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2. 삼국의 토기생산과 발전
  • 백제
  • 백제 토기의 형성과 발전
  • 한성시기와 웅진시기의 백제 토기
이성주

과연 한성백제 토기가 등장하는 시점은 과연 언제부터이며 이 한성백제 토기의 특성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몽촌토성과 석촌동고분군의 토기 자료를 분석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백제 토기의 등장 시점을 3세기 초나 3세기 후반에 둔다.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조 사에서 확인된 경당 지구 101호 유구를 발굴자는 백제 토기가 나온 가장 이른 시기의 유구라고 주장하면서 여기서 나온 오수전과 수입된 중국 도기를 근거로 백제 토기가 3세기 후반에 등장함을 재확인하였다.43) 權五榮, 「101호 유구의 성격에 대한 고찰」, 『風納土城』 Ⅵ, 국립문화재연구소·한신대학교박물관, 2005, pp.123∼127.

그러나 이 연대추정에 여러 문제가 있으며 그 시기를 훨씬 늦추어 보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백제 토기의 상한 연대를 결정할 자료가 딱히 확보되어 있지 않으므로 4세기 무렵의 어느 시점에 백제 토기의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고만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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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시기 백제토기의 대표 기종-고배
한성백제시기 백제토기의 대표 기종-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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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진이나 동진으로부터 수입된 도자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백제 토기의 새로운 기종이 탄생되었을 것이다.44) 朴淳發, 「百濟土器의 形成過程」, 『百濟硏究』 23, 1992, pp.21∼80. 이를테면 직구단경호(直口短頸壺), 유견호(有肩壺), 삼족반(三足盤)과 같은 기종은 그릇의 외형은 물론이고 문양 형태까지도 중국도자의 같은 기종과 아주 흡사한 것을 보면 백제 토기의 발생에 수입도자가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요인과 과정을 살핀다면 사회변동에 따른 토기생산의 전문화가 백제 토기의 발생을 이끌어 낸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수입 도자를 세련되게 모방할 수 있었던 것도 실 은 전문도공의 기술적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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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시기 백제토기의 대표 기종-직구단경호
한성백제시기 백제토기의 대표 기종-직구단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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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시기 백제토기의 대표 기종-삼족토기
한성백제시기 백제토기의 대표 기종-삼족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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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시기 백제토기의 대표 기종-광구장경호
한성백제시기 백제토기의 대표 기종-광구장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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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시기 백제토기의 대표 기종-삼족반
한성백제시기 백제토기의 대표 기종-삼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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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토기로의 변화는 옹(甕)과 발(鉢)이라고 하는 생활용 토기에서 먼저 발생한 듯싶다. 이러한 변화는 중서부 지방 백제 토기의 전반적인 변화이며 엄밀히 말하면 백제 토기의 발생 이전, 혹은 백제 토기의 영향 없이 시작된 것이다.45) 조상기, 「청주지역 원삼국∼백제시대 생활유적 토기 상대편년 연구」, 『先史와 古代』 26, 2007, pp.41∼87. 원삼국시대에는 이 두 기종을 중도식무문토기라고 부른 것처럼 무문토기와 다를 바 없는 거친 기술로 제작되었다. 곧 전업 도공이 아닌 제작자에 의해 마을 단위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와 함께 나오는 타날문단경호는 타날법과 물레질법에 의해 전문인에 의해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북도 진천의 산수리유적은 3세기 말에서 4세기에 걸친 백제 지역의 토기요지로 전문 도공에 의해 큰 규모로 운영되던 공방이었다.46) 柳基正, 「鎭川 三龍里·山水里窯 土器의 流通에 관한 硏究(下)」, 『崇實史學』 16, 2003, pp.66∼72. 그런데 이 공방에서는 다른 기종은 전혀 제작이 시도되지 않았고 타날문단경호만 생산되었다. 백제의 중심지가 아니라 외곽이긴 하지만 이 무렵까지 전문 도공들은 다양한 기종을 생산하였던 것이 아니라 타날문단경호만을 생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날문단경호를 전문으로 제작하였던 도공들이 그들의 전문 기술 체계로 옹과 발과 같은 기종을 생산하여 각 마을의 소비자들에게 광범하게 공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백제 토기로의 전환 과정의 첫 단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이와 같이 축적된 기술로 전문도공이 중국 도자의 기종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그릇 제작을 시도함으로써 다양한 한성백제 토기가 발생하게 된 것으로 본다.

한성백제의 토기에는 중도식무문토기에서 발전되어 나온 적갈색연질의 옹과 발, 그리고 전통적인 타날문단경호와 대호, 중국 도자의 기종을 토기로 모방하거나 목기와 같은 기물의 번안토기 혹은 새로 개발된 기종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회색토기의 기종이 있다. 그런데 회색토기는 두 가지 질의 토기가 섞여 있다. 회색의 연질에 가까운 것이 있는가 하면 회청색의 경질, 즉 도질토기(陶質土器)가 있다. 보통 기종에 따라 토기의 질이 다를 것이라 예상되지만 실은 같은 기종이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질로 제작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백제의 중심지에서 한성백제 토기가 성립할 무렵 중서부 지방에는 마한토기의 전통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이 시기 마한토기는 주로 저분구묘(低墳丘墓)와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의 부장품으로 흔히 확인된다. 천안의 청당동, 청주 송절동과 봉명동, 공주 하봉리, 그리고 오산 수청동 고분군이 대표적으로 이 마한의 토광묘에서는 격자문과 평행선문으로 타날된 회색 단경호 여러 점과 중도식무문토기 발(鉢) 한 점이 동반되어 출토된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마한의 토광묘는 4세기 후반이나 5세기초까 지 축조되다 소멸하고 이 무렵부터 한성백제의 중심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지역에 새로운 성격의 고분군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천안 용원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청주 신봉동, 원주 법천리고분군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 유적의 각각의 매장시설 형식은 상이하더라도 출토 유물, 특히 상위고분의 부장품에서는 상당한 공통성이 있다. 여기서 상위고분에 등장하는 공통된 유물이란 백제로부터 사여받은 중국 도자와 금공위세품과 한성백제의 토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성백제의 고유 기종인 직구단경호, 삼족기, 고배 등과 함께 한성백제의 중심지의 것과 꼭 같은 장식과 문양을 지닌 흑색마연토기는 빠지지 않고 출토된다. 이러한 고분군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한성백제에 복속한 지방의 지배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고분군들의 시기는 일러야 4세기 후반을 넘지 못하며 그 분포가 금강 유역 일원에 미치고 있어 4세기 후반경에 성립한 초기국가 백제의 세력권이 어느 정도 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성백제는 5세기 후엽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몰락하고 그 지배층은 가까스로 웅진으로 패주하여 그곳을 제2의 도읍으로 삼게 된다. 웅진시기에 백제는 금강 유역 일대를 세력의 기반으로 삼아 국력 회복을 도모하면서 호남 지방으로도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역사적으로 한성시기는 막을 내렸지만 한성백제의 토기는 웅진시기까지 지속되며 기종 구성이나 제작기술에서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웅진시기의 왕릉이 자리 잡은 송산리고분군의 뒤편 구릉에 위치한 정지산유적은 무령왕과 왕비의 빈전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6세기 전반의 짧은 시기에 존속하였던 의례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호류와 고배, 개배, 삼족기 등은 한성백제의 기종 그대로이며 약간의 기형적 변화만 관찰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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