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1. 몽골인의 유목민적 고려관
  • 유목적 불신과 복속
  • ‘복속’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
이정란

몽골의 불신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은 원인은 몽골의 지나친 의심이나 고려의 애매한 행동 탓만은 아니었다. ‘복속’을 바라보는 양국의 시선 차이에서 비롯된 일면도 있었다.149)이명미, 「고려·원 왕실 통혼의 정치적 의미」, 『한국사론』 49,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2003. 사실 항복에 대한 양국의 입장 차이는 처음 대면하던 때부터 있었다. 1231년(고종 18) 제1차 여몽 전쟁 후 몽골은 고려의 예속(隷屬)을 기정사실화하고 다음 단계로 예정하고 있던 동진국의 재정벌에 고려군을 동원하고자 하였는데,150)윤용혁, 『고려 대몽 항쟁사 연구』, 일지사, 1991, 54쪽. 그때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는 일을 착수하고 있었다. 몽골은 피정복지의 백성을 자국의 군대에 편입하여 ‘하늘이 승인한 보편적인 유목 지배’를 실현하는 도구로 흔히 사용해 왔다. 따라서 고려인을 동진국 정벌에 동원하려 하였던 사실에서 우리는 당시 몽골인이 고려 땅을 정복지로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고려는 제1차 여몽 전쟁의 결과를 일시적 패배나 후퇴쯤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괴리는 쿠빌라이와의 만남 이후에도 여전하였다. 몽골인에게 고려 태자의 입조(入朝)는 완전한 복속을 의미하였으므로, 이제 고려가 복속국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할 것이라 여겼다. 즉, 몽골은 고려의 투항을 자국의 요구에 대한 고려의 일방적 수용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몽골은 피정복지에 대해 전통적으로 요구하였던 세량(歲糧)의 납부, 역참(驛站)의 설치, 군사적 지원, 인질의 파견, 호구 조사, 다루가치(達魯花赤) 주재 등 여섯 가지 사항 곧 육사(六事)의 신속한 처리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고려 가 핑계를 대며 그에 대한 이행을 계속 미루자 1260년(원종 1)에 쿠빌라이는 “지금 넓은 하늘 아래에 신복(臣服)하지 않은 자는 오직 그대 나라와 송나라뿐이다.”라고151)『고려사』 권25, 세가25, 원종 원년 4월 병오 ; 『고려사절요』 권18, 원종 원년 4월. 말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당시 고려는 복속을 중원 왕조와 맺어 왔던 전통적 조공-책봉 관계로의 편입(編入)으로 이해하였다.152)이명미, 앞의 글, 2003. 조공이라는 형식적 의무를 수행한다면 왕조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무리하게 육사 이행을 강요하는 몽골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육사가 복속에 따라오는 필연적 의무 사항이라고 이해하지 않았던 탓이다. 따라서 고려와 남송만이 복속하지 않았다는 쿠빌라이의 말에 고려 왕은 “한 해도 예빙(禮聘)을 거른 적이 없고 시키시는 일에 모두 복종하였습니다. 하물며 신이 몸소 입조하여 넘치는 은혜를 입었거늘, 어찌 저를 송나라에 비유하는지, 저는 지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라고153)『고려사』 권25, 세가25, 원종 원년 4월 병인. 답하였다.

확대보기
몽골의 패자
몽골의 패자
팝업창 닫기

복속을 바라보는 미묘한 입장 차이는 이후 100여 년간 양국이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고려에 대한 몽골의 불신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물론 고려 태자의 입조는 몽골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양국의 교섭 관계를 바꾸는 계기였으며, 나아가 몽골인의 고려관을 바꾸는 전환점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육사의 이행을 등한시하는 고려의 애매한 행동에 대해 쿠빌라이는 “나는 동방을 이미 평정하였으므로 장차 전당강(錢塘江, 중국 저장 성(浙江省) 북부 유역에서 항저우 만(杭州灣)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여기에서는 남송을 의미함)으로 무력을 돌리려 한 지도 벌써 거의 반년이 넘는다. 그런데 이때 너희 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부득이하게 맹약을 위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고154)『고려사』 권25, 세가25, 원종 원년 4월 병오. 말하며 자신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복속에 대한 견해차로 인해 벌어진 일련의 사태로 몽골은 고려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씻어 낼 수 없었다. 불신의 정도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 멸망할 때까지 몽골인은 고려인의 병장기 휴대를 금지하였다.155)『원사』 권39, 본기39, 순제 후지원 3년 4월 계유. 또한 고려에서 자국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우선 고려를 의심부터 하였다. 탈타아(脫朶兒)의 일화가 그러한 몽골인의 심리를 잘 보여 준다. 1271년(원종 12)에 고려 왕이 병을 치료하라고 약을 하사하자 몽골인 탈타아는 거절하면서 “저의 병은 어차피 회생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약을 먹고 죽는다면, 제가 고려에서 독살당하였다고 조정에 무고(誣告)하는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라고156)『고려사』 권27, 세가27, 원종 12년 7월 기미. 말하였다.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탈타아의 우려는 이후 고려의 정치에서 수없이 현실화되었다. 몽골의 대고려 정책은 기본적으로 불신의 정치였기 때문이다. 고려 내부 문제이건 자신들과 연결되는 문제이건 가리지 않고 몽골은 언제나 고려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그래서 고려 문제에 개입할 때는 어느 한편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잘하였든 잘못하였든 상관없이 언제나 대립하는 양측을 조정에 불러 대질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채택은 그것을 통해 고려 지배층의 분열을 격화시킴으로써 고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하였던 데 목적이 있기도 하였지만,157)장동익, 『고려 후기 외교사 연구』, 일조각, 1994, 119쪽. 한편으로 고려에 대한 끊임없는 불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