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1. 몽골인의 유목민적 고려관
  • 유목적 불신과 복속
  • 천명의 증언자와 믿지 못할 이방인
이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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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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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이러한 강한 의구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던 계기는 쿠빌라이(忽必烈, 1215∼1294)와 고려 세자의 만남이었다. 1258년(고종 45)에 대몽 강경론을 주도하던 최씨 정권의 몰락으로 강화론(講和論)이 힘을 얻자 고려는 태자 전(倎)을 몽골에 파견하여 투항의 뜻을 직접 전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고려 태자 일행을 만나기도 전에 당시 남송(南宋)의 정벌을 직접 진두지휘(陣頭指揮)하던 몽골의 황제 몽케(蒙哥, 헌종)가 7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사망으로 투항할 상대를 찾지 못하고 있던 고려 태자 일행은 12월 말경에 카이펑(開封) 부근에서 다음 황제 후보자 가운데 한 명이던 쿠빌라이를 극적으로 조우(遭遇)하였다.139)김호동, 『몽골 제국과 고려』, 서울 대학교 출판부, 2007, 84∼85쪽. 30년간 국왕의 친조(親朝, 고려 국왕이 직접 몽골 황제에게 조회함)와 출륙 환도(出陸還都, 강화도에서 나와 수도를 개경으로 옮김)의 요구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저항하였던 고려가 아직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자신에게 항복한 일에 감격한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萬里)나 되는 큰 나라요, 일찍이 당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 나 굴복시킬 수 없었는데 이제 그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와서 나를 따르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라고140)『고려사』 권25, 세가25, 원종 원년 3월 정해.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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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습래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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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두 사람의 극적 만남은 몽골 집권층의 고려관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141)김인호, 「원의 고려 인식과 고려인의 대응-법전과 문집 내용을 중심으로-」, 『한국 사상 사학』 21, 한국 사상사 학회, 2003. 계속 약속을 어기며 끊임없이 저항하던 고려가 황제의 교체라는 극적인 시기에 투항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인상을 ‘불신’의 대상에서 ‘천명(天命)의 증언자’로 전환하였던 셈이다. 더구나 이후 이어진 양국의 혼인과 고려의 일본 원정 동참은 몽골의 의구심을 크게 해소하는 또 다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142)김인호, 앞의 글, 130쪽. 따라서 이후 불신을 어느 정도 풀게 되어 고려를 일찍 귀부(歸附)한 의리 있는 나라로까지 여겼다. 아니 그렇게 기억하였다. 1276년(충렬왕 2)에 원나라 황제 생일 축하연에 참석한 고려 관리의 자리 배치를 논의하였을 때, 쿠빌라이는 “고려는 의리를 아는 나라요, 송나라는 반항하다가 힘이 모자라게 되어서야 항복한 나라이니 어찌 똑같이 취급할 수 있겠느냐.”며 송나라 관리를 모두 고려의 재상(宰相) 김방경(金方慶)의 아랫자리에 앉게 하였다.143)『고려사』 권104, 열전17, 김방경.

물론 이러한 극적인 항복도 몽골의 뿌리 깊은 의심을 모두 없앨 수는 없었다. 고려의 복속(服屬)이 어느 정도 기정사실(旣定事實)로 되자 몽골은 고려의 오랜 저항을 되새기며 고려를 압박하였다. 1270년(원종 11) 쿠빌라이는 고려 국왕에게 “네가 귀부한 것은 나중의 일이니 너의 자리는 다른 제왕(諸王)들보다 아래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 나의 태조 시대에 이드쿠트(亦都護, 위구르의 군주 호칭)는 먼저 와서 귀부하였기 때문에 제왕보다 위의 자리에 두고, 아르슬란(阿思蘭, 카를루크의 군주)은 나중에 귀부하였기 때문에 그 아랫자리에 둔 것이니, 그대는 마땅히 이를 알도록 하라.”고144)『원사(元史)』 권7, 본기(本紀)7, 세조 지원 7년 2월 을미. 말하며, 고려가 ‘뒤늦게 귀부한 사실’을 강조하였다.145)김호동, 앞의 책, 106쪽. 또한 1268년(원종 9)에 쿠빌라이는 “그대들이 우리 몽골인들 가운데서 나에게 반역하는 자가 있음을 들으면 곧 따라가서 그를 속여 선동한 것을 누가 모르는 줄 아느냐?”라며 호통을 쳤다. 이 말은 사실 몽골의 생트집만은 아니었다. 고려인 조이(趙彛)가 당시 쿠빌라이의 최대 정적인 아릭부케(阿里不哥)를 도와준 고려인이 있다고 참소(讒訴)하여 벌어진 사단이었는데,146)이정신, 「동녕부와 고려의 대원 관계」, 『고려시대의 정치 변동과 대외 정책』, 경인 문화사, 2004, 194쪽. 몽골인 입장에서 그것은 전부 고려의 애매하고 불분명한 행동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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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고려 궁터
강화도의 고려 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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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몽골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몽골은 항복하였던 고려가 다시 저항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복속을 확실히 보장받기 위하여 강화도의 방어 시설인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의 파괴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는 1259년(고종 46) 6월 11일부터 18일까지 강화도의 방어성을 철파(撤罷)하였다. 그러고도 무언가 미심 쩍었던지 몽골인은 강화성 안의 민가(民家)까지 재차 불태웠다.147)『고려사』 권26, 세가26, 원종 11년 8월 무인. 또한 고려가 출륙하겠다는 약속의 이행을 자꾸 미루자 당시 몽골 사신은 “그대의 국왕이 귀국할 때 황제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국하면 즉시 개경으로 수도를 옮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벌써 수개월이 지났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무심한가, 그대들의 머리는 몇 개씩 있는 셈인가? 나는 머리가 하나밖에 없으니 겁이 난다.”고 하며148)『고려사』 권25, 세가25, 원종 원년 6월 경신. 압박을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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