수정하였을 뿐 대부분 다 받아들였다.299)『日本外交文書』 14 : 8, # 145, 352쪽 참조.

[조선 조정의 수정안]

제1조에 대해서는 조선 조정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바이다.

제2조에 대해서는 군대 주둔은 인심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며, 조선에는 아직 소위 해군 생도가 없으니 빼는 것이 좋겠다.

제3조에 대해서는 인의(隣誼)의 두터움을 보여 주어 매우 감사하다.

제4조에 대해서는 위와 같다.

제5조에 대해서는 위와 같다.

제6조에 대해서는 위와 같다. 단, 학자금 부분은 삭제하는 것이 온당하다.

제7조에 대해서는 선린(善隣)의 성의이니 사양하지 않겠다.

확대보기
박정양
박정양
팝업창 닫기

한편 조선 조정은 7조 약안에 고무되어 이를 받은 이튿날 1월 11일(음력)에 박정양(朴定陽)을 비롯한 일곱 명을 조사로 선발하고 도일 선편을 구하기 쉬운 부산으로 출항지를 바꾸었다. 또한 유길준(兪吉濬)과 윤치호(尹致昊) 등 유학생도 수행원으로 합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사력 강화 계획의 일환으로 기선과 총포 구입, 별기군 창설을 추진하는 한편 절영도에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 태세도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보수 세력의 반대 여론을 우려하여 공식 적으로 하나부사 요시모토에게 시찰단의 파견을 알리지 못하였다. 그러자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1월 12일에 일본이 협력해 줄 것을 약속하는 서한을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앞으로 보내 시찰단의 조속한 파견을 다시 한 번 촉구하였다.300)허동현, 『근대 한일 관계사 연구 : 조사 시찰단의 일본관과 국가 구상』, 국학 자료원, 2000, 42∼43쪽.

일본의 협력 의사를 재차 확인한 조선 조정은 일곱 명의 조사가 동래로 출발하기 사흘 전인 1월 21일에 김홍집을, 이튿날에는 이동인을 통해 하나부사 요시모토에게 시찰단 파견을 알렸다. 아울러 군사 및 기타 분야의 교사 초빙건과 총포와 포함 구입 자금 대여 여부에 대하여서도 문의하였다. 그러나 조사들의 임무라든가 상세한 인적 사항은 알리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은 시찰단이 동래에서 출항하기 전까지 이들의 구체적 임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2월 9일(양력 3월 8일) 부산 주재 일본 영사 곤도 마스키(近藤眞鋤)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박정양, 홍영식, 강문형(姜文馨), 어윤중, 엄세영(嚴世永), 조준영(趙準永) 등 여섯 명의 조사”가 2월 중순경 동래에 집결한다는 정보를 탐지하였다고 보고하면서 “아직 이들이 어떠한 목적으로 도항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우리 나라 사정과 외국의 형세 등을 시찰하기 위한 것 같다.”고 추측하고 있다. 조선 조정은 3월 24일에 시찰단 도일에 관한 협조 요청 공한(公翰)을 동래 부사를 통해 곤도 마스키에게 보내면서도 이들의 임무를 알리지 않았다. 이 공한은 겉으로는 시찰단 일행의 성명과 관등 등 인적 사항을 알리고 이들의 도일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미 협의된 7조 약안에 따른 사적 성격의 도일(渡日)이지 결코 조정 차원의 공식 사절이 아님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301)『日本外交文書』 14 : 7, # 127, (5/6), 우에노가 다루히토 친황에게 보낸 문서, 부속서 2, 306쪽. 당시 통보된 조사들의 인적 사항은 이원회와 김용원을 제외한 조준영, 박정양, 엄세영 등 10명의 이름과 관등이었다.

[조사 시찰단 도일에 관한 협조 요청]

우리나라 인민들이 귀국에 왕래하도록 허용한 것은 이미 조규(條規)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조사 10명이 귀국을 유람하고자 하며 각기 수명의 수 원(隨員)을 거느렸습니다. 선박의 임차(賃借)와 인원 조검(照檢) 절차는 반드시 귀하의 지시에 따라야 하므로 먼저 명단을 통보하는 바입니다.

공한을 받은 곤도 마스키는 다음 날 외무경에게 시찰단이 4월 말경 나가사키(長崎), 고베(神戶),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등지를 거쳐 도쿄(東京)로 갈 예정이며, “유람을 빙자하지만 국왕으로부터 우리 나라 정세를 시찰하라는 특지(特旨)를 받아 파견되었다.”고 보고하고 이들의 활동에 협조해 줄 것을 품의(稟議)하였다. 그 후 곤도 마스키는 부산에 도착한 시찰단의 예방을 받았으며, 그들을 위해 선편을 주선해 주고 두 명의 일본인 통역관을 대동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 조정은 영사의 보고를 받고 시찰단의 활동에 대한 협력 방침을 조선 조정에 알렸다. 외무성 명의의 이 공한은 시찰단이 일본으로 떠난 뒤 예조(禮曹)에 접수되었다.302)고려 대학교 아세아 문제 연구소, 『구한국 외교 문서 : 일안』 1, 고려 대학교 아세아 문제 연구소, 1967, # 72, 56쪽.

조사 시찰단에 관한 일본 조정의 협력 방침(수신 : 예조, 발신 : 외무성)

부산 영사의 전보에 조선 고위 관리(貴紳) 10명과 수행원 40여 명이 부산을 떠나 고베에서부터 육로로 도카이도(東海道)를 경유하여 도쿄에 도착한다고 하였습니다. 임무가 본래 유람이라 공식 사절과 다르지만 일본 조정은 그들이 객지(客地) 사정에 어두운 점을 고려하고, 분잡(紛雜)한 것도 꺼리실 듯하여 특별히 외무성의 4등 속관(屬官)을 고베로 보내 연로(沿路)의 객사(客舍), 역부(役夫), 거마(車馬) 등을 수행, 지도하게 하며, 일체 일용 잡화까지도 청할 때마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 각 부현(府縣) 내의 제조창(製造廠) 등은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신사(紳士)들이 보기를 바라면 즉시 안내해 마음껏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 가는 곳마다 군중이 잡다하게 모여드는 것을 막아 불경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사카의 조폐국(造幣局)이나 교토의 금궐(禁闕)과 같이 일반인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도 마음껏 관람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일. 우리 신사나 인민들 가운데 이들을 초대해 접대하려는 자가 있으면 뜻대로 왕래, 교유하는 데 진정 장애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을 각지의 부지사(府知事)와 현령(縣令)에게 고지(告知)하여 조행(照行)을 편하게 하겠습니다.

[부록 : 도쿄 도착 후 접대 요령]

현. 일행 인원이 도쿄에 도착하면 외무성 관원이 편의를 주선하게 하겠습니다. 작년 수신사의 예와 같이, 숙소는 약도(略圖)와 같이 조죠지(增上寺) 내 해군이 관리하는 관사 한 채를 제공하겠습니다. 만약 이들이 다른 곳에 묵고 싶어 한다면 이것도 그들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현. 학술 연구와 왕명을 받들어 수행하여야 할 사무를 비롯하여 관람, 시찰 등도 실로 지식과 견문을 개발할 만한 것을 택하도록 힘써 유도하고 조처함으로써 유감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현. 군사 훈련에 관한 사항은 정기 개장일을 기다려 관병(觀兵)을 권하겠지만, 특별히 이들을 위해 임시로 관병할 수 있게 해 보겠습니다.

현. 이 밖에도 수시로 협의하여 간절히 유도하기에 힘쓰겠습니다. 다만, 명을 받들어 처리하여야 할 임무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므로 일단 보류해 두고 미리 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 공한을 받자 곧바로 예조 판서 명의로 일본 공사에게 서한을 발송하여, 시찰단은 공식 사절이 아니며 이들에게 특별히 부여된 임무도 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303)『花房公使朝鮮關係記錄』 卷4, 派員視察.

[예조의 답신]

우리나라 습속은 단지 규모를 지키는 것인데, 귀국은 다른 나라 사람이 유람하여도 무방하다 하였으므로 조사들이 떠난 것입니다. 그들이 보고 들으며 배우고 익히는 것은 그들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는 본래 조정이 간섭할 수 없는 바입니다. 우리 조정이 그들에게 내린 지침은 대략 이와 같으니 이를 헤아려 번잡하게 만들지 말 것을 바랄 뿐입니다.

이렇듯 일본의 배려에 감사 인사 한마디 없이 조사 시찰단이 사적인 일본 탐방이라는 말만 되풀이하자, 일본 공사에게 “조사 시찰단에 대한 의뢰의 뜻도 없고, 우리의 협조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는 말도 없다.”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일본이 시찰단 활동에 적극 협조해 주고 그에 상응하는 양보, 예를 들어 일본인이 조선 내에서 개항장 밖을 여행할 권리를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확대보기
고종
고종
팝업창 닫기

비록 조선 조정이 밖으로 개방을 하고 안으로 부국강병을 추진하여야 한다는 사세(事勢) 판단에 따라 주체적으로 시찰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 지만, 그 파견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조선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본이 계획 입안(立案) 단계부터 적극 협조하였기에 실현될 수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