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1장 세계에 비친 우리나라 고대의 이미지
  • 4. 황금의 나라와 유토피아, 신라
윤재운

아랍·페르시아 상인이 본격적으로 신라로 진출하는 8세기에서 9세기경 세계적 대도시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문화적으로 거의 ‘동시 패션 시대’가 열렸다. 여기서 말하는 ‘동시 패션 시대’란 콘스탄티노플에서 경주까지 전달되는 부가 가치 높은 교역품 수송 기간이 낙타를 이용한 육상 비단길(Silk Road)과 바닷길을 통해서 6개월이면 가능하였다는 뜻이다.

통일신라 이전까지는 주로 육상의 오아시스 실크 로드를 선호한 반면, 8세기부터는 중국 동남부 해안과 한반도 간의 직접적인 해상 교역이 더욱 활발해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8세기에 장보고의 해상 세력이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동북아시아 경제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와 아랍 상인 간의 교류는 주로 중국에서 간접 교역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보고 세력이 몰락하고 시장 질서에 교란이 일어나는 9세기 중반 이후에는 아랍 상인이 한반도로 직접 진출하는 일이 잦았다. 신라가 아랍 측 사료(史料)에 등장하고, 양자 간의 구체적인 교류의 흔적이 나타나는 시기와도 맞아떨어진다.

아랍 사료에도 5세기에서 6세기경 중국의 선박이 페르시아 만의 시라프 항까지 이르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6세기까지 중국과 아라비아 양국 간의 해상 교역은 중국 상인이 페르시아 만으로 직접 진출한 것보다 아랍 상인이 중국으로 진출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시사한다. 양국 간의 해상 교역은 7세기 이슬람 성립 이후 더욱 빈번해졌다. 따라서 많은 기록이 양국의 사료에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신라가 이슬람권의 기록에 남아 있게 된 것일까?

아바스 왕조(Abbasid dynasty, 750∼1258)가 주도하던 서아시아의 이슬람 세계는 9세기에서 12세기경에 학문과 문화의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흔히 이 시기를 ‘아랍의 르네상스’라고 일컫는데, 751년 탈라스 전투 이후 도입된 중국의 제지술에 크게 영향을 받아 학문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포로로 잡혀 온 약 2만 명의 중국 병사가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슬람권 전역에 분산되었다. 기술자를 선별, 우대하는 당시 아바스 왕조의 문화 정책에 따라 중국인 제지공은 특별 대우를 받으며 종이 생산에 전념하였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초기에 이집트에서 생산되던 파피루스를 사용하다가 아바스 왕조 시대부터 양피지에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 종이는 나무껍질, 아마포(亞麻布), 넝마, 대나무 등을 재료로 써서 질길 뿐 아니라 편편하고 값싸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종이는 751년에 이미 사마르칸트에 소개되었고, 그곳에서 ‘사마르칸트지’라는 일종의 면지(面紙)가 개발되었다. 794년 아바스 수도 바그다드에 대규모 제지 공장을 설립하자 종이는 순식간에 서아시아는 물론, 900년경에는 카이로와 페스 등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졌다. 12세기 이후에는 스페인의 발렌시아, 톨레도까지 확산되었다.

상대적으로 질 좋고 값싼 종이가 대량 생산되어 보급되자 이집트의 파피루스 산업은 쇠퇴하였고, 이슬람 세계는 새로운 문예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값싼 종이로 학자는 물론 일반 대중도 글을 배워 기록을 남기는 풍조가 학문과 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수백만 권 분량의 문헌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기록, 편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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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저우의 이슬람 묘역
양저우의 이슬람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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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슬람 상인은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하여 취안저우(泉州), 푸저우(福州), 항저우(杭州), 양저우(揚州)를 중심으로 하는 5대 국제도시에 대규모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때 신라인의 거주지를 ‘신라방’이라 불렀고, 아랍·페르시아인의 거주지는 ‘번방(蕃坊)’이라 불렀다. 무슬림은 ‘카디’라는 행정 책임자와 ‘세이크’라는 종교 지도자를 선출하여 이슬람 율법과 고유의 관습을 유지하였다.

교역권의 형성을 보면, 양저우를 기점으로 북쪽의 ‘중국-신라-일본’의 교역권은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해상 세력이 장악하였고, 남쪽의 ‘중국-인도차이나-아랍 제국’을 연결하는 남해 무역은 아랍·페르시아 상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두 해상 세력의 상권 경계는 중국 동남부 국제 항구인 양저우였다. 놀랍게도 양저우에는 드물게 아랍 상인의 자치 거주지인 번방과 신라인의 행정 자치 구역인 신라소가 이웃해 있었다. 아랍·페르시아계 무슬림과 신라인의 접촉과 교류는 중국에서의 정치, 외교, 문화의 통상적 교류와 중국 동남부에 거주하던 무슬림 상인이 한반도로 직접 진출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당나라로 가는 사절을 해마다 1회 이상 장안에 파견하였는데, 703년부터 738년까지 46회 이상의 대규모 신라 사절단이 당나라 조정의 각 종 행사에 참석하였다. 또한 651년부터 798년 사이에 장안에 당도한 아랍 사절단이 적어도 37회였다는 기록이 중국 사서에 남아 있다. 이 무렵 신라 사절단과 아랍 사절단의 접촉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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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묘의 신라 사신도
이현묘의 신라 사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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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기록보다 훨씬 앞서 이슬람 학자들의 저술에는 무슬림의 신라 진출과 신라의 위치, 자연환경, 산물 등에 관해 주목할 만한 기록이 보인다. 9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이슬람 역사학자, 지리학자, 여행가가 집필한 상당수의 아랍어 역사서와 지리서에서 신라에 관해 언급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hibah)는 신라에 거주하는 무슬림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이슬람 지리학자였으며, 알 마수디(al-Mas’udi)는 한반도에 이라크인이 진출, 거주하였다고 하였다. 신라의 무슬림에 대해 특징적이고 유의할 만할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앗 디마슈키(ad-Dimashqi), 알 누와이리(al-Nuwairi), 알 마크리지(al-Maqrizi) 등의 저서인데, 이들은 놀랍게도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750)의 박해를 피한 일부 알라위족이 한반도에 망명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아랍인의 신라 진출에 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정보는 846년에 편찬한 이븐 쿠르다지바의 『제 도로(諸道路) 및 제 왕국(諸王國) 안내서(案內書)』이다. 이로써 아랍인이 직접 신라로 진출하였다는 최초의 기록이 846년에 비로소 나타난다. 841년 장보고가 살해되면서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그의 해상 세력이 붕괴되는 시점인 846년에 아랍인이 신라로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동북아시아 무역을 완전 통제하고 있던 장보고의 해상 세력과 상권 분점 상태에서 간접 교역을 하는 아랍인이 힘의 공백 상태에 빠진 한반도 시장을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열흘의 항해 거리에 있던 신라로 직접 내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인의 기본 속성이었다. 이제 아랍인의 신라 진출에 관한 기록도 이때를 기점으로 빈번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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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계통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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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계통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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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계통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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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쿠르다지바의 저서에는 두 구절에 걸쳐 신라에 관해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칸수의 맞은편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영주국들로 갈라져 있다. 그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에 와서 영구 정착한 이슬람교도들은 그곳의 여러 가지 이점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나라(신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25)이븐 쿠르다지바, 『제 도로(諸道路) 및 제 왕국(諸王國) 안내서(案內書)』 : 김정위, 「중세 중동 문헌(中東文獻)에 비친 한국상(韓國像)」, 『한국사 연구』, 한국사 연구회, 1977, 16쪽 재인용.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교도가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26)김정위,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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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 금강경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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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카즈위니(al-Qazwini), 알 바쿠위(al-Bakuwi) 같은 학자는 신라의 쾌적한 자연환경에 대해 극찬하였으며, 심지어 이븐 사이드(Ibn Said), 아부 알 피다(Abu al-Fida’) 같은 학자는 신라를 동양의 유토피아로 묘사하였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매우 유쾌한 나라이다.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양이 비옥하여 병을 볼 수 없는 곳이다. 그 주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고 또 가장 건강하다. 만약에 그들이 집에 물을 뿌리면 호박의 향기가 난다고 말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도 그곳에는 드물고 또 파리와 날짐승도 거의 없다. 다른 섬의 어떤 환자가 신라에 오면 완치된다고 한다. 무하마드 빈 자카리야 알-라지(Muhammad bin Zakariya al-Razi)는 “누구나 이 섬에 들어가면 그 나라가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서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곳에는 이로운 점이 많고 금이 풍부하다. 하나님만이 그 진실을 안다.27)알 카즈위니, 『창조의 경이와 존재의 희귀성』, 『제국이 남긴 자취』 : 김정위, 앞의 글.

신라 : 『카눈서』에28)일반 규칙이나 법률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말한다. 따르면 신라는 동경 170° 북위 5°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제1지대 가운데에서도 남부에 있으며 중국의 동단에 있다. 신라는 중국의 동편 상단에 있다. 그것은 위치상 서해의 ‘영원과 행운의 섬’에 필적할 만한 동해의 도서이다. 전자는 후자와는 반대로 경작되었으며 유익한 물건으로 충만되어 있다.29)아부 알 피다, 『제국 안내 목록(諸國案內目錄)』 : 김정위,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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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이드리시 지도 부분
알 이드리시 지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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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아랍·페르시아 학자가 쓴 여러 책에서 신라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산수가 뛰어난 쾌적한 자연환경은 물론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교역품의 생산, 특히 양질의 금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환상 속에 많은 아랍인이 유토피아를 찾아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최적의 휴양지로, 남은 인생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적 망명처로 신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고 기록한다. 더욱이 신라의 금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알 이드리시(al-Idrisi)가 1154년에 편찬한 세계 지도에는 신라가 다섯 개의 큰 섬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지도는 우리나라를 표시한 세계 최초의 지도로 평가된다. 이드리시의 세계 지도를 포함하여 많은 자료에서 신라가 여러 개의 섬으로 묘사되어 있는 사실은 무슬림 상인이 육로가 아니라 중국 동남부 해안을 따라 해로로 한반도에 도착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신라로 출발하던 항구는 자치 거주지인 번방이 형성되어 신라인과 접촉이 잦던 항저우나 양저우였을 것이다.

이처럼 중국 남부 지역에서 이루어지던 신라와 이슬람 상인의 교류는 안사의 난을 계기로 변화가 생겼다. 즉, 755년에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安祿山)은 소그드인(Sogd人)의 피를 타고났지만 부족적 배경은 없었다. 하지만 안사의 난 전개 과정에서 소그드 사회도 영향을 받았다. 반란 초기 장안이 함락되자 하서(河西)와 농우(隴右) 지역의 투르크인과 소그드인이 돌궐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나 당나라와 위구르 연합군이 이를 진압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에 머물던 위구르인이 소그드인과 접촉하면서 이후 위구르 제국 내에서 소그드인의 영향력이 급증하였다. 하지만 8세기 후반 당나라는 교역의 부담 때문에 소그드 상인의 활동을 제한하였고,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을 놓고 위구르 내에서 정변이 발생하여 카파간 칸(Kapaghan Khaghan, 默蓊可 汗)을 지지하던 소그드 상인이 학살당하였다. 게다가 755년에 안사의 난이 발발하면서 소그드 사회에 밀어닥친 파문이 소그드인을 다시 한 번 각지로 분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신라와 발해 지역에도 파급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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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제시한 쿠르다지바의 전언에서 9세기 이슬람교도의 신라 정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바로 8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페르시아인, 소그드인을 중심으로 한 무슬림이 신라에 진출하여 일부는 그곳에 정착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9세기에 들어서면 신라의 민간 상인이 장보고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당나라-신라-일본의 교역을 독점하므로 9세기 전반에는 왕래의 빈도가 급속히 감소하였을 것이다. 이는 페르시아인, 소그드인 출신의 무슬림도 마찬가지이다.

양저우, 쑤저우, 항저우와 명주(明州, 지금의 닝보(寧波)), 타이저우(泰州) 지역은 신라인과 아라비아인의 거류지가 겹치거나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이들 간의 교역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처럼 재당 신라 교민 혹은 체류자가 이슬람 상인이 가져온 각지의 교역품을 중계하여 신라와 일본으로 공급하는 교역 구조 속에서 굳이 신라까지 직접 왕래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가 피살당하고 851년에 청해진이 폐지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기존의 신라 상인이 독점하다시피 하던 동아시아 해상 교역권에 일시적으로 공백 상태가 조성되었고 당나라, 발해, 일본 상인이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아라비아 상인도 이에 편승하여 신라로 진출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당나라 내지(內地)에서 자신의 교역품을 중 계해 줄 신라 상인의 활동이 쇠퇴한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었기 쉽다.

아울러 876년에 발발한 황소(黃巢)의 난도 무슬림의 직접적인 신라 진출에 영향을 미쳤다. 황소의 난의 최대 피해자는 중국 동남부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번방을 형성하여 교역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랍·페르시아계 상인 집단이었다. 변란의 와중에 살해된 사람만 적게는 12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을 헤아렸다.

이 사건으로 많은 이슬람인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전략적 선택을 하였다. 해안 도시를 떠나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 중국인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 무리도 있었다. 중국화된 무슬림은 ‘마(馬)’씨로 많이 개명하였다. 마호메드, 무하마드, 마흐무드, 마수드 등 아랍인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의 시작 부분에 ‘마’ 자가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한화(漢化)의 길을 택하였던 무리와 달리 바다라는 삶의 터전을 포기할 수 없었던 또 다른 무슬림 집단은 아예 중국을 떠나 인근 동료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등지로 이동해 갔다. 그리고 일부는 살기 좋고 그들이 동방의 유토피아라고 묘사하였던 신라라는 목표를 향해 떠났다. 이렇게 9세기 후반 아라비아인을 포함한 무슬림이 한반도로 재진출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5년조에 신라인과 형색, 의복이 다른 사람이 나타나 노래와 춤을 추었고, 신라인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으로 여겼다는 내용이 있다. 용모와 복식, 음악과 춤이 생소하여 영적인 존재로까지 일컬어졌다면 이들은 분명 신라인에게 낯선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9세기 후반은 앞서 추정하였듯이 아라비아인을 중심으로 한 무슬림이 신라로 진출한 때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헌강왕을 알현한 사실이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남은 것이라고 짐작된다.

『삼국유사』의 처용 설화(處容說話)도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은 당시의 이 같은 사실과 경험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처용 설화를 구성한 소재 가운데에는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고 여러 시기의 경험과 모티프, 은유가 구사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소재 가운데 구역(驅疫)의 영웅으로 설정된 ‘처용’이 신라 동쪽에서 출현한 것과 춤과 노래라는 소재가 9세기 후반의 실제 경험에서 차용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삼국사기』 헌강왕 5년조의 기록과 부합하므로 이때의 사실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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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성을 내포한 또 하나의 소재는 역신을 물리친 점이다. 9세기 후반에 도래한 무슬림 상인도 이역(異域)의 희귀한 약재를 공급함으로써 역병 구제에 기여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구역의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신라시대의 실제 관념과 경험을 활용하고 왕정 보좌, 간음, 관후한 인격 등 후대의 사실 혹은 허구를 덧붙여 처용 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상의 신라에 관한 이슬람권의 기록은 크게 지리적 위치, 즉 자연환경과 인문 지리 관련 내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된 내용은 첫째로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에 있으며, 둘째로 신라가 바다로 에워싸여 있다는 것이다.

인문 지리 관련 서술은 신라의 대당(對唐) 관계의 위상이 조공이나 주종 관계의 일변도(一邊倒)만은 아니었고, 상호성에 기초한 대등 관계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랍, 무슬림이 신라인의 의견과 소신을 직접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들과 접촉하고 내왕하였음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영문 국명 ‘Korea’는 고려시대 활발하게 왕래한 이슬람 상인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실마리는 이미 통일신라 이전부터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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