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5장 개화기에 일본을 본 두 시선
  • 3. 긍정적 일본 인식
  • 일본은 독립과 개화의 옹호자이다
허동현

일본은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 제1조에서 조선의 자주를 천명하였으며, 수신사와 조사 시찰단 같은 외교 사절과 문물 시찰단을 초청하여 당시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소개하고 조선의 개화를 권고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진보적 개화파의 눈에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고 근대화를 지원하는 외세로 비쳤다. 그러나 청나라가 임오군란을 계기로 부차적 제국주의(secondary imperialism)로 세력화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한 1882년부터 청일 전쟁으로 한반도에서 물러나는 1894년(고종 31)까지 일본은 겉으로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지지하는 척하였지만 실제로 실행한 바가 없었다. 사실 일본은 무력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을 경략(經略)하는 데 필요한 무역권, 치외 법권, 종가(從價) 8%의 협정 관세, 조차권(租借權), 주사권(駐使權), 주병권(駐兵權) 등의 특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1894년까지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청나라와 비등(比等)한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본심을 드러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러시아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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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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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화파와 갑오개혁의 주도 세력은 일본을 독립과 개화의 지지자로 보았지만,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친일 개화파를 끝까지 지지하지 않았다. 또한 갑오개혁 때에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의 보호국화를 꾀하는 등 침략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삼국 간섭 이후 러시아와 명성 황후에게 밀린 일본과 친일 개화파는 명성 황후 시해라는 만행을 범하면서까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1896년(고종 33) 2월 아관파천으로 판세가 뒤집어졌다. 친일 개화파 김홍집(金弘集)과 어윤중(魚允中)은 무참히 살해되었고 유길준(兪吉濬)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인 고문관은 러시아인으로 교체되었고, 러시아어 학교와 한러은행이 설립되었으며,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같은 친러, 친미 성향의 정동파(貞洞波) 내각이 들어섰다. 이후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독립 협회의 활동으로 러시아 고문관이 물러나고 한러은행은 문을 닫았으며, 고종도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와 조선이 더 이상 중 국의 속국이 아닌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임을 세계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일본은 189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경합하였지만, 이 기간에도 광업권 확장, 새로운 개항장 개설, 금융 기관의 증치(增置) 등 경제적 이권을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때 대다수 친일 개화 세력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까지 일본을 러시아에 맞서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는 우호적 세력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그렇다면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 협회 운동 등 조선의 근대화 운동을 이끈 세력은 일본을 왜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옹호하는 지지 세력으로 생각하였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아시아 연대론과 황인종주의(黃人種主義)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 일본에서 아시아 경략은 기본적으로 연대와 침략의 이중주 속에서 전개되었다. 사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말엽에 이미 일본에서는 대외 팽창 또는 해외 웅비(海外雄飛)를 주장하는 아시아 침략론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양 제국, 특히 중국과 제휴하여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연대의 관념도 대두되고 있었다.367)박충석, 「일본 지식인의 대한관 1872∼1894」, 『청일 전쟁과 한일 관계-일본의 대한 정책 형성에 관한 연구-』, 일조각, 1985, 64∼75쪽 ; 박충석, 「근대 일본에 있어서 국가주의의 형성」, 박영재 외, 『19세기 일본의 근대화』,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96, 107∼110쪽 ; 하타다 다카시, 이기동 옮김,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1983, 17∼21쪽 ; 강창일,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과 대아시아주의』, 역사 비평사, 2002, 27∼40, 298∼317쪽. 아시아 연대론은 1880년부터 조선의 지식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그해 3월 10일 결성된 우익 단체 흥아회(興亞會)는 일본 거주 중국인과 일본을 방문한 조선 사절을 상대로 서양 제국, 특히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한 삼국 동맹론을 거론하면서 아시아 연대론을 매개로 뚜렷한 이유 없이 러시아를 두려워하는 공로증(恐露症, Russophobia)을 전파하려 하였다.368)山田昭次, 「自由民權期における興亞論と脫亞論—アジア主義の形成をめぐって」, 『朝鮮史硏究會論文集』 6, 朝鮮史硏究會, 1969, 43∼45쪽 ; 이광린, 「개화기 한국인의 아시아 연대론」, 『개화파와 개화사상 연구』, 일조각, 1989, 140∼141쪽.

1880년대 이후부터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1905년까지 친일 개화파는 거의 예외 없이 아시아 연대론에 의거하여 일본이 러시아와 같은 백인종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에 맞서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우호적인 외세라고 인식하였다. 이는 1882년 8월 임오군란 이후 일 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파견한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 천황에게 올린 “원하옵건대 이로부터 광대뼈와 잇몸이 서로 의지하듯 형세가 서로 공고하고, 크고 작은 일에 서로 도와서 두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만물을 길러 키우는 큰 은택(恩澤)을 함께 입고 비단옷(玉錦)을 입는 경사를 함께 누리도록 하소서.”라는 ‘송사(頌辭)’의 한 구절과,369)박영효(朴泳孝), 『사화기략(使和記略)』, 민족 문화 추진회, 『국역 해행 총재(國譯海行摠載)』 11, 민족 문화 추진회, 1977, 343쪽. 『독립신문』 1899년 11월 9일자, 『황성신문』 1910년 1월 9일자의 논설에 잘 나타난다.

진실로 원하건대 동포 되는 황인종의 모든 나라는 일본 형제의 분발한 기개와 떨쳐 일어난 경략을 본받아 독립국의 대등권을 회복들 할지어다. 오늘날의 일본은 곧 동양에 황인종의 앞으로 나아갈 움싹이며 안으로 정치와 법률을 바르게 할 거울이며, 바깥 도적을 물리칠 장성이다. 구미 각국과 조약을 고쳐 명하여 실시한 일본 사람들은 황인종 형제의 모든 나라를 권고하여 인도하되 작은 이익을 탐내지 말며 작은 분에 충격받지 말고, 한 가지 종자를 서로 보호할 큰 계책을 세워 동양의 커다란 판에 평화로움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여 주신 직분의 당연한 의무라 하노라.370)송재 문화 재단, 『독립신문 논설집』, 송재 문화 재단, 1970, 881∼892쪽.

일본은 한청 양국에 대하여 순치보거(脣齒輔車)의 형세를 공고케 하고, 문명의 증진과 이익 발전에 관하여 실심보익(實心輔翼)하고 실심애조(實心愛助)하여, 우리 동양 전국(全局)으로 영원한 평화와 무궁한 복리를 향유케 함이 만세장책(萬世長策)이오. 결코 야심적 수단으로 상호 간 감정을 야기하여 대국(大局)의 여하를 고념(顧念)치 아니함이 불가할지라.371)『황성신문』 1910년 1월 9일자, 시국에 대하여 맹성(猛省)함이 가(可)함.

개화기에 친일 성향의 지식인이 빠져들었던 아시아 연대론은 1900년대에 들어 황인종주의와 결합하여 일본을 서양의 침략에 맞서 조선의 독립을 지켜 주는 외세로 오인(誤認)하게 만들었다. 이를 신봉한 대표적 인물이 윤치호(尹致昊, 1865∼1945)였다. 그는 일본과 미국을 유학하며 경험한 황인 종에 대한 백인종의 ‘공격적 인종주의’에 분개한 나머지 약자인 황인종의 ‘방어적 인종주의’ 입장에서 백인종의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조선·청나라·일본 삼국의 황인종 제휴론을 개발, 형성해 나갔다.372)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265∼267쪽 참조. 특히 그는 1895년 삼국 간섭 이후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간섭이 눈에 띄게 심해지자, 이에 맞서 반(反)러시아 활동을 전개한 독립 협회의 중추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그는 연해주 거주 한인들이 러시아인들에게 노예처럼 학대받는 것에 분격해 “가장 비열한 일본인도 보드카를 마시는 정교도(正敎徒) 러시아인에 비하면 신사요, 학자일 것이다.”라고 하며 극단적인 증오심을 내뱉을 정도로 러시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373)국사 편찬 위원회, 『윤치호 일기』 5, 탐구당, 1971, 327쪽, 1902년 5월 7일. 그렇지만 일본인과 청나라 사람에 대해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는 인종, 종교, 문자의 동일성에 기초한 감정과 이해의 공통성이 있다. 일본, 청나라, 조선은 극동을 황인종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지키고, 그 보금자리를 자연의 뜻대로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공동의 목표와 공동의 정책과 공동의 이상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374)국사 편찬 위원회, 『윤치호 일기』 5, 탐구당, 327쪽, 1902년 5월 7일. 황인종주의의 입장에서 동류 의식과 연대 의식을 내비치고 있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황인종주의와 아시아 연대론의 입장에서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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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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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으로서 나는 일본의 잇따른 승리에 대하여 좋아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모든 승리는 조선 독립의 관(棺)에 못질이다. …… 그러나 황인종으로서 조선은-더 정확히 말해서 나는-일본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일본은 황인종의 명예를 옹호하였다.375)국사 편찬 위원회, 『윤치호 일기』 5, 탐구당, 112쪽, 1905년 6월 2일.

나는 일본이 러시아를 패배시킨 것이 기쁘다. 그 섬나라 사람들은 황인 종의 명예를 영광스럽게 옹호하였다. 백인은 오랫동안 대세를 잡아 수세기 동안 동양 인종을 솥 안에 가두었다. 일본이 단독으로 이 마력을 깬 것은 그 착상 자체가 당당한 것이다. …… 나는 황인종의 일원으로서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조선 사람으로서는 조선의 모든 것 독립까지도 앗아 가고 있는 일본을 증오한다.376)국사 편찬 위원회, 『윤치호 일기』 5, 탐구당, 143쪽, 1905년 9월 7일.

사실 윤치호는 1893년 말에 쓴 일기에서 “인종 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890년대에 이미 인종주의의 입장에서 일본에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377)국사 편찬 위원회, 『윤치호 일기』 5, 탐구당, 204쪽, 1893년 11월 1일. 그 이면에는 약육강식의 사회 진화론이 꿈틀거리고 있었다.378)허동현, 「1880년대 개화파 인사들의 사회 진화론 수용 양태 비교 연구-유길준과 윤치호를 중심으로-」, 『사총』 55, 역사학 연구회, 2002, 185∼188쪽 ; 최기영, 「한말 사회 진화론의 수용」, 『한국 근대 계몽사상 연구』, 일조각, 2003, 32쪽. 이준, 안중근도 러일 전쟁 전후 아시아 연대론의 입장에서 동양 평화론이나 동양주의를 표방한 바 있다. 윤치호가 사회 진화론의 세례를 받았음은 다음 일기에 잘 나타난다. “국가 간, 인종 간에 힘은 정의인가?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다. …… 우리는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보다 도덕과 종교와 정치에서 거의 항상 더 낫거나 덜 부패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에 대한 힘의 승리처럼 보이는 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불의에 대한 비교적 정의의 승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결국 다소의 예외는 있겠지만 정의는 인종 간에서도 힘이다.”(국사 편찬 위원회, 『윤치호 일기』 5, 탐구당, 418∼419쪽, 1892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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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 풍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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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을 인종 간의 경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은 “러일 전쟁도 19세기 이래 점차 빈번하고 격렬해진 경쟁의 결과로 발생하였고, 앞으로의 역사는 황인종, 백인종의 본능성(本能性) 전쟁으로 기록될 것이며, 지금 가장 급한 세계적 대문제도 인종 경쟁”이라고 한 일본 유학생의 글에도 잘 나타난다.379)포우생(抱宇生), 「경쟁의 근본」, 『태극학보(太極學報)』 22, 태극학회, 1908, 24∼28쪽.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 인종주의적 세계관은 일반화된 경향이었다. 김도형,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 연구』, 지식 산업사, 1994, 67∼68쪽 참조. 나아가 이러한 인종주의적 입장에서 일본을 독립의 옹호자로 보는 긍정정 일본 인식이 몇몇 지식인에 머문 것이 아니었음은 러일 전쟁 직후에 쓴 유원표(劉元杓)의 소설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의 한 대목에 여실히 드러난다.

지금 서세(西勢)가 동점(東漸)하여 황인과 백인이 자기 종족을 각자 아끼고 보호하여 자신들의 종족을 세우는 이때에 황종인 조선, 일본, 청나라 사람의 마음이 서로 갈라져 화목하지 않는다면 이는 골육상잔(骨肉相殘)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 일본, 청국 정부의 의중과 책략은 어떠한가요? 약간의 시기와 조그마한 이익은 생각지 말고 대세와 큰 이익을 각자 도모할 때가 지금입니다. …… 일본이 정말 한번 일어나 성적(聲蹟)과 물망(物望)이 동반구(東半球)에 가득 찬다면, 먼저 청나라, 조선, 안남(安南, 베트남), 미얀마, 태국 등 여러 나라가 같은 종족을 사랑하는 사회가 이루어져 일본을 사장(社長)으로 추천, 한 덩어리의 황종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동서를 경계 지어 황백이 나뉘어 서게 될 것입니다. 이때 구주(歐洲)의 백인이 혹 윤선(輪船), 대포와 기마 육군을 쉴 새 없이 투입한다고 해도 황인은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380)유원표,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광학서포, 1908, 84∼99쪽 ; 정환국, 「애국 계몽기 한문 소설에 나타난 대외 인식의 단상-몽견제갈량의 경우-」, 『민족 문학사 연구』 23, 민족 문학사 연구소, 2003, 208쪽 재인용.

이들 친일 개화 세력은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아시아 연대론과 황인종주의에 내재한 일본 우월주의와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특히 아시아 연대론에서 펼쳐진 인종주의는 일제 식민지에서 ‘대동아 공영(大東亞共榮)’을 표방하는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 타협주의, 민족 패배주의로 이어지며 일제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작용하였다.381)윤치호는 이성적으로는 영국과 미국의 힘과 문명에 찬사를 보내며 그들의 문명을 동경하였지만, 감성적으로는 그들의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 차별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인종주의적 논리야말로 그가 일제 통치에 순응, 협조하는 친일 활동을 합리화하는 구실로 작용하였다. 유영렬, 앞의 책, 152∼161, 223∼231쪽 ; 김상태, 「일제하 윤치호의 내면 세계 연구」, 『역사학보』 165, 역사학회, 2000, 128, 133∼135쪽 ; 허동현, 「개화기 윤치호의 해외 체험과 문화 수용」, 『한국 문화 연구』 11, 이화 여자 대학교 한국 문화 연구원, 2006, 123∼148쪽 참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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