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1. 몽골인의 유목민적 고려관
  • 몽골인의 무관심과 고려 ‘문명론’
  • 정보 출처의 제한성
이정란

몽골인의 고려에 대한 이러한 무지는 사실 정보 출처의 제한성에서 비롯된 면이 많다. 몽골인은 고려에 대한 정보를 귀화한 거란인, 여진인, 고려인에게서 직접 전해 듣거나 서적을 통해 간접적으로 입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귀화한 주변의 유목인이나 투항한 고려인에게 전해 듣는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거란인이나 여진인이 고려에 대해 그리 수준 높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나라의 왕적(王寂)은 고려의 은자 대장경(銀字大藏經)을 열람한 후 쓴 글에서 고려 왕실의 세계를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하 『고려도경』)을 이용하여 고증하였다.163)왕적(王寂), 『요동행부지(遼東行部志)』 ; 장동익, 앞의 책, 1997, 343쪽. 고려를 고구려의 직접적인 계승국으로 잘못 기록한 『고려도경』을 참조하고서야 고려의 왕계를 알았다고 하였던 점으로 보아 고려에 대한 왕적의 정보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거란인이나 여진인은 직접적인 경로로 고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었다. 금나라가 몽골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고려는 상국이었던 금나라와도 외교를 사실상 중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에 투항한 고려인에게 직접 들은 정보 역시 제한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사천택의 측근에는 이백우(李伯祐)라는 고려 출신 투항인이 부장(副將)으로 보좌하고 있었다.164)장동익, 앞의 책, 1994, 201쪽. 그런데도 사천택은 막리지를 고려의 최고 관직으로 오인하였다. 고려인의 보좌를 받던 그조차 이처럼 고려에 대 한 기초 지식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교섭 초기 단계에서 대부분의 몽골인이 가졌을 고려에 대한 정보 수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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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 대장경
은자 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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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은 정보 부족을 서적 등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채우기도 어려웠던 듯하다. 직접 전해 듣는 것 이외에 고려에 대한 추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수단은 대개 서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려에 대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었을 중국인의 서적조차 질이나 내용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당시 고려에 대한 최신 정보를 수록한 것은 『고려도경』이나 『계림유사(鷄林類事)』였으므로 중국인뿐 아니라 거란, 여진, 몽골의 사람들 모두 고려에 대한 기초적 정보, 특히 고려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개 이 두 책을 참조하였다. 하지만 『고려도경』 등이 전하는 정보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이처럼 교섭 초기에 직간접적 경로로 수집한 정보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지만, 오랜 여몽 전쟁을 통한 직접적이며 지속적인 접촉은 고려에 대한 정보의 축적과 인식의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몽골은 전투에 필요한 정보에 상당히 예민하여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 애썼고, 때로는 그러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비교적 손쉬운 승리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제1차 여몽 전쟁 시기에 몽골은 두 갈래 길로 나누어 진격해 왔는데, 이 두 갈래 길은 거란족이 고려를 침략할 때 이용한 길이었 다.165)윤용혁, 앞의 책, 44쪽. 또한 “지난 겨울에 몽골인 400명이 북쪽 변경의 여러 성에 들어와 수안현까지 이르러 수달을 잡는다고 핑계 대고 모든 산천의 은벽처(隱僻處)를 살피지 아니함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그들과 평화를 맺었으므로 이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몽골이 재침함에 이르러 은벽처에 숨어 있던 백성들이 모두 노략을 당하여 탈출한 자가 적었다.”는166)『고려사』 권23, 세가23, 고종 34년 8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몽골은 1247년(고종 34)의 제4차 침략 직전에 정찰대까지 파견하는 정보전을 펼쳤던 것이다.167)윤용혁, 앞의 책, 89∼90쪽.

사실 고려에 대한 정보 수합(收合)은 교섭 초기 단계부터 이미 시작되었는데, 강동성 전역(戰役) 이후 몽골은 동진군(東眞軍) 40여 명을 잔류시켜 고려어를 학습하게 하였다.168)『고려사』 권22, 세가22, 고종 6년 2월 기미. 이처럼 몽골은 전투에서 고려에 대한 자신의 정보력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고려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하여 상당히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정보력에 이러한 편차가 있게 된 이면에는 고려를 바라보는 그들의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그들에게 고려는 정복하여야 할 대상에 불과하였으므로, 정보전에 필요한 정보는 민첩하게 수합하였지만 고려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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