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4장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 조선인
  • 2. 표류한 서양인들이 이해한 조선
  • 하멜이 경험한 조선
김경란

하멜은 1668년(현종 9) 귀국한 후 약 13년에 걸친 조선 체류 경험을 담은 『하멜 표류기』를 출판하였다. 『하멜 표류기』는 ‘항해 일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255)1668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1653년 타이완으로의 스페르베르호의 불우한 항해에 관한 일지 : 스페르베르호가 제주도에서 좌초된 이유와 더불어 조선 왕조의 영토, 지방, 도시, 요새에 관한 특별한 묘사』라는 제목으로 하멜의 표류 기록이 처음 출판되었다. 하멜 일지의 명칭은 네덜란드에서도 여러 가지였는데, 하멜의 표류 기록을 『하멜 표류기』로 정착시킨 것은 국내 학자 이병도였다. 이병도는 하멜 일지의 불역판과 영역판을 번역하고, 이를 『하멜 표류기』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이후 하멜의 표류 기록은 『하멜 표류기』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고 있다.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기록한 것이 아니라 탈출한 후에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멜 표류기』는 ‘표류기(漂流記)’와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로 구성 되어 있다. ‘표류기’는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거쳐 다시 귀국할 때까지 일어난 일을 기록한 일지이다. 난파 경위, 조선에 표박한 이후 하멜 일행이 겪은 체험과 감상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하멜 일행이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생활하였는지를 비교적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왕국기’는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형법 제도, 종교, 교육, 교역 등 하멜이 조선에서 체류하면서 보고 들은 조선에 대한 각종 정보를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하멜의 조선에 대한 이해 정도와 인식이 어떠하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다음에서는 ‘표류기’와 ‘조선 왕국기’의 기록을 토대로 하멜과 동료 선원들이 경험하고 이해한 조선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자.

‘조선 왕국기’의 기록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조선국(Tiocen Cock)’이라는 한국식 발음의 국호(國號)가 처음 소개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고려(高麗)’의 음독(音讀)인 꼬레아(Korea) 또는 코레아(Corea)로 통용되었고, 조선에 대한 인식은 없었던 듯하다. ‘조선국’이라는 한국식 발음의 국호를 소개함으로써 고려 왕조와는 별개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처음 서양에 알린 셈이다.

하멜은 제주도에 표착한 3일 후에 북위 33° 32″에 위치한 켈파트(Quelpart) 섬에 표착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음을 기록하였다. 하멜 일행이 표착한 제주도 대정현의 실제 위치는 북위 33° 13″으로, 하멜은 표착 지점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를 켈파트 섬이라고 부른 것은 1642년경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갤리선 켈파트’가 제주도를 처음 발견한 이후 제주도를 켈파트로 지칭한 데서 비롯되었다.256)강준식, 앞의 책.

일본으로 가는 항해로 중간에 있는 제주도의 위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한 데 비해 하멜이 파악한 조선의 지리적 위치는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하멜은 조선의 지리적 위치가 “위도 34∼44°에 걸쳐 있으며, 동서의 폭은 75마일 정도의 우리가 즐기는 카드 모양의 직사각형”이며, “남북의 거리(서울과 제주도의 거리)는 약 80마일”이라고 기록하였다.257)하멜, 신복룡 옮김, 앞의 책, 54∼55쪽. 한반도의 실제 위치(34°6″∼43°1″)에 비교하면, 위도상으로는 북쪽으로 1° 정도 높게 측정되어 비교적 정확한 반면, 남북의 거리는 실제의 3분의 1로 파악하여 사실과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하멜이 조선에 표착하였던 17세기 중엽 유럽인은 조선이 반도인지 섬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였던 점을 고려해 보면, 조선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하멜의 이해는 상당히 진전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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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을 알현하는 하멜 일행
효종을 알현하는 하멜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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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은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조선 사회의 여러 모습을 관찰하고 경험할 기회를 가졌다. 이를 토대로 하멜은 조선의 통치 구조 및 사회 제도에 대해 기록하였다. 먼저 하멜은 조선의 국왕을 절대적 권위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였다. 하멜은 “비록 청나라 황제가 자신보다 높다고 인정할지라도 조선 국왕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왕은 주요 대신들과 중신들을 매일 소집하여 조례(朝禮)를 연다. 그러나 그들은 왕에게 어떠한 것도 강요할 수 없으며 조언을 하기 전에 왕이 하문(下問)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왕은 도처에 정보원들을 두고 있다. …… 왕에게 반역을 하면 당사자는 물 론 그의 모든 가족과 친지를 몰살시킨다.”라는 설명을 통해 조선의 국왕을 절대주의적 군주로 묘사하였다.258)하멜, 신복룡 옮김, 앞의 책, 53쪽

또한 국왕을 정점으로 이루어진 통치 구조에 대해서도 여러 방면에서 서술하였다. 군대의 종류 및 군사의 차출, 군역제(軍役制)의 운영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특히 통치를 위해 가혹한 형법 제도가 존재하였음을 서술하였다. 국왕에 대한 반역자의 처벌, 살인죄, 간통죄 등에 대한 가혹한 처벌 방법뿐 아니라 국가에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과 친척에게로의 전가(轉嫁) 등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였다.

하멜은 조선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최고 권력자인 왕으로부터 중앙의 관리 및 지방관, 전라도 향촌의 하층민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두루 접하였다. 한양으로 압송된 직후에는 왕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으며, 중앙 관료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또한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 처음 표착하였을 당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제주 목사 이원진을 비롯하여 이원진의 후임으로 부임한 제주 목사, 전라도로 이송된 이후에 만난 여러 명의 지방관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였다. 지방관이 하멜 일행을 어떻게 대우하였는지에 따라 그들의 생활이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지방관에 대한 서술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한편으로 전라도에 이송된 이후 하멜 일행은 향촌(鄕村)의 하층민과 두루 접하고 그들의 삶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멜은 조선인의 민족성에 대한 전반적 평가를 하였다. 그런데 조선인에 대한 하멜의 평가는 표면적으로 다소 부정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하멜의 기록을 보자.

조선 사람들은 매우 도둑질을 잘하며 속이거나 거짓말을 잘한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신뢰할 수가 없다. 동시에 조선 사람들은 너무 단순하고 쉽게 속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선 사람들은 유약한 민족이며 강직함이나 용기가 전혀 없다. 일본 제국이 조선 에서 행하는 약탈을 목격한 많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조선 사람들의 유약함은 벨테브레이가 청나라의 침략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조선 사람들은 겁이 많은 것을 그렇게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데,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호전적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259)하멜, 신복룡 옮김, 앞의 책, 58쪽.

‘도둑질을 잘하며 거짓말을 잘해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하멜의 평가는 조선에서의 힘든 표착 생활을 가늠하게 한다. 즉, 하멜은 동양의 낯선 나라에서 길고 힘든 표착 생활을 하고 전라도에 이송되어 조선의 하층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겪으며 조선 및 조선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네덜란드와 다른 문화적 환경은 조선인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인정이 많아 가난한 자들에게 동정을 아끼지 않고 외국인을 따뜻하게 대우”한다고 서술함으로써 조선인에 대한 호의적 시선을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표착 당시 제주 목사였던 이원진에 대해서는 ‘우리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異敎徒)가 우리를 대해 준 호의는 똑같은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우리에게 대해 준 것보다 더 친절하였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여 무한한 고마움을 표하기도 하였다.260)하멜, 신복룡 옮김, 앞의 책, 29쪽.

한편 하멜은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접하였던 조선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언급하였다. 특히 혼인, 상속 관행을 비롯한 가족 제도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였다. 하멜은 “부양할 수 있는 한 많은 여인을 거느렸지만, 집 안에는 조강지처(糟糠之妻)만 두어야 하였으며, 후처는 외부에 두어야 하였다.”라고 당시 조선 사회의 관행이었던 축첩제(蓄妾制)에 대해 언급하였다.261)하멜, 신복룡 옮김, 앞의 책, 57쪽. 하멜의 눈에 비친 조선 여인은 ‘사실상 노비와 비슷’하였으며, ‘조그만 잘못이나 사소한 구실로 내쫓김을 당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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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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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관행에 대한 하멜의 기록은 실제 조선 사회의 상속 제도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하멜은 “부모의 장례식이 끝나면 아들들이 유산을 나누어 가지는데, 특히 맏아들이 집과 집에 딸린 모든 것을 물려받아 차지하게 되고, 토지나 물건 등 다른 재산은 다른 아들들과 나누어 가진” 반면, 딸들은 “유산을 분배하라는 유언이 없으면 자신들의 옷가지만 가져갈 수 있었다.”라고 서술하였다.262)하멜, 신복룡 옮김, 앞의 책, 58쪽. 조선 전기까지 조선의 상속 관행은 아들딸에게 고루 재산을 분배하는 ‘남녀 균분 상속(男女均分相續)’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점차 아들, 특히 맏아들을 우대하고 딸을 상속에서 배제한 ‘적장자 우대 남녀 차등 상속(嫡長子優待男女差等相續)’으로 전환되었다.263)최재석, 「조선시대 상속제에 관한 연구」, 『역사학보』 53·54, 역사학회, 1972. 하멜이 조선에 머물렀던 17세기 후반은 이러한 변화가 뚜렷해지는 시기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속 관행에 대한 이해는 이방인의 단순한 관찰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멜 일행은 13년에 걸친 체류 기간 중 따로 격리되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대부분 조선인과 섞여 생활하였으며, 일 행 가운데 일부는 혼인하여 자녀까지 둘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의 혼인, 상속 관행 등 가족 제도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더 크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 밖에 청혼, 혼례식, 상례 등 가족 제도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세세한 절차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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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보고서』가 들어 있는 동인도 회사 공문서
『하멜 보고서』가 들어 있는 동인도 회사 공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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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의 기록에서 조선의 경제생활에 대한 그의 높은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기후에 따른 각 지역의 생산물을 소개하였으며, 특히 인삼, 은, 납, 호피(虎皮) 등의 특산물에 대해 기록하였다. 하멜 일행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일종의 표류 보고서인 하멜 일지에는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이나 교역 가능한 물품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멜은 조선의 교역 현황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우선 교역 대상으로 “조선의 무역은 대부분 일본과 조선 남동쪽 부산에 창고가 있는 쓰시마 섬(對馬島) 사람들”에 국한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당시 일본과의 무역은 동래부(東萊府)에 설치되어 있던 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하멜은 이것을 조선 무역의 전부로 인식한 듯하다. 중국과의 교역은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당시 조선과 중국의 무역은 조공 무역(朝貢貿易)이라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교역 방식이 중심을 이루던 시기였는데,264)조공(朝貢)이란 전근대 동아시아의 독특한 외교 형태로, 중국의 주변국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이에 대한 답례로 하사품을 보냈다. 중국 주변의 동아시아 국가는 조공과 회사(回賜)의 방식을 통해 물자 교류의 욕구를 충족하였다. 이방인인 하멜이 보기에 이것을 무역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과 일본 간의 교역 품목 역시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조선인의 구매 품목은 “후추, 나막신, 명반(明礬), 물소 뿔, 가죽과 우리 네덜란드 상인이 일본에 판매한 것”이다.265)하멜, 신복룡 옮김, 앞의 책, 59쪽. 일본과의 교역에서 조선인이 구매하는 주요 품목 가운데 네덜란드 상인이 일본에 판매한 물품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 대 목이 눈길을 끈다. 즉,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에게 구매한 물품을 다시 조선에 되팔고 있는 사실을 언급한 것은 조선에도 서양 물품에 대한 수요가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조선과의 직교역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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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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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멜은 조선이 외부와 단절된 매우 폐쇄적인 국가임을 지적하였다. 조선은 “전 세계에 12개의 왕국밖에 없으며”, “이들은 모두 중국 천자(天子)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에게 공물을 바쳐야 하는 나라들”로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옛 기록에는 8만 4000개의 나라가 있다고 쓰여 있지만, (조선인들은) 태양이 하루에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 비출 수 없다.”며 하멜 일행이 그 밖의 많은 나라에 대해 알려 주면 “(나라 이름이 아니라) 고을이나 마을의 이름일 것”이라고 반박한 것으로 서술하였다.266)강준식, 앞의 책, 294∼295쪽. 하멜은 조선인이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적은 것은 태국(泰國) 이상 멀리 나가 본 적이 없으며, 태국보다 더 멀리서 온 외국인과 교류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하멜 일행의 모국인 네덜란드에 대해서도 전혀 정보가 없음을 지적하면서 당시 조선인은 서양 세계를 모두 남만국으로 통칭하고 있었던 사실을 전해 주었다. 또한 남만국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서양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조선에서 인기 있던 담배가 남만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즉, 당시 조선에서는 담배의 인기가 매우 높 아서 네댓 살 난 어린아이도 피울 정도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담배의 인기가 남만국을 알게 된 이유라는 것이었다. 애당초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하였을 당시 제주 목사가 중앙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도 이들을 남만인으로 표기하였다.267)『효종실록』 권11, 효종 4년 8월 6일(무진) 참조. 그런데 조선 조정에서는 하멜 일행이 13년 동안이나 조선에 체류하였는데도 이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에 대한 구체적 정보 없이 남만인으로만 지칭하였다.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탈출한 후 일본에서 보내온 외교 문서를 보고서야 비로소 이들이 아란타(阿蘭陀), 즉 네덜란드인인 것을 알았다.268)『현종개수실록』 권16, 현종 8년 2월 26일(신미). 당시 조선 조정이 동아시아 이외의 외부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로 관심이 부족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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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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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하멜은 조선에 체류하였던 13년 동안의 경험과 관찰을 통해 얻은 조선에 대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의 내용은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고 정확하게 묘사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단편적이거나 잘못된 이해도 있다. 그러나 당시까지 조선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고, 조선이라는 존재를 거의 몰랐던 유럽인은 『하멜 표류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조선을 인식하였다. 즉, 『하멜 표류기』는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서양에서 조선을 이해하는 거의 유일한 지침서(指針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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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의 여러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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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의 여러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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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1653년 타이완으로의 스페르베르호의 불우한 항해에 관한 일지 : 스페르베르호가 제주도에서 좌초된 이유와 더불어 조선 왕조의 영토, 지방, 도시, 요새에 관한 특별한 묘사』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간된 후 하멜의 표류 기록은 미지의 나라 조선에 대한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여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에서 여러 판본이 경쟁적으로 출판되었다. 『하멜 표류기』는 이후 극동 아시아를 항해하는 서양의 선실에 비치되어 조선 근해 항해의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269)홍이섭, 앞의 글.

그러나 『하멜 표류기』가 열어 놓은 조선에 대한 관심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하멜의 보고서를 받아 본 암스테르담의 동인도 회사 최고 간부들은 바타비아에 있는 총독과 고문관에게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보냈다. 이에 대해 바타비아 상부에서는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에 설치한 무역관에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에 대해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바타비아 총독과 고문관은 이러한 지시를 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조선과의 교역이 별다른 실익이 없을 것으로 전제하였다. 먼저 “나라 자체가 무척 빈곤할 뿐 아니라 그들(조선인들)이 이방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배척심과 그로 인해 이방인들의 입국 허가를 극구 거부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조선과의 교역에서 별로 기대할 것이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언급한 나라(조선)에서 위세를 부리고 있는 종주국들”, 즉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모두 조선과의 교역에 네덜란드가 개입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조선에 적합한 무역항이 있는지 여부도 의문시하였다.270)Leonard Blussé, 「만남과 발견 : 극동 아시아에서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활동」, 『동방학지』 122, 연세 대학교 국학 연구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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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섬의 네덜란드 무역관
데지마 섬의 네덜란드 무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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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비아 상부의 지시에 대해 당시 데지마 무역 관장이었던 식스(Six) 역시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보고를 하였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최대한 비밀을 보장하여 섬나라 꼬레아의 정세와 현황을 파악해 보았으나, 그 나라는 농업과 어업에 의지하여 연명하고 있는 빈곤한 주민들로 형성되어 있고, 다른 한편 서방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환영하지 않기 때문에” 교역의 의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막강한 두 군주 타르타르(청나라)와 일본의 천황이 조선국에 외국인들이 왕래하는 것을 순순히 응낙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조선과 교역하기 어려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271)Leonard Blussé, 앞의 글.

이와 같이 중국과 일본이 유럽인과 새로운 접촉을 하고 교역을 하였던 17∼18세기에 조선은 여전히 서양과 별다른 접촉 없이 ‘폐관자수(閉關自 守)’하였다. 이는 유럽인의 관심이 주로 중국에 집중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조선이 일본 남부 지방과 달리 국제 항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점도 유럽인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272)김기혁, 앞의 글. 이러한 시기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간된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이로써 조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던 유럽인이 구체적으로 조선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결국 직접적인 교류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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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항도(長崎港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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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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