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
  • 04. 청자의 생산과 유통
  • 서해안에서 발견되는 보물선
이종민

최근 들어 한반도의 서해안 일대에서는 수중 인양 작업을 통해 고려시대의 선박과 함께 청자들이 발견되는 사례가 많다. 이는 도자를 비롯하여 지방의 각종 토산 공물들이 생산지에서 적재된 후 소비처를 향해 운송하던 중 풍랑을 만나 난파를 당하여 바닷 속에 가라 앉은 것 들로 이해된다. 서해안의 연안항로는 원래 고대부터 이용된 해상 루트였지만 고려시대에 들어와 개경에 수도가 정해지면서 지방의 각종 물자들을 운송하였던 서해 바닷길은 전보다 체계화된 과정을 통해 관리되었다. 바닷속에서 발견되는 도자 유물에 특별히 청자가 많은 것은 고려시대에 정비된 물류체계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국가의 재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세(租稅)와 공물(貢物)은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운송체계의 확립이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가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토산 공물의 대상이었던 도자기가 어떻게 서 해안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고려의 지방통치체제 확립 과정은 국초인 태조 23년(940)에 군현제도를 개편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154) 박종진, 『고려시기 제정운영과 조세제도』,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pp.31∼45. 광종 즉위년(949)에는 각 주현(州縣)에서 내야 할 공물의 종류와 수량을 구체적으로 정하였는데 이는 전국적 규모의 조세수급이 체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어 성종 2년(983)에는 지방제도를 개편하고 향리로 하여금 군현의 조세수취를 책임지게 하였는데 이는 조세제도의 완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55) 張南原, 「漕運과 도자생산, 그리고 유통: 海底引揚 고려도자를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2, 2008, p.171.

각 주현에 배정된 곡물과 포(布) 중심의 조세는 양과 무게가 많이 나가 육로보다는 해로나 수로를 통해 개경으로 이동되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각 지역의 물자를 집합시키는 조창(漕倉)이었다. 고려에서는 정종 때에 조운제(漕運制)를 정비하여 12조창(漕倉)을 설립하고 조운선의 종류와 수를 정하였으며 문종 21년(1067)에는 황해도 장연에 안란창(安瀾倉)을 추가하여 모두 13개의 조창을 운영하였다.156) 13개의 조창은 다음과 같다(조창명·옛 지명/현 지명순). 『高麗史』 卷79, 志33, 食貨 漕運 참고. 德興倉(忠州/忠州), 興元倉(原州/原州), 河陽倉(牙州/牙山), 永豊倉(富城/瑞山), 安興倉(保安/扶安), 鎭城倉(臨陂/群山), 海陵倉(羅州/羅州), 芙蓉倉(靈光/靈光), 長興倉(靈岩/靈岩), 海龍倉(昇州/順天), 通陽倉(泗州/泗川), 石頭倉(合浦/昌原), 安瀾倉(長淵/長淵). 각종 소(所)에서 생산된 지방 토산 공물 역시 이들 조창에 결집되어 조운로를 따라 수도로 이송된 듯하며 여기에서 자기는 중요한 적재 품목 중 하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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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조운로와 조창(漕倉)
고려시대의 조운로와 조창(漕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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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의 조창 중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영암의 장흥창(長興倉)과 부안의 안흥창(安興倉)이다. 장흥창은 대구소, 칠량소가 있는 강진만, 해남의 산이면 일대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안흥창은 부안의 유천리, 진서리 같은 도자 생산 단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해안가에 접해 있는 청자 생산물들은 조창으로 이동한 후 선적되어 개경과 같은 대형 소비지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다양한 품질의 청자 생산이 가능하였던 이들 지역이 조창과 인접해 있는 점은 서해안에서 발견되는 도자 유물의 생산지가 강진, 해남, 부안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조사 결과 수중 인양 유물의 상당수는 이들 지역의 자기로 추측되고 있어 조운로의 개설과 강진, 해남, 부안자기의 수급체계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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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앞바다 비안도 출토 청자
군산 앞바다 비안도 출토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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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부터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서해안의 도자기들은 최근에 이르러 발견되는 사례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1983∼1984년에 조사된 완도(11세기 후반), 1987년경의 보령 앞바다(1329), 1995∼1996년의 무안 도리포(14세기 후반), 2002년의 군산 야미도(12세기 전반), 2002∼2003년의 군산 비안도(12세기 후반), 2003년의 군산 무녀도(12세기), 2003∼2004년의 군산 십이동파도(11세기 말∼12세기 초), 2005년 보령 원산도(13세기), 2007년의 태안 대섬(12세기), 2008∼2009년 태안 마도(13세기 초) 등의 수중 발굴은 서남부 일대의 가마에서 끊임없이 자기가 올라가고 있었음을 보 여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수중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가 11세기 후반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즉, 전형적인 한국식 해무리굽완의 제작 단계인 11세기 중심의 초기 청자들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아직까지 확인이 안 된 것인지, 11세기 전반부에는 자기 운송 루트가 해로가 아니었는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그러나 국내의 여러 소비처에서 강진산 청자해무리굽완이 폭 넓게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11세기 초, 중반에도 서해안을 통해 청자들이 이송된 듯하다. 향후 수중 발굴이 추가되면 이와 관련한 청자들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조운제의 정립과 성종∼현종시기의 지방제도 개편, 서남부 지역 가마의 흥기는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초부터 조세 체계를 확립하고 수취하는 과정에서 10세기 말∼11세기 초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었고 이때부터 서남부 일원 요업단지의 생산량 증가와 품질 향상이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생산된 자기들은 이후 조운로를 이용하여 개경을 위시한 대도시로 운송되었고 이동 중에 침몰한 운반선에서 우리는 지금 보물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도자의 운송은 조운창에서 하부가 깊고 넓은 곡식 운반선인 초마선(哨馬船)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마선은 내륙 수로용보다 해상운반용의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57) 張南原, 앞의 글, 2008, pp.192∼193. 도자기들은 같은 기종끼리 묶어 차곡차곡 선적되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목간(木簡)의 존재이다. 2007년에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발견된 해저 인양 유물 중에는 ‘탐진에서 개성의 대정(하급장교) 인수(仁守)에게 보냄(耽津亦在京隊正仁守)’이라든가 ‘개성의 ○안영댁(安永宅)에 도자기 한 꾸러미를 부침(在京○安永戶付沙器一)?’, ‘최대경 댁에 올림(崔大卿宅上, 대경은 종3품 벼슬)’ 등의 내용을 담은 목간이 몇 점 발견되었다. 목간들에서 우리는 생산지와 운송체계, 도착지, 거래관계, 수요자 등이 적혀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강진의 옛 지명인 탐진에서 개성으로 도자기를 배달하면서 직접 도자기를 받는 수납자와 수량을 명기하여 붙였던 물표였던 것이다. 고려판 택배 시스템의 증거가 되는 목간을 통해 우리는 이미 고려시대에 강진에서 주문을 받아 배를 이용하여 도자기를 소비처에 납품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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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대섬 앞바다 출토 목간
태안 대섬 앞바다 출토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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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선적 상태
도자의 선적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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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도자기의 유통과 관련하여 고려 후기의 기록은 매우 중요한 단서를 준다. 『고려사』 열전에는 충혜왕의 비인 은천옹주의 아비가 사기를 파는 상인이었으며 사람들이 이를 빗대어 사기옹주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158) 『高麗史』 卷89, 列傳2, 后妃 忠惠王條. 이를 보면 고려 후기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사기점이 있었고 도자를 사고 파는 상행위가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한 제도를 통해 도자기가 생산, 유통되고 소비되었다. 목간이나 문헌 자료로 볼 때, 청자의 소비층은 다양하였으며 어느 시점에서는 매매를 통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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