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4장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 조선인
  • 4. 탐사기에 나타난 조선의 모습
  • 이양선의 출현
김경란

『조선 왕조 실록』에서는 18세기 후반 이후 ‘이상한 모양의 배’에 관한 기사를 자주 볼 수 있다. ‘이상한 모양의 배’는 선체(船體)가 태산과 같았고 매우 빨라서 조선 배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배의 모양과는 확연히 다른 ‘이상한 모양의 배’, 즉 이양선(異樣船)은 서양인의 배를 가리키는 것이다. 17세기에도 이양선이 출몰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18세기 후반부터 조선 연해에 본격적으로 나타났고 19세기에 들어서는 더욱 빈번하게 출몰하였다.

조선 연해에 외국인의 배가 출몰한 것은 18세기 이전에도 빈번히 있었다. 조선 전기 이래로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황당선(荒唐船)’이라 불리는 배가 연해에 자주 출몰하여 문제시되었다. 황당선은 조선 연해에 들어와 불법 고기잡이를 하던 중국의 배를 주로 가리키는 것으로, 불법 고기잡이뿐만 아니라 밀무역에 관여하기도 하였다.283)『숙종실록』 권35, 숙종 27년 3월 29일(병진). 황당선의 잦은 출몰을 막기 위해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는284)『숙종실록』 권59, 숙종 43년 5월 10일(계해). 한편, 해방(海防)을 강화함으로써 황당선을 막고자 하였다.285)『정조실록』 권11, 정조 5년 4월 5일(무신).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황당선 이외에 이양선까지 조선 연해에 출몰하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황당선 문제 때문에 해안 방비를 강화하고자 하였던 조선 조정의 의지는 18세기 후반 이양선의 출몰로 인해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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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페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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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18세기 후반 이후 이양선으로 불리는 서양 선박이 자주 조선 연해에 출몰하였을까?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 이후 구미 열강의 극동에서의 활동 무대는 주로 중국과 일본이었지만, 조선도 서양인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18세기 말엽부터 조선의 문호를 두드렸다. 조선 연해에 처음으로 출몰한 구미 열강의 선박은 해군 대령 라 페루즈(La Pérouse)가 이끄는 두 척의 프랑스 군함이었다. 이 군함은 1787년(정조 11)에 제주도와 울릉도 해역을 조사, 측량하였다. 그 후 조선의 본토 연안에 출몰한 서양 선박은 영국 탐험선 프로비던스호(Providence號)로 1787년 원산 근해에 나타나 동해안을 탐사하였다. 이후에도 서양 선박의 조선 연해 출몰은 계속되었는데 대부분 영국이나 프랑스 선박이었다.286)조광, 앞의 글, 495∼496쪽.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양선의 출몰은 더욱 잦아졌다. 1848년에는 “여름·가을 이래로 이양선이 경상·전라·황해·강원·함경 다섯 도의 대양(大洋) 가운데에 출몰하는데,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혹 뭍에 내려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거의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라고287)『헌종실록』 권15, 헌종 14년 12월 29일(기사). 할 정도로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해졌다. 이양선의 출몰 지역도 처음에는 주로 서해안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19세기 중반에는 거의 모든 조선 해역에 출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양선의 국적도 초기에는 대부분 영국, 프랑스 선박이었던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러시아, 독일 선박까지 출몰하였다.

이양선이 조선 연해에 출몰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러시아, 독일 선박이 조선 연해를 항해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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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서해 탐사기』
『조선 서해 탐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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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선이 처음 출몰하기 시작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는 주로 조선 연해의 측량과 탐사가 주목적이었던 듯하다. 18세기 후반 조선 연해를 항해하였던 프랑스와 영국의 선박들, 즉 페루즈가 이끄는 두 척의 프랑스 군함은 제주도와 울릉도 해역에 대한 조사와 측량이 목적이었고, 영국 탐험선 프로비던스호 역시 원산 근해를 비롯한 조선의 동해안 탐사가 주목적이었던 듯하다. 뒤이어 19세기 전반에는 영국 해군 장교 바실 홀(Bssil Hall)이 이끄는 알세스트호(Alcest號)와 리라호(Lyra號)가 충청도 마량진(馬梁鎭) 주변의 서해 탐사를 위해 조선 연해를 항해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래잡이를 위해 조선 해안을 항해한 포경선(捕鯨船)도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88)『헌종실록』 권15, 헌종 14년 12월 29일(기사).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는 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 주변 해역의 탐사와 측량을 목적으로 서양 선박이 조선 연해를 항해하였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무렵으로 갈수록 점차 그 목적이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자료를 살펴보자.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공충도 관찰사(公忠道觀察使) 홍희근(洪羲瑾), 수사(水使) 이재형(李載亨)이 인차(鱗次)로 치계한 바에 따르면, 본년 6월 26일 유시(酉時)경에 이양선 한 척이 본주(本州) 고대도(古代島)의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는데,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서 역학(譯學) 오계순(吳繼淳)을 차송(差送)하고 본 지방관 홍주 목사(洪州牧師)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水軍虞侯) 김형수(金瑩綬)로 하여금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달려가서 합동으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언어가 통하지 않아 문자를 대신 사용하여 이곳에 오게 된 동기를 상세히 힐문(詰問)하였는바, 그들 대답에 ‘우리는 모두 영길리국(英吉利國, 영국) 난돈(蘭墩, 런던)의 흔도사단(忻都斯担) 땅에 사는 사람들로 선주(船主)는 호하미(胡夏米)인데, 서양포(西洋布)·기자포(碁子布)·대니(大呢)·우단초(羽緞溵)·유자(紐子)·도자(刀子)·전도(剪刀)·요도(腰刀)·납촉(蠟燭)·등대(燈臺)·등롱(燈籠)·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천리경(千里鏡) 등의 물품을 가지고 귀국의 소산물을 사려고 본년 2월 20일 배에 올라 본월 26일에 이곳에 왔으니, 귀국의 대왕에게 전계(轉啓)하여 우호를 맺어 교역하게 해 주기를 바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동선(同船)의 선원은 총 67명으로 4품(四品) 자작(子爵)이라고 칭하는 선주 호하미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로서…… 이 배는 왕래하면서 행상(行商)을 하는 배로서 풍랑을 만나 표착한 것과 다름이 있으므로 사세가 강박할 수 없어 상세히 검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289)『순조실록』 권32, 순조 32년 7월 21일(을축).

이 자료는 1832년(순조 32) 충청도 고대도 안항에 정박한 이양선에 대한 『조선 왕조 실록』의 기록이다. 이때 충청도 고대도에 정박한 이양선은 ‘영길리국’, 즉 영국 국적의 선박이었는데 주로 탐사와 측량이 목적이던 이전의 이양선과 달리 직접 교역을 원하는 상선이었다. 이 영국 선박은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Lord Amherst號)였던 것으로 보인다.290)조광, 앞의 글. 이들은 서양포, 기자포, 대니, 우단초, 유자, 도자, 전도, 요도, 납촉, 등대, 등롱, 유리기, 시진표, 천리경 등의 물품을 조선의 특산물과 교환하고자 하였다. 이제 조선 해역을 탐사하거나 측량하는 것에서 벗어나 직접 통상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사정을 청나라에 자문을 보내 보고하였다.

영국 상선의 통상 요구에 대한 조선의 답변은 자문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 있다.

개유(開諭)하기를 “번방(藩邦)의 사체(事體)로는 다른 나라와 사사로이 교린(交隣)할 수 없고, 더구나 우리나라는 자래(自來)로 전복(甸服)과 가까이 있어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아뢰고 알려야 하므로 임의로 할 수 없는데, 너희들이 상국(上國)의 근거할 만한 문빙(文憑)도 없이 지금까지 없었던 교역을 강청(强請)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니 요구에 응할 수 없다. 지방관이 어떻게 경사(京司)에 고할 것이며 경사에서는 또 어떻게 감히 위에 전달(轉達)할 것인가?” 하니, 저들이 개유하는 말을 듣지 않고 줄곧 간청하여 전후로 10여 일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본년 7월 17일 유시경에 조수(潮水)를 타고 서남쪽을 향하여 간 일 등으로 구계(具啓)하니, 이에 의거하여 조량(照諒)하기 바랍니다. …… 교역에 관한 한 조항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겠으나, 변경(邊境)의 정세에 관한 일인 만큼 의당 상세히 보고하여야 하겠기에 이렇게 이자(移咨)하는 바이니, 귀부(貴部)에서 자문 내의 사리(事理)를 조량(照諒)하여 전주(轉奏) 시행하기를 바라고 이에 자문을 보내는 바입니다.291)『순조실록』 권32, 순조 32년 7월 21일(을축).

이 자료를 통해 조선 측은 번방으로서 사사로이 교역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영국 상선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국 상선은 조선 측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고 10여 일을 실랑이하다가 조선을 떠났다. 이와 같이 탐사와 측량을 목적으로 조선에 왔던 초기의 서양 선박과 달리 19세기 중반 무렵으로 접어들면서 직접 통상을 요구하는 서양 선박이 늘어났다. 더욱이 러시아와 독일의 선박까지 가세하면서 이러한 통상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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