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4장 조선 시찰단이 일본에서 맛본 근대
  • 3. 조선의 근대화를 꿈꾸다
  • 근대 일본에 대한 인식과 세계관의 변화
허동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더구나 기득권층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기란 더더욱 쉽지 않다. 인간이 사물을 보는 인식의 폭과 깊이는 그가 받은 교육 내용과 그가 보고 들은 세상의 크기에 비례한다. 조사 시찰단 일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일본이 갖추어 놓은 국민 국가의 여러 기제와 장치를 이해하였으며, 자신이 느낀 만큼 조선을 개혁하는 데 응용하려 하였다. 당시 조사들은 크게 서로 다른 두 개의 눈으로 근대 일본을 진단하였다.

어윤중과 홍영식은 개항 이후에 초기 개화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박규수의 영향을 받았고, 김홍집이나 박영효, 김옥균 등과 교류하면서 초기 개화파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조사로 임명되었을 즈음에 이들은 이미 기존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과 소중화 의식(小中華意識)에서 벗어나 일본 근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조사들은 여전히 유교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를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방문한 조선국 조사들은 모두 다 개진파(開進派)라고는 할 수 없다. 수구파(守舊派)와 개진파로 나뉘어 경성(京城)에 있을 때는 서로 지론(持論)을 고집하면서 얼음과 숯불처럼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형세이니, 이번에 일본 시찰의 내명(內命)을 받고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고는 하여도 은연중에 양 파가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고 한다.”는 『조야신문(朝野新聞)』 1881년 5월 20일자(양력)의 글을 보더라도 시찰단은 근대 문물 수용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점은 조사 시찰단이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 예방차 들른 부산 영사관에서 벌어진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부산에서 곤도 영사가 이 일행을 방문하였을 때 참의(參議) 심상학이 손으로 눈을 가리자, 영사는 이를 보고 그 이유를 물어 만약 눈병이 났다면 의사한테 보이라고 하였더니, 개진당의 어윤중이 옆에서 나서면서 말하기를 “심의 병은 일본의 물로 씻고 일본의 바람을 쏘일 때 당장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자 수구당의 심상학은 크게 노해 그 이유를 힐문(詰問)하니, 어윤중이 이에 답해 “여러분의 눈빛이 공연히 빛나고 있지만 소위 눈뜬장님이라 아직은 사물을 보는 눈이 없다. 이제 일본에 건너가 그 개화를 목격함으로써 가슴속에 갇혀 있는 (수구 사상을) 한번 씻어 낸다면 비록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더니 끝내 한바탕 논쟁이 일어났다.321)『조야신문(朝野新聞)』 1881년 5월 20일자.

이 기사에서 우리는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어윤중이 보기에 ‘사물을 보는 눈이 없는 눈뜬장님’인 심상학 같은 동료 조사들은 일본 근대 문물 시찰을 통해 세계관을 바꾸게 하여야 할 교육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윤중이 스스로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떴다고 자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화사상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틀로 일본 을 둘러본 어윤중, 홍영식과 유교적 세계관을 고수하면서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접한 심상학 같은 조사는 근대 일본에 대한 이해가 여러모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메이지시대에 일본인이 만들어 낸 일본형 국민 국가의 요모조모를 이해하고 진단하는 폭과 깊이에서나, 일본을 시찰하면서 얻은 조선 개혁에 관한 구상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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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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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유교적 가치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던 어윤중과 홍영식에게 일본 시찰은 자신들이 꿈꾸는 새로운 국가 구상의 밑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점은 어윤중의 조선 개혁 방안에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가 평소에 유교를 숭상하고 게다가 유약하고 나약함에 빠진 것을 어질다고 하기 때문에 용감하게 기상을 떨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풍속을 변혁하려면 먼저 이들로 하여금 옛 습관을 통렬히 혁파하게 해야 한다. …… 과거를 혁파하면 공명진취(公明進取)를 도모하는 무리가 모두 앞 다투어 외국에 나가 재주와 기예를 습득하여 돌아올 것이다. 만약 과거를 폐지하지 않으면 인재가 나오지 않을 것이며 모두 옛 학문에 안주하여 학술의 정진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 옛사람은 누구나 빈궁(貧窮)을 편안히 여기는 안빈(安貧)을 어질다고 보았으니 진실로 옳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가난을 편안히 여기게 만듦으로써 살아갈 방도를 세우는 데 힘쓰지 아니하게 하였으니 어찌 그 입과 몸을 지탱할 수 있겠는가.322)어윤중(魚允中), 『수문록(隨聞錄)』, 허동현 편, 『자료집』 13, 2000, 15, 25, 56쪽.

서세동점의 시대를 맞아 일본은 ‘서구의 충격’에 발 빠르게 대응하여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형 국민 국가를 이루면서 지역의 중심으로 거듭났다. 이제 일본은 조사 시찰단에게 더 이상 왜(倭)로 멸시되는 부정적인 타자가 아니라 따라 배워야 할 유의미한 타자로 다가섰다. 특히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 어윤중, 홍영식 같은 이들의 눈에 일본은 야만이 아닌 문명의 상징으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국권론자(國權論者)로 명성이 높았던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고, 메이지 조정이 실현한 문명개화 정책이 이루어 놓은 성취를 직접 목격함으로써 집권적 조정 주도의 개혁론, 다시 말해 계몽을 통한 위에서부터의 개혁을 구상하게 되었다.323)허동현, 「1881년 조사 어윤중의 일본 경제 정책 인식」, 『한국사 연구』 93, 한국사 연구회, 1993, 124∼129쪽. 이들은 메이지 일본을 새로운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이 생존하려면 따라 배워야 할 이상적 개혁 모델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홍영식이 귀국한 후 고종에게 복명한 다음의 문답에 잘 드러난다.32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81년 9월 1일조 ; 어윤중, 『종정연표(從政年表)』, 허동현 편, 『자료집』 12, 2000,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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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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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종 : 일본의 제도가 장대하고 정치가 부강하다고 하는데, 살펴보니 이와 같더냐?

홍영식 : 일본의 제도가 비록 장대하나 모두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재력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매우 많으므로 항상 부족함을 근심합니다. 그 군정(軍政)은 강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이룩한 것입니다. 일본이 노력한 바를 갖고 현재 이룩된 것을 보면 진실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고  종 : 오로지 부강만을 도모하던 전국시대와 동일하더냐?

어윤중 : 진실로 그러합니다. 춘추 전국은 바로 소전국(小戰國)이며 오늘날은 바로 대전국(大戰國)이 라, 모든 나라가 다만 지력(智力)으로 경쟁할 뿐입니다. …… 현재 형세를 돌아볼 때 부강함이 아니면 국가를 지키지 못하므로 상하가 한뜻으로 노력할 것이 바로 이 한 가지 일일 뿐입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보고 듣고 익히는 과정에서 일본처럼 근대 국민 국가를 수립할 꿈을 꾸었다는 점에서 ‘국민 국가 수립론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조사들에게 4개월가량의 일본 경험은 수십 년 동안 몸에 밴 유교의 가치와 세계관에서 벗어나도록 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조사들은 일본을 둘러보면서 공자(孔子)의 문묘(文廟) 제향(祭享) 폐지를 개탄하였는가 하면 유학이 쇠잔(衰殘)해 가는 것을 몹시 아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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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현도상찬(五聖賢圖像讚)
오성현도상찬(五聖賢圖像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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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 갖춘 서적들을 보면 십중팔구는 서양 책이다. 공부하는 사람 네댓 명만 이따금 도서관을 찾을 뿐 학생들이 없다. 근래에는 제향(祭享)을 폐지하였는데, 어떤 이가 말하길 요직에 있는 사람이 외람되게 이런 일을 하였다고 한다. 어찌 부끄럽고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325)민종묵(閔種默), 『문견사건(聞見事件)』, 허동현 편, 『자료집』 12, 2000, 124∼125쪽.

그러다 보니 이들은 유교적 가치 기준으로 일본의 근대 문물을 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으며, 근대 일본의 여러 모습에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일본이 겉으로 보기에 부강해진 것은 인정하였지만 그로 인해 나라 재정이 나빠지고 생활 풍습이 서구화된 것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박정양은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에게 이런 자신의 소감을 세세하게 보고하였다.

고  종 : 일본의 강약이 어떠하더냐?

박정양 : 일본은 겉모습을 보면 자못 부강한 듯합니다. 영토가 넓지 않은 것이 아니고 군대가 굳세지 않은 것이 아니며, 건물과 기계가 눈에 화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살피면 실은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일단 서양과 통교(通交)한 이후로는 단지 교묘한 것을 좇을 줄만 알고 재정이 고갈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기계를 설치할 때마다 다른 나라들에 진 부채가 매우 많습니다. 기계에서 남는 이익을 다른 나라에서 빌린 빚의 이자와 계산해 보면 간혹 부족하다고 걱정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서양 사람들에게 간섭을 받아 감히 기운을 떨치지 못하고 한결같이 그 제도를 좇아 위로는 정법(政法)과 풍속에서부터 아래로는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절차가 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고  종 : 왜인이 다른 나라의 법을 다 좋아하여 필시 절충하지 않았으므로 의복까지도 그와 같이 되었구나. 이는 그 나라의 잃은 바이다.326)박정양(朴定陽) 등, 「동래암행어사복명입시시연설(東萊暗行御史復命入侍時筵說)」, 한국학 문헌 연구소 편, 『박정양 전집』 4, 아세아 문화사, 1984, 332쪽.

박정양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조준영은 일본이 무조건 서양을 본떠 그 나라 땅과 백성 이외에 옛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을 정도라고 하였고, 강문형은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서양을 모방하려고만 하니 결국 잃는 것이 더 많은 셈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준영처럼 “그 군제나 무기, 배, 기계, 농법 등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 백성들을 넉넉하게 할 만한 것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처럼 이들은 일본의 부강을 인정하였지만, 그로 인해 나라 재정이 나빠지고 생활 풍습이 서구화된 것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따라서 전통적인 가치를 보존하는 범위 내에서 국가의 생존과 백성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산업 기술, 영농 방식 같은 것은 선별적으로 배워서 익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유교의 가치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일본의 제도나 문물에 대하여 개방적 자세를 취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위정척사론자들에 비해 근대 문물의 수용에 상대적으로 유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넓게 볼 때 이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근대 문물과 제도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장기적으로 이들의 유교적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어윤중이 ‘눈뜬장님’이라고 조롱하였던 심상학을 비롯한 대다수 조사들은 유교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선별적으로나마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려 하였다는 점에서 ‘동도서기론자(東道西器論者)’라고 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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