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1 서양과의 문화접변과 양풍의 수용
  • 06.양풍과 문화식민주의의 확대 재생산: 현대의 제 문제
주강현

양귀와 양물이 보편화되자 더 이상 양귀·양물 식의 부정적 표현과 감정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양귀·양물이 보편화된 시점은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된 시점과 일치하였으며, 보편화의 완결은 식민지배의 가속화와 더불어 보다 본격화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을 통하여 일본의 프리즘을 관통하여 받아들여진 ‘근대’라는 이름의 새로운 문명이 한반도에도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일관되게 교육시킨 문화 식민주의의 전형성들은 여러 부문에서 재창출되었다.

가령, 자국의 민족음악을 폐기하고 ‘양악’이 들어오고, ‘민족 미술’이 사라지고 ‘양화’가 들어오고 양담배와 양복, 양식, 양옥 식의 ‘양자(洋字) 돌림’이 선진 문명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나의 아주 단순한, 그러나 재미있는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조선의 도시에서는 대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였다. 수도시설이 보급되지 않은 조건에서 공동 우물이나 펌프 등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풍경은 아주 보편적이었다. 특히, 서울 같은 도심의 산동네에 위치한 집들은 물 사정이 좋지 않아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이 일상에 서 대단히 중요했으니 장안에는 물장사들이 많았다. 물장사들은 전통적으로 나무 물통을 썼다. 그런데 양철이 들어오자 가볍고 많이 들어가는 양철통으로 서서히 바뀐다. 나무통에서 양철통으로의 전환에는 양철(洋鐵)이라는 ‘양자(洋字)’ 돌림이 매개되어 있다. 미국 공사 알렌은 이렇게 양철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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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버린 석유 깡통으로 많은 양철 기구들이 만들어진다. 외국 여행자들은 미국에서 석유를 넣어 조선에 보내진 5갤런들이 깡통을 아시아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을 흥미있게 보고 있다. 깨끗한 나무 양쪽 끝에 깡통 2개씩 달아서 만든 물통은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물지게꾼들은 등지게에 멜빵을 하여 깡통을 매달아 사용한다. 깡통을 납작하게 하여 지붕으로 사용하고 있다. 깡통 양끝을 떼어내고 납땜으로 깡통과 깥옹을 연결하면 굴뚝이 된다. 창의력있는 중국집 요리사라면 깡통 내무부를 진흙으로 발라서 아래쪽에 불 때는 구멍을 만들어 그 구멍과 연결시킨 공기구멍을 만들어 내어 황량한 농촌에서 이 개량된 요리용 난로를 이용하여 만찬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램프, 촛대, 장난감, 장신구 등을 비롯한 모든 조리기구와 가내 용품들을 깡통으로 만든다.

‘모든 조리기구’를 깡통으로 만들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이상의 기록은 양철이 등장하여 보급되는 과정을 설명해 준다. 집의 지붕에서 물통, 가내 도구에 이르기까지 양철의 ‘양’이 넘치고 흐름을 알수 있다. 이제 ‘양자(洋字) 돌림’은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간다. 서양에 대한 경도는 외국인들 자신도 스스로 놀라울 정도였으니 여기에는 한국인들의 대단히 빠른 호기심도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것 에 관한 빠른 선택은 당시나 오늘이나 한국인들이 선택하던 답안이었다.

또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강압하였음에도 그들 자신도 정작 ‘백인(白人) 콤플렉스’에 의해 ‘미국풍’을 모방하는데 열정적이었던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페리 제독에 의하여 문을 열은 일본은 그 이후로는 사실상 백인에 의하여 문명사적으로 점령당한 정신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본의 양풍 경도는 심각할 정도였으니, 자신들의 탈아입국(脫亞立國)의 이론적 전개에서도 양풍은 필연적이었다. 일제시기에 우리가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양풍들도 거개가 일본 식민주의의 프리즘을 통해서 수용된 것이었다.

심지어는 당대 마르크시스트의 민족문화에 대한 입장조차 다분히 ‘선진적인 양풍’을 따르는 입장이었다. 세계 노동자 계급에 관한 원칙, 세계혁명에 관한 원칙 등의 입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민족 해방 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당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적 생활양식에 관한 부정에 가까운 태도는 ‘민족 해방 운동’이라는 당대의 원칙에서 볼 때 생각할 점이 많은 것이다. 가령, 풍물굿은 낡은 것이요, 풍금은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 구습은 무조건 낡은 것이고 신식은 좋은 것이라는 인식 따위에서 사회주의자들 역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전통은 구습 내지는 구악으로 인정되었으니, 이는 식민당국의 정치적인 입장도 가미된 것이었다. 가령 신정은 올바른 것으로 권장되나 구정은 구악의 대표격으로 지칭되어 내몰린 사례가 신구 대결의 양상을 웅변해 준다.

그리하여 의식주가 ‘우리옷, 우리음식, 우리집’으로 당연시되던 시기에는 ‘들어온 것들’은 독특하게 분류되어 ‘양식, 양옥, 양복’이란 ‘양(洋)’자 돌림의 ‘(洋風)’을 지니고 있었다. 양식(洋式), 양장(洋裝), 양복(洋服), 양초(洋醋), 양의(洋醫), 양귀(洋鬼), 양산(洋傘), 양서(洋書), 양주(洋酒), 양과(洋菓), 양선(洋船), 양악(洋樂), 양약(洋藥), 양(洋)춤 등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결에 전래의 것은 문화적 헤게모니 를 잃고 한 켠으로 밀려나서 오히려 ‘한식, 한옥, 한복’ 같은 ‘한(韓)’자 돌림을 지니게 되었다. 한식(韓式), 한복(韓服), 한과(韓菓), 한정식(韓定食), 한식(韓食), 한지(韓紙), 한의학(韓醫學), 한선(韓船) 등이 그런 예이다.

얼마 전까지 병원하면, 으레 ‘양의’를 말하였고, 의학하면 으레 ‘양의학’만 말하였다. 우리 의학은 시골 한약방 정도에서 명맥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는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의학 교육 제도의 결과다. 사실 한의학이라는 말도 양식 시리즈에서 도출된 명예롭지 못한 말이다. 음악이라고 하였을 때, 들어온 양음악이 보편적인 음악이 되고, 전래 음악은 국악, 혹은 민속음악으로 특수화되었다.46) 주강현, 『21세기 우리문화』, 한겨레신문사, 1999, p.243.

일상 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한식, 한옥, 한복 따위는 문화적 헤게모니가 역전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언어학적 사례이다. 이는 자국의 문화를 중심으로 놓던 생활풍습이 비주류문화로 밀려나고 양복, 양옥, 양식 따위가 주류 문화로 등장하면서 주객이 전도된 처지를 말해 준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 설정은 폭넓게 적용된다.

‘민속’이라는 말도 비슷한 발전 경로를 걷는다. 우리의 씨름은 어떤 경우에도 씨름이지만 이를 굳이 ‘민속씨름’이라고 붙인다. ‘민속씨름’이라는 말은 전통의 왜곡이다. 민속국, 민속밥, 민속떡, 민속활쏘기, 민속제기차기 식의 언표는 왜곡된 현상이다. 빈대떡을 ‘민속빈대떡’이라고 하지 않고, 김치를 ‘민속김치’라고 부르지는 않는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씨름·국·밥·떡·활쏘기·제기차기면 족할 터인데, 구태여 ‘민속’이란 접두어를 붙여 보편적 문화를 특수화시켰다.

사실 민속은 전통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속은 역사적 접근방식으로 전통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지극히 현재적이다. 조선시대의 마을공동체적인 명절이 있다면, 고속도로가 마비되는 귀향풍속도가 연출되는 20세기 후반의 명절도 있다.

사실 ‘개량’이라는 말도 조심해서 써야 한다. 개량은 ‘안 좋기 때 문에 고쳤다’는 뜻이 강하다. 따라서 ‘개량한복’ 등의 언술은 실상 가장 나쁜 말의 합성어다. 얼마나 나쁘길래 개량까지 하면서 ‘한복’이 되었는가. ‘개량한옥’이란 말도 다분히 우리살림집이 나쁘길래 뜯어고쳤다는 신념이 강한 말투다. ‘개량한식’이라는 말이 성립하는가. 일상복으로 늘상 입던 우리옷이 어느덧 명절이나 잔칫날 입는 예복으로 바뀌었다.

전통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늘 변화한다. 나쁘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양식에 따라 변화를 자초한다. 조선 후기에 널리 입었던 팔소매 넓은 옷이 거추장스럽게 되자 구한말에 두루마기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에는 정당한 생활양식이었는데 구한말의 생활양식이 변화를 요구한 결과다.

분야에 따라 명칭에서 우리 문화의 자주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양에는 없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 가령 김치, 고추장 따위는 그저 김치, 고추장일 뿐이다. 양김치, 양고추장이 필요없으니 한김치, 한고추장이 성립될 리 없다. 그러나 간장은 다르다. 조선간장과 왜간장으로 선명하게 갈린다. 대를 이어서 먹는다는 간장문화 특유의 자존심이 살아남아 조선간장이 되었다. 서양식 간장이 들어온 상태가 아니라 일본간장이 점령하였기에 간장만큼은 양간장이 아니라 왜간장이 되었다. 왜간장의 대응어는 아무래도 한간장보다는 조선간장이라는 명칭이 설득력있어 보인다.

일본된장이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의 불과 10여년 안팎의 일이므로, 된장에는 오로지 우리의 된장이 있을 뿐이지 굳이 조선된장이란 명칭은 쓰지 않는다. 만약에 일찍부터 일본된장이 들어와서 점령을 하였다면 왜된장이란 것도 존재하였을 것이고, 반대 개념으로 조선된장이란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들어온 것’과 ‘우리의 것’ 사이의 관계는 이처럼 대립과 융합을 거쳐왔다.

근현대 우리문화 100년사의 기점이 되는 개화기는 전래의 것과 들어온 것의 경계가 비교적 명백하였다. 박래품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강하였기에 들어온 것은 분명히 ‘양(洋)’이라는 명칭을 붙여 우리것과 구별지었다. 해방 이후 양풍이 강해지면서 들어온 것과 전래의 것과의 균형이 완벽하게 역전되어 한복, 한옥, 한식이 일반화된다. 우리집, 우리옷, 우리음식과 대비되던 양옥, 양복, 양식 구분이 사라지면서, 우리문화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잃어버린 것이다.

들어온 것이라고 하여 특별대우할 필요도 없고, 자존의 것이라고 하여 그것만을 내세울 필요도 없다. 우리문화의 비주류화가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문화의 자주성이 극도로 위축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의·식·주생활에서 비교적 전통성이 강한 영역은 식생활이다. 우리 음식이 식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양식, 일식, 중국식 따위의 각 음식문화가 우리의 생활영역에 들어와 있다. 이 땅에서 음식을 만들고 팔고 우리가 자주 먹는다고 하여 양식과 일식과 중식을 우리음식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음식 문화화에서는 건강문제 때문에라도 대다수 민중들이 우리음식에 천착하기 때문에 우리것의 보전력이 강한 편이나 여타 분야는 사정이 다르다.

문화체계에서 용어는 단순한 말 이상이다. 문명개화, 동도서기, 미개, 원시, 토종, 토박이 같은 말들도 대단히 역사적이고 정치적의 함의를 지닌다. 지난 백여 년간 쓰여진 이들 용례들은 양풍의 위력이 대단하였음을 뜻한다.

해방 이후, 특히 한국전쟁 이후에는 양풍이 미국에 의한 풍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규정되었으며, 이전처럼 일본의 프리즘을 통한 이입이 아니라 미국에서 직접적으로 도입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한국전쟁기를 거치면서 양춤과 양악이 유행하고, 심지어 매춘 여성의 경우에도 ‘양공주’같은 명칭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양(洋)’은 보편적 의미로서의 서양 일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뜻하는 명칭으로 축소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굴절성은 지금껏 교육·종교·예술 등 다양한 문화지배체제를 통하여 존속되고 있으며, 다만 21세기 들어오면서 차츰 극복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문화적 다양성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넓어지고 있으며 미국 일변도의 양풍에 관한 적절한 문화적 제어장치도 가동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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