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
  • 01. 차 문화의 유행과 청자의 제작
  • 차 문화와 청자
이종민

고려 초부터 차는 왕실, 문무귀족, 승려 등 상류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즐기던 고급 문화의 하나였다. 차는 국가 제례는 물론이고 왕의 하사품, 외교상의 예물, 사찰의 공헌(貢獻)과정에서 폭넓게 이용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의 음료로 자리 잡았다.91) 정영선, 『한국 차문화』, 너럭바위, 1990, pp.107∼108. 이와 같은 사실은 청자의 발전 과정에 지대한 기여를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려 전기의 사료 중에는 왕실에서 차를 하사하거나 의식 때에 진다(進茶)하는 기록이 많이 전한다. 예종(睿宗) 때 정해진 각종 왕실의 의식에서는 태후, 왕세자, 왕자의 책봉과 함께 공주의 하가(下嫁), 원회 등의 의식과 대관전에서의 군신연회, 노인에게의 사연(賜宴), 연등회, 팔관회와 같은 행사에 차가 빠지지 않고 사용되었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에도 차를 대접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중기에는 차의 현황과 습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1123년 북송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하였다가 기록을 남겼던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 참고가 된다. 다조(茶俎)조에 이르기를 ‘토산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고 오직 중국의 납차(蠟茶)와92) 建州産으로 복건성 소무현에서 수확되는 차를 말한다. 용봉사단(龍鳳賜團)을93) 용봉차는 송나라 휘종 2년(1120) 복건성 건구현의 ‘북원공다소’에서 처음으로 만든 차로 찐 차를 둥근 떡처럼 만들어 용과 봉황문양을 찍은 것이다. 귀하게 여긴다. 하사해 준 것 이외에 상인들이 오가며 팔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는 고려 사람들도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차도구를 만들었다. 금화오잔(金花烏盞), 비색소구(翡色小甌), 은로탕정(銀爐湯鼎) 등은 모두 중국의 모양과 규격을 흉내 낸 것들이다.’라고 하여 고려인들이 중국차를 선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94) 『宣和奉使高麗圖經』 卷32, 器皿3, 茶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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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황제의 기호품 용봉단차(龍鳳團茶)
송 황제의 기호품 용봉단차(龍鳳團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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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차를 예찬하는 시를 남겼다. 곽여, 이규보, 이인로, 임춘, 이진, 이연종, 이제현, 이색, 한수 등 당대의 문인·문사들은 차를 찬미하고 차와 차도구 등을 선물로 주고받았으며 다선일미(茶禪一味)적인 성향을 보였다. 또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찰에서 애용된 차는 고려시대에 더 많이 확대된 듯, 큰절에는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는 다소촌(茶所村)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95) 이정신, 「고려시대 茶생산과 茶所」, 『한국중세사연구』 6, 1999, p.170. 승려들이 총림이나 선원에서 지켜야 할 법규를 청규(淸規)라 하는데, 중국 송의 청규를 범본으로 한 1254년의 고려판 선원청규인 『고려판중첨족본선원청규(高麗板重添足本禪院淸規)』에는 사찰 내에서의 의례와 일상에서의 행다(行茶)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96) 張南原, 「고려시대 茶文化와 靑瓷」, 『美術史論壇』 24, 한국미술연구소, 2007, p.143.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의 차 문화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문인 관료들과 승려 등 이른바 상류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차도구에 어떠한 종류가 있고 무엇이 도자기로 제작되었는지 명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다완이 가장 많이 제작된 것은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분명히 알려진 사실이며 그 밖에도 『선화봉사고려도경』 기명조에 등장하는 다조(茶俎), 수병(水甁), 반잔(盤盞), 정병(淨甁), 화호(花壺), 탕호(湯壺) 등도 다구일 가능성이 높다. 차를 마시기 위한 기물의 필요성은 이미 차가 본격적으로 수입되었던 통일신라시대부터 제기되었으나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청자를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차도구의 생산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던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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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벽화묘의 차도구 그림
요나라 벽화묘의 차도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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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자기로 만든 차도구의 제작 경향은 중국 차 문화의 변화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10세기 전반, 청 자 발생기에 개경 주변의 전축요로부터 시작된 차도구 중심의 제작 경향은 요업의 중심이 서남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던 11세기에도 지속되었다. 무려 약 150년간 다완은 10∼11세기에 이르는 모든 가마들에서 대략 50%가 넘는 절대적인 비중으로 생산되었고,97) 李鍾玟, 「韓國 初期靑磁의 形成과 傳播」, 『美術史學硏究』 240, 2003, pp.61∼65. 그 밖에 잔탁, 대소의 항아리, 주자, 장고 등 차 관련 도구로 추정되는 기종까지 합치면 60∼70%를 상회한다.

고려 초의 다법은 당나라 육우(陸羽, 727?∼803)에 의해 정리된 전다법(煎茶法)을 계승한 팽다법(烹茶法)으로, 차를 먹기 위해 가루차를 솥에 넣고 끓이면서 휘저어 탁한 차를 마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98) 전다법은 煮茶法이라고도 한다. 이 방법은 쪄서 말린 둥근 차를 숯불에 구워 다연(茶碾)으로 곱게 간 다음 솥에 물과 함께 넣어 끓인 일종의 차 죽(粥)으로 해무리굽완은 이를 국자로 퍼서 식히면서 먹는 그릇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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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양각연판문발
청자양각연판문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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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1세기 말경,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송나라 유학을 다녀온 이후 변화된 음다법이 전래되면서 차 음용법은 점다법 (點茶法)으로 바뀐 듯하다.99) 고려시대 다법의 변화와 이를 반영하는 청자 차도구에 대한 연구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된다. 김은경, 「高麗時代 靑磁 甌形 茶容器의 변화」, 충북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0. 점다법은 둥글게 찐 차를 굽지 않고 다연에 곱게 갈아 뜨거운 물과 함께 찻그릇에 넣어 휘저으면서 포말이 일어난 차를 마시는 방법으로 흔히 말차법(抹茶法)이라고 한다. 이 경우 완과는 다른 용기가 필요한데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 이를 대체한 기종은 발(鉢)이나 대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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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통형잔
청자통형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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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고려시대 중기 이후의 가마터인 강진 용운리 10호 요지 Ⅱ층이나 부안 유천리 7구역, 음성 생리, 대전 구완동 등의 발굴현장에서는 완이 급격히 줄어들고 발·대접의 비율이 증가하는 현상을 보인다. 여러 문헌기록으로 볼 때 차 문화가 고려 중기 이후 더욱 확대되는 양상을 고려해 보면, 흔히 음식기로 생각해 왔던 발, 대접들이 변화된 차 문화를 반영하는 그릇일 가능성이 높다.100) 張南原, 앞의 논문, 2007, pp.114∼155.

고려시대 중기에 이르러 변화된 차 문화를 반영한 새로운 기종으로 통형잔의 등장을 들 수 있다. 뚜껑을 얹어 사용하는 통형잔은 보통 고려 중기 이후에 운영된 모든 가마터에서 흔히 발견되는 유물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의 다조(茶俎)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인들은) 매일 세 차례 차를 마시는데 뒤이어 또 탕(湯)을 내놓는다. 고려인들은 탕을 약이라 하는데 사신들이 다 마시는 것을 보면 기뻐하지만 간혹 다 마시지 못하면 자신들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고 원망하며 가버리 기 때문에 항상 억지로 그것을 다 마셨다.

이 기록에서 말하는 탕은 지금의 인삼차와 같은 음료로서 차를 마신 후 탕으로 입가심을 하였던 고려인들의 독특한 차음용 방식을 잘 설명 해주는 내용으로 추측된다. 통형잔은 이때 필요한 기종으로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고려식의 차 문화에 의한 창작물이라 하겠다.101) 위의 글.

이처럼 고려청자의 기종에는 변화된 차 문화를 반영한 그릇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때로는 일상 생활용기보다도 더 큰 비중을 보인 경우도 있어 청자의 발전에 차 문화가 갖는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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