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2. 삼국의 토기생산과 발전
  • 백제
  • 백제 토기와 그 주변
  • 영산강 유역의 토기
이성주

문헌 해석을 통해서는 영산강 유역이 4세기 후반 근초고왕에 의해 병합된 지역이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백제사의 범주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보면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이 지역은 백제의 중심지와는 상당히 다른 문화적인 특색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대형의 옹관을 매장시설로 이용한다는 점이나 고분을 축조하는 관념이 백제의 그것과는 다른 분구묘의 원리를 따른다거나 하는 점은 독자적인 특징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대형의 분구에 화려한 위세품까지 부장된 매장시설의 존재를 고려한다면 이 지역에 독자적인 지배집단이 세력을 유지해 왔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는 6세기 중엽까지도 이 지역이 문화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적으로도 독자세력이었음이 주장되고 있다.52) 林永珍, 「馬韓 消滅時期 再考」, 『삼한의 역사와 문화』, 자유지성사, 1995, pp.88∼108 ; 金洛中, 「5∼6世紀 榮山江流域 政治體의 性格」, 『百濟硏究』 32, 2000, pp.43∼79.

영산강 유역에서는 원삼국시대 이래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되어 온 토기 문화 전통이 확인된다. 특히,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 壺), 광구소호, 개배, 및 장경호 등과 같은 도질토기 기종을 중심으로 이 지역 토기 제작 전통을 ‘영산강 양식’으로 정의하기도 한다.53) 徐賢珠, 앞의 책, pp.197∼204. 물론 백제 토기를 비롯하여 주변 지역 토기와의 교류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는 하였지만 백제 양식이나 신라 양식이 있듯이 독자적인 영산강 양식이 존속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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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유역토기-직구단경소호
영산강 유역토기-직구단경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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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유역토기-개배
영산강 유역토기-개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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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유역토기-병
영산강 유역토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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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명화동 전방후원분의 분구 주위에 배치시킨 분주토기
광주 명화동 전방후원분의 분구 주위에 배치시킨 분주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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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유역에서는 원삼국시대 말기에 고분에 부장되는 토기의 종류가 정돈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영산강 양식 중에서 가장 이른 단계의 유물군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곧이 시기의 특징적인 토기로는 짧게 직립한 목에 뚜껑받이 턱과 같은 것을 붙여놓은 이중구연의 평저 혹은 원저단경호와 아가리가 넓고 그릇이 납작한 광구평저호 등이 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라고 할 수 있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쯤 되면 주변 지역의 토기문화와 접촉하여 그릇 종류가 늘어난다. 우선 백제양식의 영향을 받아 타날문단경호도 백제의 것과 닮게 되고 새롭게 삼족기가 등장하는 등 변화가 오지만, 흥미롭게도 이 무렵 영산강 유역의 토기는 가야 지역의 토기와의 접촉으로 가야계통의 기종을 받아들이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광구소호와 고배라는 기종인데 처음 영산강 유역에 등장한 이 신기종의 형태는 가야 본토의 것을 빼어 닮았기 때문에 가야 지역으로부터 기술이 전수되었거나, 가야 토기를 모방해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5세기에는 영산강 유역의 분구묘도 점차 대형화되고 수장묘의 부장품도 더욱 화려하게 되는데, 이 무렵 고분에서 출토되는 그릇 종류의 구성도 일정하게 정돈된다. 이와 같이 고분 부장용의 도질토기 기종 구성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백제 지역의 그릇 종류가 일부 채용되어 삼족기, 병과 장경호와 타날문단경호, 그리고 대각이 짧은 고배 등이 나타난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만의 독특한 유공광구소호, 장군[橫甁], 개배 등이 지역적인 전통도 계속 유지한다. 영산강 유역의 도질토기 양식은 이 지역에 자치적인 정치세력이 존속하는 한 지속되어 온 것 같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은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백제에 통합되고 무덤의 양식도 이른바 사비시대 횡혈식석실로 바뀌게 된다. 이와 함께 토기의 생산과 사용에 있어서도 백제 중앙의 양식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산강 유역 토기의 생산과 사용에서 가장 특징적인 양상은 분구의 둘레에 세워 놓은 이른바 분주토기(墳周土器)와 성인을 신전장(伸展葬)할 수 있는 대형 옹관(甕棺)의 독특한 발전이라 할 수 있다. 분주토기라고 하는 것은 실용적인 그릇이 아니라 대형고분의 분구 주위에 돌려놓은 의례적인 물품이다. 우리나라에는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지만 일본 열도에서는 전국적으로 발견되며 일찍이 그들은 이를 ‘하니와[埴輪]’라고 불렀다. 이 양식을 우리의 분주토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시작하여 장기간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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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후원형의 분구 형태를 지닌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전방후원형의 분구 형태를 지닌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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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관
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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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유역의 분주토기는 우선 길쭉한 원통형(圓筒形)과 항아리 호형(壺形)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원통형은 일본의 ‘하니와’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형식과 영산강 유역 나름의 스타일이 가미된 형식으로 구분되며, 호형분주토기 역시 왜(倭) 지역에서 발견되는 형식이다.54) 林永珍, 「韓國 墳周土器의 起源과 變遷」, 『湖南考古學報』 17, 2003, pp.83∼111. 형식학적인 검토를 통해 보아도 영산강 유역의 분주토기는 우선 일본의 하니와를 표본으로 하여 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분주토기를 둘러싼 양 지역의 고분문화의 교류는 5세기 전반 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꽤 장기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결코 단순화시켜 보기는 어렵고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인 교섭을 배경으로 한 양 지역의 문화적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고분의 매장시설로 사용하기 위한 대형 옹관의 제작이야말로 영산강 유역의 토기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옹관의 사용은 우리나라에서 선사시대부터 확인된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백제의 분묘문화 속에서도 찾아지지만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더 흔히 볼 수 있는 매장의례였다.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는 옹관이 소아용 매장시설로 이용되었다고 보이는데, 고분에 단독 매장시설로서 축조되는 것이 아니라 묘역의 주변에 배장의 형태로 들어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에서는 옹관이 주 매장시설로 쓰이는데다 성인을 묻을 수 있는 규모로 발달한다는 점, 그리고 나주 신촌리 9호분의 발굴로 드러났듯이 금동관(金銅冠)과 금동식리(金銅飾履)까지 갖추어 묻힌 수장의 매장시설로까지 사용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지역에서는 옹관묘가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장례문화인 듯하다.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초기 철기시대 옹관묘지가 발굴된 적이 있는데, 점토대토기로 분류되는 항아리를 이용하여 장례를 지냈던 공동묘지이다. 영산강 유역에서 옹관고분이 고분문화로 정착하게 되는 시기는 4세기 경으로 추측된다. 분구묘가 이 지역의 묘제로 발달하는 단계에서 온관이 사용되었을것이다.

옹관고분의 변천에 대한 연구를 보면,55) 成洛俊, 「榮山江流域의 甕棺墓 연구」, 『百濟文化』 15, 1983, pp.105∼147 ; 徐聲勳, 「榮山江流域 甕棺墓의 一考察」,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 Ⅰ, 一志社, 1987, pp.501∼524 ; 李正鎬, 「榮山江流域 甕棺古墳의 分類와 變遷過程」, 『韓國上古史學報』 22, 1996, pp.31∼68 ; 吳東墠, 「湖南地域 甕棺墓의 變遷」, 『湖南考古學報』 30, 2008, pp.101∼138. 처음부터 매장시설로 사용하기 위해 큰 항아리를 만들었던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 쓰던 대호(大壺)를 옹관으로 전용하게 된 것이 옹관고분의 발생이라고 한다. 실용 토기의 옹관화가 계기가 되는 이후 고분이 대형화되고 발전하게 되면 옹관도 발전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대형 옹관고분군의 분포를 분석하면 당시 정치세력이 결집되는 양상을 알 수 있다.56) 李映澈, 「옹관고분사회 지역정치체의 구조와 변화」, 『湖南考古學報』 20, 2004, pp.57∼90. 5세기부터는 지배계급의 무덤이 발달하게 되면서 옹관도 길이 2m가 넘는 크기 로 거대화된다. 이러한 대형 항아리는 당연히 성형과 번조에 상당한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최근 옹관을 제작하였던 작업장과 가마가 발굴되고 요즘 옹기를 제작하는 도공의 작업공정을 참조해서 성형공정을 이해하려 하지만,57) 李正鎬, 「영산강 유역 고대 가마와 그 역사적 성격」, 『삼한·삼국시대의 토기생산기술』, 복천박물관, 2003, pp.65∼96. 둥근 바닥으로 마무리한 캡슐 모양의 거대한 옹관을 어떻게 완성하였는지 아직은 완벽하게 설명해 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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