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4 조선 전기의 도전과 위엄, 분청사기와 백자
  • 01. 전통의 계승과 소박한 파격의 미, 분청사기
  • 일곱 가지 장식기법의 유행과 개성
전승창

분청사기는 그릇의 종류도 많지만 장식기법과 소재가 다양한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장식은 그릇 표면에 백토를 얇게 칠하거나 뾰 족한 도구로 새기거나 칼로 긁거나 도장으로 찍거나 붓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 여러 기법을 사용하였다. 기법에 따라 각각의 생김새나 분위기가 달라지고 유행하는 시기도 다르며, 제작지에 차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장식기법은 상감, 인화, 조화, 박지, 철화, 귀얄, 덤벙 등 일곱 가지로 구분되는데, 이는 장식방법이나 재료에 따라 종류를 나누고 이름 붙인 것으로 두 가지 이상의 기법이 함께 사용되기도 하였다. 장식기법은 특징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정리할 수도 있다. 하나는 그릇 표면에 칼이나 도장으로 직접적인 변화를 주고 흙을 채우는 방법이다. 둘째는 표면에 백토를 얇게 발라 장식한 것이다. 셋째는 붓으로 안료를 찍어 그림을 그리거나 덧칠한 것이다. 장식소재는 식물과 동물 모두 사용되었는데, 물고기, 학, 새, 거북, 용, 어룡, 개, 구갑, 연꽃, 연잎, 당초, 국화, 모란, 버드나무, 초화 등이 등장하며, 이외에 추상적인 선과 문자(文字)도 확인된다. 소재는 한 가지 혹은 몇 종류를 함께 그리거나 장식하였으며 기법에 따라 특징이 분명하고 개성도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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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상감연화문매병
분청사기상감연화문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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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는 시기에 따라 유행이 변화되고 지역에 따른 개성도 나타난다. 고려 말기 전라남도 강진은 대표적인 청자 제작지였지만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늘어나고 치안이 불안해지자, 사기장들이 전국으로 흩어졌고 이후 각지에 소규모 청자가마가 설치, 운영되었다. 조선 개국 이후 1420년대까지도 장식기법이나 소재, 구성은 여전히 고려 말기의 상감청자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특징을 보인다.

상감장식 분청사기는 표면에 음각을 한 후 움푹 파인 부분에 백토나 자토를 채워 장식하는 기법으로 색의 대비에 의해 장식 효과를 낸다. 전국 각지의 가마에서 즐겨 사용되었으며, 물고기, 파도, 학, 새, 버드나무, 거북, 모란, 연꽃, 용 등이 소재로 사용되었다. 대접과 접시를 주로 하여 병, 매병, 호, 합, 자라병, 주자, 장군, 잔이 제작되었고 흑백의 선상감으로 다양하게 장식하였다. 매병의 경우. 몸체가 공처럼 둥글고 아랫부분에서 나팔 모양으로 폭이 좁아지다 바닥에서 넓게 벌어지는 형태로 역동적인데, 전체의 비례나 세부의 모습, 표현된 문양까지도 고려 말기의 청자매병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인화장식이 많아지고 오히려 상감장식이 부분적으로 사용되는 변화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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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인화국화문호
분청사기인화국화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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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인화승렴문 ‘경상’명 사이호
분청사기인화승렴문 ‘경상’명 사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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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430년대부터 1460년대까지 인화장식은 절정기를 맞았는데, 이전에 비하여 그릇의 종류와 형태의 변화는 작지만 장식 소재의 크기가 작아지고 장식 사이의 간격이 좁아 더욱 치밀해진다. 인화는 단순한 형태의 문양이 새겨진 도장을 그릇 표면에 찍은 후, 그 홈에 백토를 채워 장식 효과를 내는 기법으로, 넓은 의미로 보아 상감과 동일하다. 전국 각지에서 유행하였으며 경상도에서 특히 오랫 동안 사용되었다. 국화, 동그라미, 꽃잎 등 문양은 몇 종류에 지나지 않으며, 도장으로 반복적이고 조밀하게 표면을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표면에 내섬시, 장흥고와 같은 관사명을 새긴 예도 있다. 호의 경우, 전체의 비례와 양감이 뛰어나며 표면 가득 장식을 하였는데, 어깨와 저부에 상감으로 연잎을 배치하고 몸체 중앙 전면에 크기가 작은 국화문을 꼼꼼하게 채워 넣어 변화된 장식의 특징이 뚜렷하다.

1466∼1468년 사이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175) 관요가 처음 설치된 시기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정양모는 선조 연간(1567∼1607) 이전이라는 학설을 제시한 바 있고(정양모, 「사옹원과 분원」, 『국보』8 백자·분청사기, 예경산업사, 1984, pp.189∼193), 윤용이는 1467년 4월을 전후하여 설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윤용이, 「조선시대 분원의 성립과 발전」, 『광주분원과 조선도자』, 경기도박물관, 2001, pp.7∼8). 또한, 강경숙은 1469년 이후의 일이라고 역설하였으며(강경숙, 「분원성립에 따른 분청사기 편년 및 청화백자 개시문제 시론」,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 p.1496), 김영원은 1467년 4월에서 1468년 12월 사이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을 피력한 바 있다(김영원, 「조선 전기 도자의 시기구분」, 『조선 전기 도자의 연구-분원의 설치를 중심으로』, 학연문화사, 1995, p.54). 필자는 1466년 6월을 전후하여 관요가 최초 설치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전승창, 「경기도 광주 관요의 설치시기와 번조관」, 『미술사연구』 22, 2008, pp.199∼218). 분청사기는 질과 장식기법, 성격 등이 크게 변화되었다. 백자는 눈부시게 발전한 반면 분청사기는 지방의 관아용이나 그 지역의 민수품으로 장식이 변화되고 수요가 줄어 들었다. 이후 분청사기의 질과 장식이 거칠어지기도 하며, 한편으로 상감이나 인화장식의 틀에서 벗어나 장식의 표현이 다양해지고 지역별로 서로 다른 기법이 개발되어 개성이 뚜렷해진다. 이 시기에 인화장식은 경상도 등 일부 지역에서 지속되기도 하지만 도장에 새긴 문양의 크기가 커지고 장식의 짜임새나 찍힌 상태가 거칠며, 장식이 차지하는 공간도 줄고 백토의 감입도 지저분한 것이 많다.

그러나 전라도에서는 독특한 조형과 미감을 보이는 조화나 박지기법으로 장식한 분청사기가 새롭게 등장해 유행하였다. 조화는 그릇 표면에 귀얄로 백토를 얇게 칠한 후 그 위에 뾰족한 도구로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기법이다. 윗면의 백토와 그 밑에 드러나는 회색의 태토가 색의 대비를 이루며 장식효과를 낸다. 소재의 선택이 자유로우며 쉽고 빠르게 장식할 수 있다. 연꽃, 모란, 국화, 버드나무, 당초, 물고기, 새, 거북, 게, 개, 추상선 등이 많이 그려졌으며, 동일한 소재라고 해도 각각의 모습과 세부 표현이 서로 달라 재미 있다. 박지는 조화기법으로 그림을 그린 후 소재 배경 면에 남아 있는 백토를 긁어 장식 효과를 내는 기법이다. 흰색의 백토와 회색의 바탕흙이 이루는 색의 대비는 물론 요철에 의해 양각한 듯한 효과도 난다. 물고기, 모란, 연꽃, 당초, 풀꽃 등 생활주변의 소재를 회화적이고 자유분방하며 활달하게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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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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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제작된 그릇의 종류는 대접, 접시를 비롯해 병, 편병, 호, 장군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종류가 주류인데, 특이하게 장식은 대접이나 접시보다 병, 편병, 호, 장군 등에 주로 나타난다. 그 중에도 편병이 많은데, 물레에서 둥근 병을 만든 후 양쪽 면을 두드려 납작하게 만든 것이다. 거친 질감과 투박해 보이는 형태에, 주변에 보이는 물고기나 새, 모란, 연꽃 등 친근한 소재를 자유분방하게 표현하였다. 세부 묘사를 생략하거나 특징만을 극대화시켜 선으로 나타내거나 배경면의 백토를 긁어 개성과 재미가 넘치는 새로운 미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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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철화연지어문장군
분청사기철화연지어문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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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귀얄문편병
분청사기귀얄문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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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같은 시기에 충청도 계룡산 일대에서는 철안료를 붓에 찍어 그림을 장식하는 철화기법이 성행하였다. 철화는 얇게 바른 백토 위에 산화철을 안료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하여 장식하는 기법이다. 흰색의 바탕 위에 칠해진 검은색 안료가 빚어내는 강렬한 색의 대비와 속도감 있는 붓자국, 거친 질감이 매력적이다. 물고기, 새, 연꽃, 모란, 당초, 풀꽃이 즐겨 그려졌으며, 백토가 충분히 자화(磁化)되지 않아 표면 일부가 벗겨진 것도 있다. 충청남도 공주 학봉리 계룡산 일대에서 주로 제작되어 ‘계룡산 분청사기’라고도 불린다. 대접과 접시, 병, 호 등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붓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회화적인 표현이 더욱 뛰어나다. 특히, 흰색과 검은색이 빚어내는 강렬함과 빠르게 움직인 붓의 흔적은 다른 기법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미의 경지를 이루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반 사이 분청사기는 그릇의 종류가 줄 어들고 장식이 더욱 간략해진다. 지역적인 개성을 보이던 장식도 변화되어 그릇의 일부 혹은 전면에 귀얄로 그릇 표면에 백토를 살짝 칠하는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귀얄기법은 풀을 바를 때 쓰는 넓적한 붓인 귀얄로 백토만을 얇게 바른 것이다. 회흑색 바탕에 이리저리 빠른 속도로 백토를 칠할 때 나타나는 붓 자국의 굵고 가는 질감과 속도감, 그리고 색의 대비가 특징이다. 조화나 박지, 철화장식을 하기 위해 백토를 곱게 바르던 것과 다르게 귀얄기법은 흙을 대충 바른 듯 쓱쓱 칠하거나 장식 효과를 고려한 때문인지 붓 자국이 선명하고 힘찬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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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분장문잔 및 받침
분청사기분장문잔 및 받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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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얄장식이 꾸준히 사용되는 한편, 이전에 비하여 덤벙기법으로 표면에 백토만을 곱게 씌운 분청사기의 제작량이 증가한다. 덤벙은 그릇의 굽을 잡아 거꾸로 들고 백토를 탄 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표면을 흰흙으로 얇게 씌워 장식하는 기법이다. 백토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덤벙 혹은 담금이라고 하며, 분장이라고도 부른다. 고르게 백토가 씌워지므로 언뜻 보아 조선 전기의 백자와 비슷한 시각적인 효과를 낸다. 그러나 외면만 백자와 유사해 보일 뿐 수요자들이 선호하던 백자는 아니었으며, 서서히 설 자리를 잃어갔다. 따라서 분청사기의 제작이 완전히 중단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16세기 후반에 이미 백자의 사용이 확대되고 수요가 증가하며 전국 각지의 가마에서 백자를 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분청사기는 16세기 중반을 전 후하여 제작이 중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양한 기법으로 장식한 일상용기 외에 각종 의식에 필요한 분청사기도 다수 제작되었다. 다양한 제례의식에 필요한 제기, 아기의 태를 담아 위치 좋은 곳을 선정하여 땅 속에 매장하는 데 사용하였던 태항아리, 그리고 묘 주인공의 행장을 간략하게 기록한 묘지석 등이 그것이다. 태항아리는 몸체와 뚜껑을 끈으로 단단하게 묶어 고정시킬 수 있도록 어깨에 네 개 정도의 작은 고리를 부착하였으며, 표면을 상감이나 인화, 조화와 박지기법으로 장식하였다. 이외에 묘지석은 왕실에서 장방형의 석제묘지석을 사용하는 규식이나 선례에 영향을 받아 유행하였는데, 원통, 사각기둥, 세숫대야, 위패 모양, 납작한 사각판형 등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다. 이중에서도 분청사기로 제작된 위패 모양 묘지석은 고려의 불교문화가 반영된 것으로 제례나 장례의식을 중히 여긴 유교문화의 결합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176) 전승창, 「15세기 위폐형 자기묘지와 위폐장식 고찰」, 『호암미술관 연구논문집』 4, 삼성문화재단, 1999, pp.9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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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상감원통형묘지석
분청사기상감원통형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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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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