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9권 조선이 본 일본
  • 제5장 개화기에 일본을 본 두 시선
  • 3. 긍정적 일본 인식
  • 오늘날 애증이 교차하는 우리의 일본 인식
허동현

개화기 전 기간에 걸쳐 일본은 조선에 대해 ‘개화와 독립의 옹호자’라는 가면을 쓴 ‘제국주의적 침략자’였다. 보수적 성향의 유교적 지식인과 농민층은 일본의 침략적 속성을 간파하였지만, 이들은 이미 생명을 다한 전통적 세계관에 안존(安存)하며 약육강식의 사회 진화론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의 변동에는 무지하였다. 반면 개화파는 세계사의 새로운 흐름에 일찍 눈떴지만, 사회 진화론과 인종주의를 매개로 한 아시아 연대론에 함몰된 나머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속성을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이렇듯 개화기 조선인이 일본의 실체에 대해 적확(的確)한 인식을 하지 못하였던 것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인종주의와 아시아 연대론의 주술에 걸린 윤치호 같은 친일 개화파는 근대 일본의 경험을 조선의 유용한 발전 모델로 인식하였다. 반면 1900년대 이후 기독교와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여긴 이승만, 서재필 같은 친미 개화파는 일본을 더 이상 이상적 모델이 아닌 비판적으로 수용하여야 할 ‘후진적 근대’로서 반면교사를 삼았다. 이처럼 개화기에 싹튼 근대 일본을 보는 상반된 시각은 크게 보아 광복 후 전개된 이승만, 장면(張勉) 같은 미국식 모델을 따르는 세력과 박정희(朴正熙)로 대표되는 일본식 모델 추종 세력의 모태(母胎)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교섭한 역사는 고대 국가가 형성될 무렵부터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다. 서세동점이 시작된 19세기 이전 동아시아에서 문화의 중심은 중국이었기에 문화의 강물은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흘렀으며, 당시 조선인은 고급 문화의 전수자로서 일본인과 일본 문화를 야만시하는 데 익숙하였다. 또한 조선인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왜구와 임진왜란 같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서 비롯된 적개심과 증오심 때문에 일본을 편안한 시각으로 보기 어려웠다. 근대 이후에는 조일 양국 간에 문화의 수급 관계가 역전되고 서세동점의 물결이 조선에 들이닥치면서 위정척사파, 동학 농민군 같은 보수파는 전통적인 화이사상에 따른 이적관을 고수하며 일본을 야만시하고 적대시하는 부정적 고정 관념을 온존시켰다. 하지만 세계의 흐름에 눈뜬 개화파는 앞서 근대화한 일본을 따라 배워야 할 이상적 모델이나 서구 세력의 침략을 막아 줄 독립의 옹호자로 보는 우호적 고정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침략자이자 따라 배워야 할 모델이라는, 개화기에 시동(始動)된 애증 상반적 갈등(love-hate conflict) 증세는 패전 이전의 침략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를 증오하면서도 일본형 발전 모델을 본뜬 바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본 인식에도 여전히 나타난다.

개화기 이래 조선인의 일본 인식에서 호오(好惡)와 긍부(肯否)가 엇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조선인이 일본을 보는 눈이 한 시대를 휩쓴 지배적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에 좌우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개화기 이전의 조선인은 중국 문화의 세례(洗禮)를 받았으면서도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중세 문화를 화이사상의 눈을 빌려 야만시하였다.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비서구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기독교화를 이루고 서구형 시민 사회를 도입해 과거사 청산에 나서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고대의 신도와 천황제를 유지하며 패전 이전의 침략을 미화하는 일본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것 같다. 반면 메이지 유신식 부국강병 모델과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가 입안(立案)한 각종 경제 개발 계획을 본떠 왔으며, 여전히 산업 기술과 자본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일본이 여전히 따라 배울 스승 또는 비판적으로 수용할 반면교사로 비치고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