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5 새로운 믿음의 발견과 근대 종교담론의 출현
  • 04. 새로운 믿음체계에 대한 담론의 제시
  • 최병헌의 만종일련론(萬宗一臠論)
신광철

최병헌은 개항 이후 종교지형 변동에 대한 지성적 성찰을 시도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최병헌은 일련의 비교종교론적 실험을 통해서 동양의 고전종교 전통과 그리스도교 전통과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최병헌은 「삼인문답」, 「셩산유람긔(聖山遊覽記)」, 『예수텬쥬량교변론(耶蘇天主兩敎辯論)』, 「교고략(四敎考略)」, 『셩산명경(聖山明鏡)』, 「종교변증설(宗敎辨證說)」, 『만종일련(萬宗一臠)』 등에 이르는 일련의 비교종교론적 기독교 변증론을 통해서 동양의 종교문화 전통의 흐름과 그리스도교를 합류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병헌의 이와 같은 일련의 비교종교론적 기독교변증론에는 만종일련사상(萬宗一臠思想)이 일관되게 반영되었다. 최병헌의 비교종교론적 기독교변증론은 다양한 철학적·종교적 숲 속에서 한 덩어리의 고기[一臠], 즉 하나의 진리의 단편을 통해서 만종(萬宗)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가설에 근거한 것이었다. 한 숟갈의 국물이 나 한 덩이의 고기를 맛봄으로써 한 솥 가득한 국의 맛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진리의 단편으로 만종의 세계에 담긴 신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256) 이덕주, 「초기 한국기독교인들의 신앙양태 연구」,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p.115. 최병헌의 만종일련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한 덩이 고기를 맛보면, 솥 전체에 담긴 국의 맛을 알 수 있다(以一臠 知全鼎味也).”라는 표현은 본래 『회남자(淮湳子)』 설산훈(說山訓)에 나오는 말이다. 만종일련 사상으로 종교사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일찍이 일연(一然)에 의해서 이루어진 바 있었다. 일연은 의상(義湘)의 불교사상을 평가하면서, 의상이 원효(元曉)에 비해서 매우 간결하고 핵심적인 저술을 남긴 점에 대해서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과 약소(略疏)를 지어 일승(一乘)의 요긴함과 중요함을 포괄했으니, 천년의 본보기가 될 만하므로 여러 사람이 다투어 소중히 지녔다. 그밖에는 지은 것이 없으나 솥 안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덩어리 고기만 맛보아도 되는 것이다.”라고 논평한 바 있었다.257) 『三國遺事』 卷4, 第5 義解, 義湘傳敎條, “又著法界圖書印並略疏 括盡一乘樞要千載龜鏡 競所珍佩 餘無撰述 嘗鼎味一臠足矣.”

최병헌의 만종일련사상은 당대의 종교지형 변동에 대한 그의 분석을 통해서 더욱 구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최병헌의 대표적인 저술인 『만종일련』을 통해서 당대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그의 인식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최병헌은 『만종일련』의 총론에서 당대의 종교지형의 변동에 담긴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공자와 맹자를 존경하고 높이 받드는 사람들은 (중략) 우리 유교가 천하제일의 종교라고 하고, 붓다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중략) 우리 불교가 동서양 제일의 종교라 하고, 선가(仙家)의 술법(術法)을 따르는 사람들은 (중략) 선문(仙門)이야말로 참 종교라 하고, 바라문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중략) 자기의 종교가 참 종교라 하고, 이슬람을 따르는 사람들은 (중략) 천하제일의 종교는 이슬람이라 하고, 유태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중략) 우리 유태교가 제일의 종교라 하고, (중략, 천주교 를 믿는 사람들은, 필자 첨가) 우리 천주교는 (중략) 천하에 제일가는 종교라 하고, 희랍정교회나 성공회(宗古敎)나 예수교 역시 자기의 신앙하는 종교가 천하의 참 종교라 하나니, 성신의 지혜와 총명이 아니면 각 교회의 장단고하(長短高下)와 미묘하고 그윽한 이치를 도저히 분변하기 어렵고, (중략) 그 밖에도 페르시아의 배화교와 인도의 태양교는 원리가 밝지 못하고 종지(宗旨)가 탁월하지 못하기 때문에 앞의 종교들과 나란히 거론하기에 부족하고, 오늘날 우리 한반도에 천도교와 대종교와 시천교와 천리교와 청림교와 태을교, 제화교가 각각 문호를 따로 세워서 모두 다 말하기를 우리 종교는 천하의 참 종교라 하나니, 자사(子思)가 시(詩)를 빌어 말하기를 “모두 다 내가 성인(聖人)이라고 하니 누가 까마귀의 자웅(雌雄)을 분별하리오.”라고 한 말이 진실로 격언이라고 하겠다.

최병헌은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각 종교가 저마다 자신의 종교가 참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는 ‘종교 경쟁의 시대’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병헌은 그리스도교의 각 교파 또한 저마다 자신의 교파가 진정한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또한 당시 활발한 활동을 보인 바 있는 민족종교들의 동일한 주장들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최병헌은 이와 같은 종교적 상황에 대해서 “모두 다 내가 성인이라고 하니 누가 까마귀의 자웅을 분별하리오.”라고 말함으로써, 이와 같은 종교 경쟁의 시대 내지는 종교 공존의 시대에 직면해서 과연 그 누가 종교의 참되고 그름의 요소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를 반문한 것이다. 결국 최병헌이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하나의 종교다원적 상황으로 인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종교다원 현상으로 파악한 최병헌은 그와 같은 상황 인식에 상응하는 실천의 실마리를 어떻게 추구하였다. 우리는 『만종일련』의 서언에서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최병헌은 당대의 종교적 상황, 즉 종교다원 현상에 직면해서 다음과 같이 만종일련 사상을 제시하였다.

비록 큰 덕을 지닌 위대한 선비라 하더라도, 갈림길에서 지팡이를 쥐고서 동서를 분간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 아니할 것이다. 여러 가닥의 의심이 분분하고 도리어 종교의 참된 근원을 잃게 되기에, 이 책 『만종일련』을 쓰게 된 것이다. (중략) 종교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했으며, 만물의 모체요, 무극의 도요, 변치 않는 진리의 근원이다. 만일 마음으로 그것을 저울질하고 연구하고 탐색하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그 가벼움과 무거움, 간략함과 튼실함을 분변할 수 있겠는가? (중략) 종교의 ‘종(宗)’자는 처음과 마루(근원)를 뜻하는 것이니, 그 이치를 근원 삼아 봉행한다는 것을 말하며, 종교의 ‘교(敎)’자는 도를 닦는다는 뜻이니, 그 백성을 가르쳐 감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만종일련의 ‘일련(一臠)’이라고 하는 것은 한 덩어리 고기로 솥 전체의 국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최병헌은 다양한 철학적·종교적 세계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종교의 참된 근원을 붙잡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만종일련』을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최병헌은 만종일련 사상을 제시하여 진리의 세계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한 덩어리 고기의 맛을 봄으로써 온 솥의 국 맛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의 진리의 단편(一臠)으로 만종(萬宗)의 신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최병헌은 만종일련 사상의 제시를 통해서 모든 종교(萬宗)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진리(一臠)를 체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일련(一臠)’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교였다. 따라서 그의 논지 이면에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관심이 어느 정도 깔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그의 논의는 이능화의 그것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능화의 경우 자신의 신앙은 여럿 가운데 하나일 수 있었지만, 최병헌의 경우 자신의 신앙은 다른 종교들을 가늠하는 잣대로 상정된 것이다. 이 점은 최병헌이 종교의 제시한 3대 관념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최병헌은 『만종일련』에서 각 종교의 도리(道理)와 그리스도교의 도리를 구체적으로 비교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종교의 3대 관념을 제시하였다.

종교의 이치에는 3대 관념이 있다. 첫째는 유신론, 둘째는 내세관, 셋째는 신앙론이다. 어떠한 종교를 물론하고 이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다면 완전한 도리가 되지 못한다(宗敎의 理는 三大觀念이 有니 一曰 有神論의 觀念이오 二曰 來世論의 관념이오 三曰 信仰的의 觀念이라. 某敎를 勿論고 缺一於此면 完全 道理가 되지 못지라).

최병헌은 유신론, 내세관, 신앙론을 종교의 3대 요소로 제시하면서, 이 3가지를 종교의 필수 요소로 주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다분히 그리스도교의 특성을 전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최병헌이 제시한 종교의 3대 관념은 최병헌이 각 종교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였다.

최병헌은 유가(儒家)의 종지(宗旨)는 유신적(有神的) 관념은 있지만, 상주(上主)의 은전(恩典)에 대한 약속이 없고 천국의 신민(臣民)과 영생에 대한 이치가 없다고 보았다. 최병헌은 또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점을 상주(上主)의 능력과 신앙의 자유, 성신(聖神)의 묵우(黙佑)와 전도의 열성, 생산 작업과 가난 구제(周窮救難)의 3가지로 정리함 으로써, 불교가 윤리 의식이 부족하다는 점과 무신론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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