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0권 이방인이 본 우리
  • 제4장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 조선인
  • 4. 탐사기에 나타난 조선의 모습
  • 조선에 대한 탐사 기록
김경란

1794년(정조 18) 충청도 마량진(馬梁鎭)에 정박한 이양선은 ‘표류’ 때문에 이 지역에 밀려온 것으로 기록되었고,292)『정조실록』 권41, 정조 18년 11월 5일(기축). 이듬해인 1795년 황해도 오차진(吾叉鎭) 앞에 정박한 이양선 역시 ‘바람에 밀려’온 선박으로 기록되어 있다.293)『정조실록』 권43, 정조 19년 8월 1일(기묘). 그런데 이양선은 단순히 기상 악화로 우연히 조선에 표류한 것일까?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서양 선박이 조선 근해에 나타난 주 이유는 조선 해역에 대한 탐사와 측량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교역 대상지인 조선의 지리적 위치를 파악하고, 나아가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서양 선박의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당시 서양 선박의 출몰에 대한 조선 측 자료를 보면 모두 기상 악화로 인한 표류로 인식하였다. 19세기 전반에 조선 해역을 탐사하였던 영국 함대의 사례를 살펴보자.

『조선 왕조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1816년(순조 16)에 충청도 마량진에 정박한 이양선 두 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충청 수사 이재홍(李載弘)의 장계(狀啓)에 “마량진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延命)으로 보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 들일 수 없었습니다. ……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鑪臼)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 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0∼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나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습니다. ……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서전(書牋) 내용에, ‘영길리국 수사(水師) 관원(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금년 윤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에서 다섯 척의 배로 우리 영국 왕(英國王)이 차정(差定)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을 보내어 천진(天津) 북연하(北蓮河) 입구에 도착하여, 지금 왕의 사신 등이 모두 북경에 나아가 황제(萬歲爺)를 뵈었으나 천진 외양(外洋)의 수심이 얕은 데에다가 큰 바람까지 만나 배의 파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각 선척이 그곳에 감히 정박하지 못하고 지금 월동(粵東)에 돌아가서 왕의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귀국하려고 합니다. 이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으니, 해헌은 음식물을 사도록 해 주고 맑은 물을 가져다 마시고 쓰도록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294)『순조실록』 권19, 순조 16년 7월 19일(병인).

당시 충청 수사 이재홍은 중앙 조정에 충청도 마량진에 정박한 두 척의 이양선에 대한 장계를 올렸다. 장계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이양선이 기상 악화 등의 이유로 표류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이양선과 거기에 타고 있던 서양인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담겨 있었다. 짧은 머리 모양과 입고 있는 옷, 신발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묘사하였으며,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나는 새처럼 빨라서’ 조선의 배로 따라잡을 수 없다고 기록 하였다. 셋째, 이들은 영길리국, 즉 영국인으로 중국을 거쳐 귀국하는 중이었음을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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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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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충청 수사의 보고와 달리 이 선박은 단순한 표류 선박이 아니었다. 즉, 조선 서해안의 탐사와 측량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선박은 영국 해군 장교 맥스웰과 홀이 이끄는 알세스트호와 리라호였다. 이들은 유럽의 선박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서해안을 본격적으로 탐사 항해를 하였고, 그 결과물을 두 권의 책으로 간행하였다. 첫 번째 책은 1817년에 알세스트호의 선의(船醫)였던 맥레오드(John Mcleod)가 집필한 것이었고, 두 번째 책은 홀이 1818년에 간행하였다.295)이 책은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되었다(홀, 앞의 책). 이 글에서는 번역본을 토대로 바실 홀의 탐사 기록에 대해 서술하였다. 홀이 간행한 탐사기를 바탕으로 이들이 조선의 서해안에 온 목적과 조선에 대해 수집한 정보를 살펴보자.

홀은 탐사기 첫머리에서 “중국 주재 맥스웰 대사가 육로로 광둥(廣東)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중국에서 할 일이 없었으므로 이 선박들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거의 아무런 정확한 정보가 없었던 그 바다의 몇 곳을 조사해 보기로 하였다.”라고 서술함으로써 조선 서해안을 항해한 목적이 탐사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들이 단순 표류하였다고 본 조선 측의 인식과는 달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홀 일행의 주목적이 조선 서해안 탐사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탐사기에는 탐사하였던 지역에 대한 지리적 위치 및 특성이 비교적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정박하였던 지역은 마량진을 비롯하여 장항만, 고군산(古群山) 열도, 신안 해협, 제주도 등이었다. 마량진에 도착한 후 제주도까지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서해안을 두루 탐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홀은 도착하는 지역의 경도와 위도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오늘날과 비교하여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였다. 또한 항해로 주변 지형 및 지질 구조, 바닷길 의 특성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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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관리와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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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의 탐사기에서 주목되는 내용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조선의 관리 및 백성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홀은 조선 관리와의 접촉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홀 일행이 처음 정박한 마량진은 비인만(庇仁灣)에 위치한 곳으로 행정 구역상 비인현(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에 속해 있었다. 홀 일행의 배가 정박하자 조선의 관리가 그들의 배로 와서 일행과의 직접 대면이 이루어졌다. 홀 일행의 마량진 정박을 기록한 『조선 왕조 실록』의 내용과 대비(對比)해 보면, 이들이 접촉한 조선 관리는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이었음을 알 수 있다.296)『순조실록』 권19, 순조 16년 7월 19일 병인.

조선의 관리에 대해 홀은 매우 호의적으로 언급하였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하였는데도 비인 현감 이승렬은 정중하게 홀 일행을 대우하였다. 특히 이방인의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는 홀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 번에 걸친 비인 현감의 선상 방문 중에 홀 일행 은 비인 현감에게 브랜디와 럼주 등의 술을 대접하기도 하고, 나이프와 포크, 스푼 등 서양식 식기를 이용한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침이 준비되어 우리는 현감이 우리와 같이 식사하도록 권하였다. 그는 나이프, 포크, 스푼을 사용하여 앞에 놓인 것은 무엇이나 기꺼이 우리의 요리를 먹었다. 아마 그는 생애에 포크와 나이프를 처음 보았겠지만 어색하지 않게 잘 사용하였다. 그는 우리가 그에게 준 중국식 젓가락과 바꾸지 않았다. 사실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 풍습을 따르려고 하였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어서 중국식으로 그에게 차를 제공하자 좌우로 들여다보더니 우리의 것은 다르게 준비되는 것을 알자 그의 잔을 하인에게 들어 올려 그에게 주어진 우유와 설탕을 넣게 하였다. 현감이 다른 사람들의 낯선 습관에 자신을 적응하는 데 보여 준 예의 바름과 여유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으로 보아 그는 우리의 존재조차 몰랐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예의범절(禮儀凡節)은 그가 그 사회에서 높은 신분임을 보여 주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의 정도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다른 상황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것이었다. …… 나라마다 사회상이 달라도 예절의 형태는 같다.297)홀, 앞의 책, 40∼41쪽.

홀은 비인 현감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자신들의 식문화를 따르는 모습을 보며, 다른 문화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예의를 다하는 비인 현감의 모습은 조선의 문화 수준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감탄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하였던 모습이라는 매우 호의적인 평가를 하였다. 조선 관리에게서 받은 이러한 호의적 느낌은 탐사기에 기록된 다른 내용에도 유지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관리와 몇 차례 접촉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에게 서양식 진료를 해 주기도 하였고, 조선 관리에게 성경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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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방 관리 및 속원(屬員)
조선 지방 관리 및 속원(屬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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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은 탐사기의 상당 부분을 조선 주민에 대한 서술에 할애하였다. 처음 마량진에 정박하였을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느낀 첫인상은 매우 ‘비사교적’이라는 것이었다. 육지에 상륙한 홀 일행을 목격한 조선 백성들은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며 도망을 가거나, 홀 일행이 주는 선물을 완고히 거부하였다. 이방인을 경계하는 이러한 조선 백성들의 모습은 ‘험상궂고 야만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대부분 머리는 머리 꼭대기에 원추형으로 높이 묶었으나 몇 사람은 그냥 풀어 헤쳐서 야만스럽게 보였으며”, “턱수염과 구레나룻은 한 번도 깎은 적이 없었고, 부채와 기다란 담뱃대, 이상한 언어와 태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괴상한 분위기를 주고 있어”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서술하였다. 상투를 틀어 올리거나 봉두난발을 한 조선의 하층민에 대해 기괴한 느낌을 받았던 듯싶다.298)홀, 앞의 책, 23쪽.

그러나 조선 주민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과정에서 함께 담배를 나누어 피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경험을 하였고, 홀 일행과 조선 백성들 간에 친숙함의 표현이 오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홀 일행 가운데 한 명으로 홀보다 앞서 탐사기를 출간한 맥레오드는 “모든 조선인의 행동에는 인간적인 솔직함이 있었으며, 무례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성향은 없었다.”고 평하였다.299)박용규, 『한국 기독교회사』 1, 생명과 말씀사, 2004.

홀 일행은 조선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면서 여러 지역에 상륙하였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 마을들과 그곳에 사는 백성들의 생활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그 가운데에서 홀의 관심을 끈 것은 가옥이나 복식 등과 같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과 무속 신앙 등의 풍습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의 백성이 사는 가옥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관찰·기록하였는데, 돌과 진흙으로 지은 가옥의 형태 및 크기, 서까래로 이은 지붕의 모습, 베란다로 표현한 마루를 비롯하여 벼를 찧는 나무절구, 돌과 청동 제품인 식기류 등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기록하였음을 볼 수 있다.300)홀, 앞의 책, 49∼52쪽. 복식에 대해서도 주의 깊은 관찰력을 보였다. 현감을 비롯하여 일반 백성까지 거의 똑같은 형태의 옷을 입고 있으며, 갓으로 추정되는 ‘넓은 모자’, ‘무릎 위를 묶은 넓은 바지’, ‘코끝이 약간 올라간 무명천으로 만든 신발’이 공통된 복식이라고 기록하였다. 특히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소매가 없는 조악한 천으로 만든 도포와 허벅지를 덮는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차라리 속옷에 가까웠다.”고 서술하여 신분에 따른 복식의 차이를 언급하였다.301)홀, 앞의 책, 30∼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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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국 전도
조선 왕국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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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의 무속 신앙 역시 홀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탐사기에 일행이 상륙한 한 섬에서 백성들이 고목나무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목격담을 서술하였다. 그는 나무에 절을 하는 종교 행위를 주목하면서 그들이 상륙 한 섬에서는 중국과 달리 사원, 우상, 무덤과 같은 곳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면서 독특한 종교적 의식으로 평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인과 접촉하면서 들었던 조선어의 단어들을 영어와 대비하여 기록하기도 하였다.302)홀의 탐사기에는 ‘조선의 서해안 주민들에게 전해 들은 단어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No → Poodong(不同), Water → Bool(Mool/물), A pipe → Dewton(대통), Hair → Bodee(Merri/머리), Eyes → Doon(Noon/눈), Mouth → Jeep(Ip/입), Nose → Ko(코), Hand → So-an(손), Beard → Shee-om(수염), Tongue → Chay(Hyee/혀), Ear → Quee(귀), Teeth → Jee(Ee/이), Tree → Phang na moo(팽나무), Grass → Phee(피/稙), Good → Hota(Jota/좋다), Earth → K,Hool(Hurk/흙), Knife → Kuhl(칼), Jacket → Chouksa(적삼), Trowsers → Choongay(중의), Shoe → Po schien(버선), Stocking, or boots → Hung inn(행전), Tabacco → Samb-jee(쌈지), Rice(food) pouch → Pa-ap(밥), Fan → Pootsa(부채), Stove → Tok(독), White hat → Pan-a-ee(패랭이), Black hat → Kat(갓), A cock → Tac(닭).

홀 일행이 서해안을 탐사한 기간은 1816년 9월 1일부터 10일까지로 불과 열흘 정도였다. 그런데도 홀 일행은 탐사 지역에 대한 지리적 위치, 지형적 특성, 항해로, 조선인의 풍습 및 언어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고 정확한 기록을 남겼다. 이는 홀 일행이 기존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해안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탐사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16세기 이전 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은 우연한 기회에 조선에 표착하였던 하멜의 표류 기록, 조선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는 선교사들이 남긴 정보 수집 및 조선 해안을 탐사한 기록, 해도(海圖) 등을 통해 점차 유럽에 알려졌다. 서양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은 당시 유럽에서 작성되었던 지도를 통해서도 검증된다. 16세기 이전까지 조선은 유럽인이 만든 세계 지도에서 빠져 있거나 섬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까지 조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후반 이후 작성된 지도에서는 대부분 조선을 대륙과 연결된 반도로 표시한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이후 조선의 지리적 위치 및 특성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 결과 19세기 전반에는 조선의 지형이 오늘날의 지도에 가깝게 그려지기에 이르렀다.303)서정철, 『서양 고지도와 한국』, 대원사, 1991. 지도에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는 조선에 대한 서양인의 인식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며, 이는 17세기부터 19세기 전반에 조선을 방문하였거나 조선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한 결과로 간행된 기록들이 미친 영향이었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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