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4장 조선 시찰단이 일본에서 맛본 근대
  • 2. 근대 국가의 표상으로서의 일본
  • 일본형 국민 국가의 탄생
허동현

1881년 당시 조사 시찰단이 둘러본 메이지 초기의 일본은 ‘문명개화(文明開化)’를 기치로 프랑스 혁명 이래 서구 국민 국가가 만들어 낸 근대화 기제(機制)를 베껴 들이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육군은 프랑스, 해군은 영국, 교육은 미국, 황실은 영국, 헌법은 독일의 제도를 도입해 일본의 특성에 맞게 변형하여 이입하는 데 열중하였다. ‘문명개화’의 사전적 의미는 메이지 초기의 서구 따라 하기 풍조를 말한다. 그러나 문명개화로 상징되는 일본의 근대는 단순한 서구 문물과 제도의 도입만이 아니라, 고대의 천황제를 다시 살려 낸 메이지 유신의 불가피한 산물로서 일본 고대로의 복고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서구 근대와 일본 고대의 유착’이라는 일본 근대의 특수성이 나온다. 메이지 유신 주도 세력이 창출한 ‘서구의 역상(逆像)’으로서의 일본 근대는 서구 근대가 ‘오해 또는 오역’되거나 ‘날조된’ 것으로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다. 여하튼 조사 시찰단이 일본을 방문한 1881년 무렵에는 일본 근대의 원형이 거의 완성되었으며, 이는 일본형 국민 국가라는 표상으로 존재하였다.

메이지시대 일본인이 구현하고자 하였던 근대는 국민 국가의 모습으로 가시화되었다. 서구 근대의 산물인 국민 국가는 프랑스 혁명기의 프랑스인에게는 인간 해방의 장치였고, 메이지시대의 일본인에게는 탐구하여 구현해야 할 목표였다. 그리고 개화기의 조선인에게는 이루려다가 실패한 목표였고, 민족의 통일을 꿈꾸는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아직 달성하지 못한 미완의 과제이다.317)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New York, Verso, 1991(Revised Edition). 우리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이 출판되었다. 앤더슨, 윤형숙 옮김,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나남, 1991 ; 앤더슨, 최석영 옮김, 『민족의식의 역사 인류학』, 서경 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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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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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설들의 개념 정의를 정리해 보면 비서구 지역에서의 국민 국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318)西川長夫, 앞의 글, 西川長夫·松宮秀治, 앞의 책, 1995, 3∼42쪽. 첫째, 국민 국가는 정치 체제가 군주제든 공화제든, 민주적이든 전제적이든 국가를 담당하는 주체가 국민이어야 한다. 또 그 국가가 국민 국가인지는 국제적으로 서구 국민 국가의 인정 여부에 달려 있으며, 서구의 가치 기준에 따른 문명화 곧 서구화 정도가 판정을 하는 기준이 된다. 둘째, 국민 국가는 국가 통합을 위해 의회, 정부, 군대, 경찰 등 지배 억압 기구로부터 가족, 학교, 언론 매체, 종교 등 이념적 장치까지 여러 가지 장치가 필요하며, 국민 통합을 위한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셋째, 국민 국가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민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국민 국가는 세계적인 국민 국가 체제에서 그 위치가 설정되며, 각각의 독자성을 표방하면서도 서로 모방하면서 유사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

당시 일본은 서구의 근대화 기제를 옮겨 들이는 데 열중한 결과 국가 통합(헌법, 의회, 징병에 의한 국민군), 경제 통합(교통망, 토지 제도, 화폐와 도량형의 통일), 국민 통합(호적, 박물관, 정당, 학교, 신문) 등 국민 국가의 뼈대를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 조사 시찰단이 눈여겨본 이러한 일본의 변화상은 시찰단원의 개혁 구상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정치권력의 중앙 집권화를 진행하였다. 1868년의 왕정복고(王政復古)는 단순히 고대 천황제로의 복귀가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집권 정부의 통치 체제는 중국의 율령(律令) 체제를 기반으로 한 고대 천황제를 복구한 것이라기보다 서구 근대 국민 국가의 국가 통합을 위한 통치와 지배 장치를 일본식으로 바꾸어 도입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881년경에는 집권 정부가 사실상 모든 정치권력을 독점하였지만, 외형상 서구의 삼권 분립 형태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정부의 권력 독점에 반발해 입헌 정체를 수립하고 민선에 의해 국회를 개설할 것을 요구하는 자유 민권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사법권의 독립과 근대 형법의 공포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징병제(徵兵制)에 의한 국민군(國民軍)도 확보하고 있었다. 사실 조사 시찰단이 둘러본 일본형 국민 국가의 국가 통합 장치는 시민 계층의 성장이 미미하여 다원화된 근대 시민 사회를 창출해 내기에는 근원적 한계가 있었다. 이후 일본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메이지 초기의 비민주적인 집권 정부는 태내(胎內)에 군국주의 일본의 원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구의 제도를 겉으로나마 모방한 당시 일본의 통치 체제는 입헌 체제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체제였고, 삼권 분립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근대 정치 체제의 발전 방향과 일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의 통치·지배 기구는 일본처럼 시민 계층이 성장하지 못하였던 당시 조선이 본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조사 시찰단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에는 이미 상품 유통과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정보와 지식도 원활하게 교류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의 문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메이지 조정은 철도망과 도로망을 건설하고 해운업을 일으키는 교통의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우편·전신 제도를 도입해 통신 제도의 근대화도 이룩함으로써 전 국토가 균형적으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정비된 가로망을 갖춘 도시의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인력거(人力車)와 마차가 분주히 오가는 등 문명의 이기들이 잇따라 선을 보였다. 근대의 표상으로서 공간의 문명화는 조사들을 매혹하고도 남았다.319)差波亞紀子, 「汽船と道路」, 高村直助, 『産業革命 : 近代日本の軌跡 8』, 吉川弘文館, 1994, 68∼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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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강력한 중앙 정부 주도로 회사 제도 도입, 화폐 제도 통합 등 각종 경제 제도의 개혁과 조세 제도 개정 및 사무라이의 봉록(俸祿)을 공채(公債)로 대체한 질록 처분(秩祿處分)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일본은 이러한 경제 제도의 정비를 바탕으로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추진하여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메이지 조정이 펼친 경제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통일된 국가 체제의 전제 조건인 중앙 집권적 재정 기구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1869년에 만든 재정을 담당하는 대장성은 내정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하였으며, 1870년에 근대 산업을 이식할 목적으로 설립한 공부성은 철도와 광산을 중심으로 전신, 토목, 조선 등 여러 부문에서 정부 주도의 관영사업(官營事業)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당시 일본은 안으로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경제 통합의 초석을 다졌다. 아울러 밖으로 류큐 왕국을 병합하고, 타이완을 침략하며,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여 시장을 확대해 나가는 팽창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이미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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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욕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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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개화’ 정책은 한마디로 서양의 문명을 이식하여 전 국민을 중앙 집권적으로 통치하는 체제를 만들어 내고 서구 기준에 맞추어 국민을 ‘문명화’하는 것이었다. 이에 균일한 국민을 형성하기 위하여 신분제를 철폐하고 사민 평등을 선언하였으며, 속지주의(屬地主義)에 입각하여 모든 국민을 동일한 호적 제도에 파악하였다. 1872년에는 학제(學制)를 반포하여 균일한 국민을 길러 내는 제도적 장치로 학교 설립을 도모하였으며, 인신매매의 금지 및 직업과 이주의 자유도 보장하였다.

1873년에는 구력(舊曆)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택하여 서구 열강과 동일한 시간 체계를 세웠고, 1871년에는 ‘신문지 조례(新聞紙條例)’를 제정하여 정부에 대한 비판을 엄격히 막음으로써 신문을 정부 정책의 홍보 또는 이데올로기 전파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또 신도(神道)를 국교로 정하고 종교를 통한 문화 통합을 시도하는 한편, 서구 기준에서 볼 때 야만적인 남녀 혼욕(混浴)을 엄금하는 등 풍속을 서구식으로 개조해 나갔다.320)安丸良夫, 「1850∼70年代の日本-諭新變革」, 『岩波講座 日本通史(近代 1)』 16, 岩波書店, 1994, 40∼43쪽 ; 牧原憲夫, 「文明開化論」, 『岩波講座 日本通史(近代 1)』 16, 岩波書店, 1994, 259∼264쪽. 이와 같이 조사 시찰단은 서구화, 즉 문명화의 실현 도구로서 새롭게 도입된 여러 제도와 장치를 비롯하여 이로 인해 초래된 사회, 풍속의 대변혁을 직접 목격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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