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4장 조선 시찰단이 일본에서 맛본 근대
  • 1. 조사 시찰단의 파견과 활동
  • 조사 시찰단의 임무
허동현

12명의 조사 시찰단은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선발하였다. 고종은 이들에게 보수 세력의 눈을 피해 부산까지 비밀을 유지하고 갈 수 있도록 ‘동래 암행어사’라는 직함을 부여하였다. 또한 고종은 이들에게 일본 조정 내 여러 성(省)이나 세관(稅關)의 직무에 관한 사항을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밀명을 개별적으로 내렸다. 먼저 1881년 1월 11일(음력)에 박정양, 조준영, 엄세영, 강문형, 심상학(沈相學), 홍영식, 어윤중 등 일곱 명의 조사를 선발하였다. 이들에게는 각각 일본 내무성(內務省), 문부성(文部省), 사법성(司法省), 공부성(工部省), 외무성(外務省), 육군성(陸軍省), 대장성(大藏省)의 직무를 파악하여 보고할 임무가 주어졌다. 특히 어윤중과 홍영식에게는 미국과의 수교에 대비한 특별 임무도 부여하였으며, 어윤중은 유길준을 비롯한 자신의 수행원들을 유학시키는 일도 맡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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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직
조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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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에는 이헌영(李永), 민종묵(閔種默), 조병직(趙秉稷), 이원회(李元會)를 선발하였다. 이원회는 육군의 조련 상황을, 이헌영 등 세 명은 세관의 제도와 기능을 파악하여 보고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원회는 2월 10일에 통리기무아문의 군계선함사차정(軍械船艦事差定) 참획관(參劃官)으로 임명되어 참모관(參謀官) 이동인과 함께 기선과 총포 구입을 맡아 시찰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닷새 후인 15일경에 이동인이 실종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26일에 다시 조사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이동인 대신 김용원(金鏞元)이 “기선 운항에 관계된 제반 사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아 동래 암행어사 자격은 아니지만 조사 시찰단 일원으로 합류하였다.

당초 계획과 다르게 시찰단의 규모가 점차 확대된 이유는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정이 제1차로 박정양 등을 조사로 임명한 목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전반적인 정세, 즉 “조정 의론(朝廷議論), 국세 형편(局勢形便), 풍속 인물(風俗人物), 교빙 통상(交聘通商)” 등을 상세히 탐지하고, 정부 각 부서의 직무를 파악하여 조선 내정 개혁의 지침이 될 방안을 강구하되, 특히 1880년(고종 17)에 신설한 통리기무아문의 운영에 필요한 정보와 참고 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1월 24일 부산을 향해 길을 떠났고, 어윤중과 홍영식을 제외한 다섯 명은 2월 17일부터 23일(음력) 사이에 동래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함께 가기로 한 두 사람이 오지 않는 데다 경비마저 지급되지 않아 일본으로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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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세영
엄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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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윤중과 홍영식은 2월 28일 한양을 떠난 이헌영 일행을 3월 4일에 문경에서 만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들 두 사람이 문경에 머문 이유는 이헌영 등 조사들이 더 충원된 것과 관련 있다. 조정이 조사를 더 선발한 까닭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최대 현안이던 세칙(稅則)에 관한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던 데서 찾아볼 수 있다. 협상 과정에서 조선 조정은 일본의 인천 개항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1882년 9월이면 인천을 개항할 수밖에 없었다. 인천 개항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세칙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정부는 앞으로 창설될 세관 운영과 인천 개항이 초래할 사회 적·경제적 여파에 대비한 조치를 서둘러 마련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조정은 2월 2일에 이헌영 등 세 명을 더 충원하여 일본의 세관 사무를 파악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헌영 등은 조사로 임명되고도 한 달이나 지나서 출발하였는데, 이동인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말미암아 인천 개항에 대비한 기선과 총포 구입 계획이 차질을 빚었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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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전경
제물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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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산에 비해 인천의 쌀값은 30∼40%나 쌌다. 인천이 개항되면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어 경기 지역의 쌀값은 급등할 것이고, 이 때문에 민심이 동요하여 민란(民亂)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해 기선을 구입하여 경기 지방으로 쌀 수송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쌀값 급등을 막아 민심의 동요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2월 10일 조정은 이원회와 이동인에게 기선과 총포 구입 계획을 맡겼으나 이동인의 실종으로 차질을 빚었다. 게다가 곧이어 영남 만인소(嶺南萬人疏)를 필두로 위정척사 운동(衛正斥邪運動)이 불같이 일어나자 2월 26일 조정은 이원회와 김용원을 조사 시찰단에 합류하도록 하였으며, 각각 육군 조련과 기선 운항에 관한 정보를 수집·보고할 임무를 부여하였다.304)허동현, 앞의 책, 2000, 51∼53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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