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3 근대 스포츠와 여가의 탄생
  • 05. 개화기 축구의 모습들
  • 축구의 도입과 보급
심승구

서양의 축구를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도입하게 된 것은 근대식 교육 제도를 통해서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면서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를 비롯하여 영어, 법어(法語, 프랑스어), 아어(俄語, 러시아어), 일어 등 관립외국어학교가 설치되었다. 당시 정상적인 학과 이외에 신식 체육 훈련을 처음 시작한 것은 바로 한성영어학교(漢城英語學校)였다. 이 학교 교수로는 영국인 4명이 있었다. 교장격인 허치슨과 부교사 핼니팩스, 그리고 교련과 신식 체육 교사인 영국 사관(士官)과 운동 교사인 터너(Tenner)였다. 당시 학생들은 새로운 교육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상황이어서 체육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육상인 높이뛰기, 넓이뛰기보다 축구에 더욱 열중하였다.

1896년(고종 22) 한성영어학교는 최초의 운동회인 화류회(花柳會)를 개최하였다. 이 운동회는 우리나라 근대 체육의 디딤돌이 되는 사건이었다. 당시 펜조차 들어오지 않아 영어 알파벳을 쓸 때도 붓에 먹물을 묻혀 적을 정도였으니 축구 구경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허치슨이 멀리 중국 상하이에서 축구공을 주문하여 들여온 것이 우리나라에서 축구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인습에 젖은 양반 학생들은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결석을 자주하였지만 축구 경기만큼은 대단한 열성을 가지고 참여하였다고 한다.

1898년(고종 24) 3월부터는 영국 교사를 코치로 삼아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 3시에 훈련원, 장충단, 마동산(나중의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 동소문 밖 삼선평의 넓은 마당에서 축구, 높이뛰기, 넓이뛰기, 달리기, 씨름 등 신식 운동을 하였다. 특히, 축구는 영국 사병 12명과 더불어 연습하였다. 아직 다른 학교에서는 축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합은 늘 교내 학생끼리 승부를 겨룰 수밖에 없었으나 간혹 영국 해군들과 시합을 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한성영어학교에서 영국인 교사들이 축구를 가르친 것은 우리나라에 축구가 도입되는 토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사람이 서양의 축구를 학교에서 배운 사실은 축구의 씨앗이 이 땅에 뿌려진 소중한 일이었다. 실제로 축구가 우리나라에서 제자리를 잡은 것은 바로 한성영어학교에서 축구를 배운 학생들이 졸업한 다음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공, 축구가 한성영어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자 점차 다른 학교에서도 축구를 시작하였다.

1902년에는 배재학당에서도 축구반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학생들끼리 축구를 하다가, 1905년부터는 당시 법어학교 교사였던 마 르텔이 축구공을 가져와 축구를 본격적으로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축구를 체계적으로 가르친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축구의 시작이었다. 더구나 1905년 5월 동소문 밖 봉국사에서 마르텔의 지도를 받으며 처음으로 축구가 학교 운동회의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어 시행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축구 경기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우리나라에 축구가 도입되고 보급되는 과정은 이처럼 근대식 학교 교육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정규 과목이 아닌 과외 체육 활동의 하나로 도입된 축구는 영국, 프랑스 등 외국인 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널리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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