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
  • 3. 명의 조공-책봉 체제 확립과 조선관
  • 중국적 조공-책봉 체제의 복원
  • 해금 정책과 중화사상의 ‘실체화’
이정란

이후 양국의 관계가 계속 우호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조선 창업 이듬해부터 명 태조는 다시 태도를 바꾸었다. 1387년(우왕 13)에 나하추를 평정하여 명나라가 요동 지역에 진출하게 됨으로써 명나라는 고려(조선)와 국경이 부분적으로 맞닿게 되었는데, 이때 조선이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자 양국의 관계는 다시 급격하게 냉각되었다. 다행히 이듬해 5월에 명 태조의 사망으로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그 뒤 찬탈(簒奪)을 통해 즉위한 영락제(永樂帝)에 대해 조선이 발 빠른 외교력을 동원함으로써 우호적 관계를 증진하였다.221)전순동, 「명 태조의 대고려·조선 정책에 대한 몇 가지 문제」, 『동아시아 역사 속의 중국과 한국』, 서해 문집, 2005, 63쪽.

그런데 양국 관계의 진전에 따라 명목뿐이었던 조공-책봉 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본래 조공이란 주변국이 중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는 의례로, 이는 군신 간의 종속을 의미하는 정치적 관계였다. 하지만 조공에는 회사(回賜)가 뒤따랐다. 즉, 중국은 공물을 바치는 조공국에 의례적으로 많은 하사품을 내려 주었다. 따라서 조공은 외교이면서도 사실상 무역의 성격을 띤 이중 체제였다.222)전순동, 앞의 글, 42쪽 그런데 명 태조는 건국 직후부터 해금 정책(海禁政策)을 실시하여 내국인의 대외 교역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는 조공국의 처지에서 보면 조공 무역만이 명나라의 문물과 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됨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웃 나라는 형식적인 종속 관계에 불과하지만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서라도 명나라가 요구하는 조공-책봉 체제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무역 이득을 얻으려면 그 체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것이 다양한 무역 창구를 마련하였던 당나라나 송나라의 조공-책봉 체제와 명나라의 체제를 구별하게 하는 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의 지속은 중국인의 외국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형식적이었던 조공-책봉 체제는 ‘중화와 이적’이라는 차별적 인식으로 중국인의 인식 내용을 실체화해 나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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