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4 ‘서양과학’의 도래와 ‘과학’의 등장
  • 03. 근대의 계몽인가, 계몽된 근대인가?
  • 19세기 조선의 종두법과 한의학
문중양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종두법은 서양적인 것이며 한의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심지어는 대조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19세기 조선의 의학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종두법이 서양과학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한의학을 물리치고 새로운 ‘개 명’을 가져다 준 것처럼 각인된 것은 후대의 학자와 근대주의자들의 작업의 결과이다. 그들은 종두법과 한의학의 간극을 벌리는 데 열중하였지 둘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종두법과 한의학은 한 데서 발달해온 것이니 만큼 동일한 기원을 가진다. 미세한 양의 두(痘) 가루나 고름이 두창의 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은 중국에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던 사실이며, 중국의 의학자들이 그 내용을 더욱 연구한 바 있다. 이종인의 『시종통편』에서는 송대의 인종 때 사천 지방의 어떤 의사가 종두를 시행한 것을 최초의 공식적인 시술로 기록하고 있다.223) 이종인, 『시종통편』, 앞의 책, p.644.

조선에 수입된 종두법(인두법)은 명대의 의서인 『의종금감』·『난대궤범』·『종두신서』 등의 한의서에 담긴 내용이었다.224) 앞의 책, p.609. 종두법 이전의 한의학을 보면, 두창 병의 원인, 병의 예방법, 단계별 병증의 감별, 단계별 병증의 치료, 각종 후유증의 치료, 두창 앓을 때의 금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225) 허준의 『언해두창집요』나 『동의보감』의 두창 관련 부분(「소아편」)도 이러한 체제를 따른다. 종두법을 수용한 경우 부록으로 종두법이 추가되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인두법 저술인 『시종통편』은 시두(時痘)와 종두를 함께 다뤘다. 시두는 두창을 앓는 것을 뜻하는데, 이종인은 상세하게 두창을 치료하는 내용을 실었다. 자신의 경험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시두에 관한 다수의 내용은 이전 의서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종두에 관한 내용을 보면, 접종 방식과 함께 접종 후 환자의 상태에 많은 처방을 제시하였다. 진성 두(痘)를 그냥 이용하는 인두법은 독력이 매우 강해 환자가 보통 심한 앓이를 하였기 때문이다. 처방은 열을 내리거나 몸을 보하거나 아득한 정신을 되돌리는 것 등 한의학에서 익숙한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우두법은 서양에서 발전시킨 것은 수입하였기 때문에 인두법의 경우와 성격이 다소 달랐다. 소의 고름(백신)을 이용한다는 점, 외과 용 칼을 쓴다는 점, 훨씬 정량적인 기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기법상으로 보면 그다지 큰 차이가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차이는 그 유래지와 함께 동서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19세기 초 정약용이 『신증종두기법상실』에서 우두법을 최초로 소개하면서, 탄압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서양을 연상시키는 모든 부분을 삭제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우두법은 확실히 서양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 이 점은 개항 이후 우두법 지지자들이 서양의 대표적인 문물을 받아들여 실천한다고 대대적인 선전을 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우두법은 분명히 서양적인 것으로 위력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한의학의 보조를 필요로 하거나 개입을 초래할 의학적인 한계가 있었다. 우선 우두법은 병에 걸린 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제시하지 않았다. 우두는 어디까지나 병을 예방하는 정교한 기술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병을 완전히 예방해서 구태여 치료 수단을 쓸 필요가 없도록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상상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주변에 두창을 앓는 많은 환자가 있었다. 이들의 치료는 여전히 한의의 몫이었다. 인두법의 경우 시두(時痘)와 종두(種痘)를 한데 아우르는 시도가 있었지만, 우두법의 경우에는 그 둘이 섞이지 않았다. 우두시술자는 두창의 치료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한의들은 우두법을 자신의 의학 체계에 포섭하지 않았다. 둘 모두 두 의학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게 그어져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우두법은 우두 접종 후에 생기는 여러 잡증의 관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우두법의 효력이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 침묵하였다. 지석영을 비롯한 한의 출신의 우두시술자들은 이 빈틈을 기존의 지식과 경험으로 메웠다. 지석영의 『우두신설』(1885)과 이재하의 『제영신편』(1887), 김인제의 『우두신편』(1892) 에서는 공통적으로 우두접종 후 생길 수 있는 여러 잡증에 대해 한의학 처방을 제시하였다. 지석영이 주로 외과적 상황에 대해 약을 처방한 것과226) 『우두신설』 하, p.5 및 기창덕, 「지석영 선생의 생애」, 『송촌 지석영』, 의사학회, 1994, p.186. 달리, 이재하는 발열, 경기, 번민, 호흡곤란, 설사 등 내과적 증상에 대해서도 폭넓은 처방을 내렸다.227) 이재하, 『제영신편』, pp.771∼772. 김인제는 아예 각종 처방을 노래[用藥賦]로 지어 책 말미에 달았다.228) 김인제, 「용약부」, 『우두신편』, 1892. 이 책은 최근 한의학연구원의 안상우 선생이 발굴한 것으로, 18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우두의사로 활동했던 김인제가 쓴 것이다.

우두의 기전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고 한의학적 답을 내린 사람은 김인제이다. 그는 ‘왜 팔뚝에 접종을 해야 하는가?’, ‘왜 소[牛]만이 효과가 있는가?’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소가 효과가 있는 것에 대해서 “닭·개·소·말·6축을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두(痘)를 삼고 있지만, 특별히 소를 취하는 것은 소[牛]가 토(土)의 성질을 지녀 순하기 때문이다.”는 답변을 내렸다.229) 앞의 책, p.6. 그는 순하다는 것을 오행의 논리로부터 끌어냈다. ‘왜 팔뚝에 넣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오장육부의 경락변증으로 문제를 풀었다. 즉, “팔뚝이 양경혈(陽經穴)에 속하여 장부의 열을 주관하므로 이곳에 접종하면 양경혈맥을 따라서 장부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230) 안상우, 「세월 속에 묻혀진 우두보급의 역사」, 『민족의학』, 1999년 8월 30일자 및 앞의 책, pp.5∼6.

조선에서 종두법과 한의학이 완전히 관계를 청산한 문헌은 대한제국 학부에서 종두의양성소 교재로 편찬한 『종두신서』(1898)이다. 이 책은 이전의 책과 달리 서양의사 출신인 일본인 후루시로[古城梅溪]가 썼다. 1899년 의학교가 세워지고 본격적인 서양의학 전공자가 생기면서 이전의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종두법과 한의학을 결부시키지 않았다. 본격적인 서양 의학을 학습한 사람들이 우두법을 장악하게 되면서 ‘시대를 잘 읽은’ 한의들이 주도하였던 우두법의 시대는 저물었다. 20세기 들어 서양의학을 잘 하기 위해 한의학을 부정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움트기 시작하였다. 1930년 무렵에는 우두법의 위용을 한의학의 무력함에 대비시켰다. 지난 세기의 관계는 완전히 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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