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4 ‘서양과학’의 도래와 ‘과학’의 등장
  • 01. 서양과학의 도래: 얼마나 새로운가?
  • 서양과학의 적극적 수용
문중양

전통 과학이 지닌 역할과 기능은 현대 사회에서의 과학과는 다르다. 그것은 바로 실용적인 과학지식이면서도 유가적 통치이념에 입각한 제왕학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이념적 지식이라는 양면성에서 비롯된다.167) 역법을 예로 들면, 왕이 역법을 통해 천체의 운행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음으로 하늘의 명을 받아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통 역법은 이념적 지식이다. 한편, ‘실용적’인 과학지식이라는 의미는 현대 과학이 지니는 실용성과는 물론 구분된다. 천체의 운행을 정확하게 계산해야 하는 가장 주요한 배경이 현대 사회에서와 달리 정치의 잘·잘못을 꾸짖는 하늘의 경고로 이해되던 일월식과 같은 현상을 예측해서 그에 정치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구태여 표현을 하자면 ‘정치적·이념적 실용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왕이 유학지식과 도덕성처럼 직접 갖추어야 할 것과는 달리 대리인인 천문역산가들이 역법지식을 담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에서 기능적 실용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래의 것에 비해 새로운 과학기술이 우수하다면 그것이 오랑캐의 것이라 하더라도 수용할 수 있었다. 오랑캐의 역법이라는 측면보다는 제왕으로서 천체의 운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7세기 당시에 중국의 전통과학보다 우수한 서양의 정밀과학이 유입되어 들어오면서 조선정부는 큰 마찰 없이 서양과학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서양과학의 산물은 1603년(선조 36)에 사신일행으로 북경에 다녀온 이광정과 권희가 바쳤던 「구라파국여지도(歐羅巴國輿地圖)」였다. 이것은 북경에서 정착해 막 활동하기 시작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가 1603년에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말하는데, 지구설에 입각해 한 개의 타원으로 전 세계를 그린 단원형(單圓刑) 서양식 세계지도였다. 그야말로 제작한 지 1년 만에 중국에서도 막 알려지기 시작한 세계지도가 조선의 궁궐에 전해진 것이다. 「곤여만국전도」 이외에도 중국에서 간행된 서구식 세계지도의 대부분은 간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조선에 전래되었다.168) 예컨대 <곤여만국전도>를 더 큰 판형의 목판으로 새긴 <兩儀玄覽圖>는 李應試에 의해서 1603년에 제작되었는데, 조선에는 黃中允이 1604년에 전래한 것(<곤여만국전도>)은 현존하지 않으나, 이 <양의현람도>는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가 1623년에 제작한 <萬國全圖>를 1631년 정두원이 북경에서 들여왔던 것 등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 간행된 서구식 세계지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金良善, 「明末淸初 耶蘇會 宣敎師들이 제작한 世界地圖와 그 韓國文化史上에 미친 影響」, 『崇大』 6, 1961 및 盧禎植, 『韓國의 古世界地圖』, 대구교육대학교, 1998를 참조할 것. 실로 이후 서양과학의 수용이 비교적 빨리,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 노력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단초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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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여만국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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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여만국전도 부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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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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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의 「지구전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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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해진 서구식 세계 지도는 조선정부와 사대부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169) 서구식 세계지도가 조선의 지식인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金良善, 앞의 논문 및 배우성, 『조선 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천』, 일지사, 1998, pp.376∼382를 참조할 것. 예컨대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에서 「곤여만국전도」를 처음보고, “그 지도가 매우 정교하고 서역 지역에 대한 정보가 매우 상세하다.”며 그것에 근거해 서역의 여러 나라들을 소개해 놓고 있다.170) 『芝峰類說』 권2, 地理部 外國, 34b-35a. 즉, 동아시아의 범위를 넘어서는 지역에 대한 자세하고 명확한 정보를 이수광은 「곤여만국전도」에서 만족스럽게 얻었던 것이다. 결국 서구식 세계 지도에 대한 조선에서의 관심은 한 세기가 지난 1708년(숙종 34)에 당시 관상감 책임자였던 최석정(1646∼1715)의 주관 하에 관상감에서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의 천문도인 <적도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와 합해 <건상곤여도(乾象坤輿圖)>라는 한 벌의 병풍으로 모사·제작해 바친 것으로 나타났다.171) 崔錫鼎, 『明谷集』 권8, 序引 「西洋乾象坤輿圖二屛總序」,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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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법천문도
신법천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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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식 세계지도와 마찬가지로 서구식 천문도도 비교적 빨리, 그리고 큰 충돌 없이 전래되었다. 1708년에 <건상곤여도>라는 이름으로 관상감에서 공식 복제품이 만들어진 아담 샬의 천문도 <적도남북총성도>는 북경에서 1623년에 간행되었는데, 정두원에 의해서 1631년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중국에서 간행된 또 하나의 대표적인 천문도 쾨글러(Ignatius Kögler, 戴進賢, 1680∼1746)의 <황도총성도(黃道總星圖)>는 1,812개의 별을 그려 넣었던 아담 샬의 천문도에 비해 3,083개나 되는 별을 그려 넣은 대성도(大星圖)로, 북경에서 1723년에 제작되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1742년에 영조의 명에 의해서 천문관 김태서와 안국빈이 관상감에서 쾨글러의 천문도를 저본으로 모사해서 제작해 바치고 있다.172) 아담 샬의 천문도가 현존하지 않는 데 비해 법주사에 소장되어 있는 신법천문도가 바로 영조대에 쾨글러의 천문도를 모사한 천문도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李龍範, 「法住寺 所藏의 新法天文圖說에 對하여」, 『歷史學報』 31, pp.1∼66 및 『歷史學報』 32, pp.59∼119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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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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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황도남북항성도
목판본 황도남북항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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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양식 천문도가 정부 차원에서 전래되고 제작되는 과정에 전통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 대한 관심과 제작도 아울러서 이루어졌다. 1687년(숙종 13)에는 태조 때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다시 대리석에 새겼다. 이때 저본으로 하였던 것은 태조 때의 원본이 마모가 심했기 때문에 가장 상태가 좋은 예전의 목판본이었다. 이 작업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며 숙종의 강한 의지로 추진되었을 것이다.

한편, 영조는 태조 때의 원본 각석이 경복궁에서 나 뒹군 채 방치되어 심하게 마모되어 가고 있던 것을 1770년(영조 46) 수습해 창덕궁 밖 관상감에 세 칸 규모의 흠경각(欽敬閣)을 건립하여 안치하였다. 이때 각 안쪽의 서쪽에는 태조대의 것을, 동쪽에는 숙종대의 것을 나란히 안치해서 서양식 신법천문도를 제작하였던 것과는 별개로 왕조의 권위를 세웠던 것이다.173) 『增補文獻備考』 象緯考 권3, pp.7∼8 참조할 것.

서양 역법의 도입은 무엇보다 중요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보다 많은 적극적인 노력이 기울여 졌다. 이미 1644년(인조 22)에 관상감 제조 김육(1580∼1658)은 시헌력(時憲曆)으로 개력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김육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즉, 수시력(授時曆)은 매우 정교하고 우수한 역법이다, 그러나 역원(1281)으로부터 365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작은 오차가 쌓여 역법의 상수들을 마땅히 고쳐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마침 보다 우수한 역법인 서양의 역법이 나타났으니 어느 때보다 좋은 개력의 기회이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1636∼1637년 사이에 개력을 해서 우리의 역서 와 반드시 차이가 날 것이다. 비교해서 새 역법이 맞으면 따라야 할 것이다.174) 김육의 주장에 대한 자세한 기록 내용은 『國朝曆象考』 권1, 曆法沿革, 2.b-3.a를 볼 것.

이러한 김육의 주장을 보면 아무리 우수한 역법이라도 오래되면 오차가 생기며, 보다 우수한 역법이 있으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라도 배워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육의 이와 같은 주장은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되었다. 1646년(인조 24)에는 아담 샬에게서 시헌력을 배우게 하려고 사신 일행에 역관을 동행해 파견하기도 했으나 당시 천주당의 출입금지 조치가 심해 아담 샬을 만나지도 못하고 단지 역서만을 구해와 역관 김상범으로 하여금 연구하도록 하였다. 1648년(인조 26)에는 봉림대군 귀국시의 호행사신이었던 한흥일(1587∼1651)이 아담 샬에게서 『개계도(改界圖)』, 『칠정비례력(七政曆比例)』 등의 책을 받아와 바쳤다.175) 盧大煥, 「조선 후기의 서학유입과 서기수용론」, 『震檀學報』 83, 1997, p.17. 특히, 1648년(인조 26)에는 조선의 역서와 청나라의 시헌력 사이에 윤달의 설정 등에서 예견한 바와 같이 차이가 나면서 개력의 논리에 힘이 실렸고,176) 『仁祖實錄』 권49, 인조 26년 윤3월 7일 임신. 그 차이점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일관 송인룡을 청나라에 파견해 시헌력의 계산법을 배워오도록 하였다.177) 『仁祖實錄』 권49, 인조 26년 9월 20일 신사. 1651년(효종 2)에는 김상범을 다시 청나라에 파견해 흠천감에서 시헌력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결국 1653년(효종 4)에는 시헌력에 의거해 역서를 편찬할 수 있게 되었다.178) 이때 시헌력을 도입하였지만 五星法은 아직도 몰랐다고 한다. 오성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은 50여 년이나 지나서 1708년(숙종 34) 역관 許遠이 흠천감에서 <時憲七政表>를 들여와 추보에 사용하면서부터였다. 시헌력 도입에 대한 자세한 사료기록은 『國朝曆象考』 권1, 曆法沿革, 3a-b를 볼 것.

이와 같이 조선정부에서는 약간의 반대세력을 극복하고179) 예컨대 시헌력 시행 이후에도 宋亨久 등이 시헌력을 폐지하고 대통력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顯宗改修實錄』 권2, 현종 1년 4월 3일 정해 ; 『顯宗實錄』 권4, 현종 2년 7월 13일 경인 ; 권13, 현종 7년 12월 10일 병진 ; 권22, 현종 10년 11월 9일 무술 등을 참조할 것. 청나라에서 새로이 제시된 우수한 서양 역법에 따라 비교적 빠르게 그것을 배워 개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8세기에 들어와 청나라에서 아담 샬의 역법을 보완해 개선한 새로운 역법들이 제시되면서도 계속되었다.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천문학에 근거한 매각성(梅瑴成)의 『역상고성 전편(曆象考成前篇)』이 1721년에 간행되자, 곧바로 1725년(영조 원년)부터 그것을 도입해 일월오성을 계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742년에 케플러(Johannes Kepler)의 타원궤도설과 카시니(Cassini)의 관측치와 관측법에 의거한 『역상고성 후편』이 쾨글러에 의해서 편찬되자, 1744년(영조 20)에 역관 안명열, 김정호, 이기흥 등으로 하여금 『역상고성 후편』 10책을, 그리고 황력재자관 김태서로 하여금 『청국신법역상고성 후편』 1질을 사다 바치게 하였고,180) 『增補文獻備考』 象緯考 권1, 9.b. 그 해에 바로 일전(日躔)·월리(月離)·교식(交食)을 그에 따라 계산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에서의 서양 역법에 따른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개력의 노력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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