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5 새로운 믿음의 발견과 근대 종교담론의 출현
  • 02. 근대 한국의 종교변동과 그리스도교의 위상
신광철

개항(開港)으로 상징되는 서구문명의 유입은 근대 한국사회의 제반 영역에 커다란 변동을 가져다주었다. 세계 질서의 재편과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에 직면한 한국사회는 문호 개방에 대한 해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항구의 열림, 즉 개항은 이러한 시대적 정황에서 일정 정도 강제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개항의 역사적 함의는 다만 정치·경제적 측면에 한정되지 않는다. 개항은 상이한 두 에피스테메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 사건이기도 하였다. 개항 국면을 읽어냄에 있어 중요한 사실이 서구적 세계관을 강제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의 문제이다.

한국사회는 개항 이후 확산된 서구의 충격의 문명적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과 근대의 갈등’이라는 선택적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한국사회는 서구 근대성을 수용하여 새로이 재편되는 국제질서 체제의 일원으로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 질서를 강화하여 기존의 사회 체제를 공고히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선택적 정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는 ‘서구 근대문명의 달성’을 지향 할 것인가의 문제와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보존’을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 사이의 선택이기도 하였다.

문명의 달성과 민족적 정체성의 유지라는 양대 시대적 과제에 직면해서, 한국사회와 사상계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서구-근대성’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개항기 한국사회는 서구 근대성 수용에 대해서 큰 흐름으로 볼 때, 거부형·선별적인 수용형·전면적인 수용형의 3가지 대응 양상을 나타냈다.

이와 같은 대응 양상은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개화당(開化黨)이라는 3가지 구체적인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동도서기론과 개화당은 각각 온건개화론과 급진개화론의 흐름을 취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3가지 사상적 흐름을 구별 짓는 중요 변수는 서양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에 대한 태도 여부였다. 종교가 정신문명의 핵심 요소로 간주되었다면, 과학기술은 물질문명의 핵심 요소로 여겨졌다.

척사위정론자들은 서양 문명의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 모두에 대하여 강력한 거부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서양 문명은 사학(邪學)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서양 문명의 정신적·영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 모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표적인 척사위정론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는 “인의를 막고 혹세무민하는 사설이 어느 시대라고 없었겠는가만은 서양처럼 참혹한 경우는 없었다(充塞仁義 惑世誣民之說 何代無之 亦未有如西洋之慘也).”(『華西雅言』 卷12, 洋禍)고 하여, 서양 문명을 최악의 이단(異端)으로 규정하였다. 이항로는 또한 서양 문명의 기본적인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서양의 학설은 비록 천만가지 실마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만 무부무군을 근본으로 삼고 통화통색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西洋之說 雖有千端萬緖 只是無父無君之主本 通化通色之方法).(『華西集』 卷15, 溪上隨錄 2).

확대보기
이항로 생가
이항로 생가
팝업창 닫기

이항로는 서양 학설의 성격을 ‘통화·통색(通化通色)’으로 규정하고 있는 바, 통화·통색은 “몰래 재화를 융통하고 남녀가 서로 통색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기강과 인륜의 어그러진 측면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결국 이항로는 서양 문명의 수용이 전통적 인륜과 국가 질서에 대한 파괴로 이어질 것을 강력하게 경고한 것이다. 이는 또한 서양 세력의 침략에 대한 경고의 뜻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이항로는 서양 침략세력의 배경으로 서양 종교를 지목하였으며,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기법음교(奇法淫巧)’, 즉 ‘기괴한 가르침’과 ‘교묘한 눈가림’으로 규정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척사위정론자들은 ‘정사론(正邪論)’, 즉 바른 것과 삿된 것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태도를 전제하면서, 서양종교와 서양과학 모두에 대한 수용 불가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하였던 것이다.

동도서기론은 개항 이후 형성된 새로운 국면에 대한 나름의 능동적 해법을 추구하는 방법의 하나로 구상된 논리였다. 동도서기론자들은 ‘도기론(道器論)’을 바탕으로 해서, 동양의 훌륭한 가르침[道]의 전통을 유지하되, 당대의 발달된 서양과학기술[器]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문명 발전의 기틀을 닦아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도기론은 “형이상(形而上)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形而下)를 ‘기(器)’라고 한다”는 『주역(周易)』의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이를 참고하자면, 동도서기론은 동양의 진리 체계[道]를 지키면서 서양의 과학기술[器]을 수용하려 한 사상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동도서기론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윤식(金允植)은 서양의 종교[道]는 그릇된 것이니 멀리 하고, 서양의 기술[器]은 도움이 되므로 본받아야 한다(其敎則邪 當如謠聲美色而遠之 其器則利 苟可以利用厚生)는 취지의 국왕 교서를 대찬(代撰)한 바 있다. “그 종교는 배척하되, 그 기술은 본받는다(斥其敎而效其器).”는 것이 동도서기론의 핵심적인 논리체계였던 것이다.

개화당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개화론자들은 한국의 근대화 및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달성하기 위해 서양 문명을 보다 적극적·전면적으로 수용해야함을 역설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기왕에 서양 문명을 수용할 바에는 서양 문명의 뿌리까지도 받아 들여서 전면적인 사회 개조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서양 문명의 뿌리는 다름 아닌 서양 종교, 즉 그리스도교였다.

대표적인 급진개화론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박영효(朴泳孝)는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민의 의지처와 같은 것으로서 종교가 성해야 나라가 성하는데, 당시에 이르러 유교와 불교는 모두 쇠퇴하였고 결국 그 때문에 나라도 쇠약해진 것으로 보았다.238) 『日本外交文書』 第21卷, 上訴文 第6條 敎民方德文藝以治本, “且宗敎者 人民之所依 而敎化之本也 故宗敎衰則國衰 宗敎盛則國盛 (中略) 然至今日 儒佛俱廢 國勢浸弱.” 박영효는 “우리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은 교육과 기독교이다.”고 말하기도 하였다.239) F. A. Mckenzie, The Tragedy of Korea,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reprinted in 1969, pp.54∼55. 이 말이 비록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자리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수용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발언이다. 박영효의 종교관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 자신 스스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그리스도교의 수용에 대한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는 점이다.240) 이광린, 「개화파의 개신교관」, 『한국개화사상연구』, 일조각, p.223. 박영효의 이러한 종교관은 당대 개화파 개신교관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근대 종교지형에서의 개신교의 위상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항 이후 한국사회의 문명론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양상에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한국사회의 개방의 정도와 맞물리게 되었다. 개방이 계속 진행되면서, 개항 후반기라고 할 수 있는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근대성의 수용을 당위적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이 주도하는 형국을 이루게 되었다. 근대 한국사회 사상계의 지형은 개항을 전후한 시점에서 논쟁을 제기한 척사위정론 주도의 흐름에서, 전통과 근대의 ‘중도(中道)’를 추구한 동도서기론으로, 그리고 개항 후반기인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서구 근대성 수용의 당위성을 주창한 문명개화론의 흐름이 주도하는 쪽으로 그 가닥이 잡혀 나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 과정에서 종교는 논쟁의 중요한 열쇠로서 작용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종교관 및 종교담론을 살펴보는 것은 당대의 사회상을 살펴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종교관 및 종교 담론에서 핵심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천주교와 개신교)이다. 이하에서는 3개의 사상적 흐름에서의 종교관 및 종교담론을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척사위정론자들은 서양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수용에 대한 전면적 부정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면 부정의 입장은 유교이념의 강화와 맞물린 것이었다. 유교이념의 강화를 지향한 척사위정론 계열은 서양의 ‘이(理)’ 혹은 ‘도(道)’ 뿐만 아니라 ‘기(器)’의 측면에 이르기까지 서구 근대성에 대한 전면 부정의 전략을 취하였던 것이다.

한편, 동도서기론자들은 서양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수용에 대해서는 일단 경계하면서도,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해서는 수용의 여지를 열어두는 전략을 취하였다. 이러한 동도서기론 계열의 전략은 서양의 ‘이’는 부정하면서도 서양의 ‘기’는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척사위정론자들과 동도서기론자들이 맥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양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수용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데 반하여, 급진개화론자들은 서양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수용에 대한 적극적인 담론을 구사하였다. 급진개화론자들의 그리스도교 수용론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서양의 이적(理的) 측면을 기적(器的) 측면의 뿌리로 인식한 부분이다. 급진개화론자들은 서양 물질문명 발달의 근원적 배경이 서양 정신문명의 우수성에 있으며, 그러한 정신문명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 다름 아닌 서양종교(그리스도교)라는 이해를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급진 개화론을 문명개화론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개화론의 이와 같은 인식은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를 문명의 기호(a sign of civilization)로 바라본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를 발달된 서양문명을 지시하는 신호등과 같은 것으로 인지하고, 그러한 신호등의 지시에 따라 서양종교와 문명 수용의 필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개항 이후 전개된 서구문명의 충격은 근대 한국 종교지형의 성격 구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근대 한국의 종교지형 변동은 앞에서 서술한 한국 사회 및 사상계의 지각변동과 맥락을 같이 한다. 척사위정론 계열에서 중요한 지표가 된 것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박 및 유교이념의 강화였다. 이러한 지표는 유교의 근본사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흐름을 ‘유교 근본주의의 대두’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확대보기
배론성지(충북 제천)
배론성지(충북 제천)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배론성지 가마(복원)
배론성지 가마(복원)
팝업창 닫기

한편, 급진개화론 계열에서는 서양문명의 뿌리인 서양 종교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급진개화론자들이 서양문명의 뿌리로서 구체적으로 지적한 종교는 다름 아닌 개신교였다. 그리스도교 선발 세력이었던 천주교는 전통사회와의 충돌 과정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한국 선교를 후원한 프랑스의 문명적 영향이 그다지 지대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개신교는 선교 초기부터 비교적 조심스러운 선교 전략을 구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한국 선교를 후원한 미국의 문명적 영향은 점점 강화되어 갔다. 이러한 차이는 한국 사회가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신교로부터 문명의 기호의 징후를 읽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신교가 문명의 기호로 대두된 것은 개신교의 폭발적인 초기 성장의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를 이루었다.

개신교는 초기 선교 과정에서 직접 선교를 자제하는 대신에, 교육선교·의료선교 등과 같은 간접 선교 전략을 취하였다. 이러한 간접 선교 전략은 한국 개신교 특유의 ‘문명선교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개신교의 문명선교는 개신교의 사회적 평판을 제고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가 초기 선교 과정에서 스스로의 위상을 설정해 나가는 즈음에, 천주교 또한 지하교회(게토)의 단계를 탈피하여 지상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한편, 신앙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확보해 나가게 되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흐름을 ‘그리스도교의 활성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동도서기론의 흐름은 유교 근본주의와 개신교 수용론의 중간적 입장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 한국사회와 사상계의 변동 과정에서 제기된 유교 근본주의의 대두와 그리스도교의 활성화라는 두 가지 양상 이외에, 근대 한국의 종교지형을 특징지어 줄 또 다른 흐름이 바로 동학(東學)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민족 종교운동의 흥기’이다.

동학은 서구 근대와 전통의 충돌이라는 문명적 정황 속에서 서구적 세계관의 도전에 대한 주체적인 응전을 시도한 운동이었다. 동학은 서학과의 차별성을 부르짖으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동학이 주창한 주체성이 서구와의 만남을 통해서 확보된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은 다른 민족종교운동에서도 공히 발견되는 것이다. 동학을 위시한 민족종교운동은 동양의 진리 체계를 고수하는 위에서 서구적 세계관을 활용하려는 지향성을 지닌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동학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종교운동의 흥기는 근대 한국종교사의 도도한 물줄기에 동도서기론적 사유의 파고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척사위정사상으로 대표되는 유교 근본주의의 대두, 천주교의 지상화(地上化) 및 개신교의 신속한 자리 매김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의 활성화, 동학 등 민족종교운동의 흥기 등은 근대 한국의 종교지형 변동의 주요한 양상들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양상들이 당시 한국 사회의 서양 문명관의 흐름과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확대보기
최제우 동상
최제우 동상
팝업창 닫기

유교 근본주의의 대두, 그리스도교의 활성화, 동학 등 민족 종교 운동의 대두 등이 근대 한국종교 지형 변동의 주요한 양상이라면, 그러한 종교지형 변동에 구조적으로 작용하였던 종교사적인 맥락(context)은 ‘종교들의 공존’에 대한 필요성의 제고와 ‘종교영역과 사회(정치)영역의 분리’ 현상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에 대한 압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지표(index)는 우리가 오늘날 ‘종교 다원 현상’과 ‘종교의 세속화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상당 부분 겹쳐지는 것이다. 이는 근대 이후 종교적 인간(Homo Religious)이 처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한국 사회의 이와 같은 종교지형 변동의 양상과 구조에 대해서는 당대에 이미 그에 대한 담론 구축이 시도된 바 있다. 이는 당대에 이미 근대적 의미의 종교 담론이 이미 형성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대의 지성 가운데에는 개항기 어간의 문명 전환에 대한 이론적 성찰을 시도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한 관심은 종교의 맥락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 이능화와 최병헌은 종교라는 채널을 통해서 근대 한국 사회의 변동을 읽어내고자 한 대표적 지성이었다. 이하에서는 이들의 지성적 성찰의 배경과 내용, 그리고 거기에 담겨진 의미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