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4 조선 전기의 도전과 위엄, 분청사기와 백자
  • 02. 왕실 백자의 제작지, 경기도 광주
  • 관요의 성격과 가마 구조
전승창

관요가 설치된 1466∼1468년부터 이설을 멈추고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에 고정된 1752년까지의 기간을 모두 합하면 약 280년이다. 여기에 기록이나 발굴에서 확인된 가마의 이설주기가 대략 10년이므로 관요는 모두 28번 정도 옮겨 설치된 셈이 되며, 다시 관요의 숫자를 이설횟수로 나누면 10년을 주기로 한 지역에 설치된 가마의 수를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 숫자는 전체의 현상을 살펴보기 위해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한 평균치임을 전제로 하는데, 10년에 대체로 8개를 전후하여 가마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상정된다. 그런데 발굴된 가마터들은 가마 벽이나 구조물, 퇴적에서 출토되는 파편의 양과 특징 등으로 보아 최소한 몇 년 이상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므로 가마는 매년 순차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일정 개수가 동시에 공존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193) 전승창, 『15∼16세기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 관요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pp.1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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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대접·잔 파편
백자대접·잔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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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가마터에는 백자의 질과 형태, 세부의 마무리가 매우 좋은 파편도 있지만 대조적으로 질과 세부의 마무리가 좋지 못한 백자가 더욱 많이 발견된다. 즉, 양질백자를 제작하던 가마와 조잡한 질을 주로 만들었던 곳으로 대별되는데, 이것은 양질백자를 제작하는 가마와 상대적으로 조질품을 만드는 여러 개의 가마가 동시에 설치되어 운영된 것을 의미한다. 가마터는 백자의 질과 세부의 특징, 그리고 갑발의 존재 여부 등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다시 말해 갑발로 백자를 제작한 가마터에서는 왕실용 백자 파편이 출토되지만, 조질백자를 만들던 가마터에서는 갑발이 발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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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강서성 경덕진 주산지구 관요지 전경
중국 강서성 경덕진 주산지구 관요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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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번천리5호 가마터 전경
광주 번천리5호 가마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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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발굴된 조선 전기의 가마 구조는 두 종류의 가마 사이에 특별한 차이가 없다. 실례로 1550년대 동 시기에 운영된 번천리 9호와 5호 가마가 있다. 번천리 9호에서는 왕실용 백자인 ‘천지현황(天地玄黃)’의 명문이 새겨진 파편과 갑발 등이 발견되고, 200여 m 떨어진 번천리 5호에서는 명문이나 갑발이 출토되지 않고 그릇을 포개어 쌓아 굽는 방법을 사용해 상대적으로 질이 좋지 못한 백자를 제작한 것으로 확인되었다.194) 이화여자대학교, 『광주 번천리 9호 조선백자요지』, 2007, pp.178∼180 및 『광주 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보고』, 1986, p.53. 이 두 가마는 관요의 설치와 운영방법, 성격을 대변하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관요는 일정 시기에 왕실용 최상질 백자를 제작하던 1∼2곳과 관청용으로 다량의 그릇을 만들던 6∼7곳이 동시에 작업하였던 것이다.

광주의 가마는 공간구성과 크기에 차이가 있지만 모두 완만한 경사면에 터널 모양으로 축조된 등요이다. 물론 일부 가마만이 발굴되었으므로 향후 전혀 다른 구조가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493년 사옹원제조 유자광이 광주의 백자 가마는 와부(臥釜)인데, 제작 과정에서 그릇이 변형되거나 잘못되는 예가 많으므로 실패율이 낮은 중국의 입부(立釜)로 대체하자고 임금에게 아뢰었던 사실이 있다.195) 『성종실록』 권77, 성종 24년 5월 18일. 그런데 발굴결과 15세기는 물론 16세기 중반에 운영된 번천리 9호와 5호 가마는 모두 와부, 즉 등요로 확인되었다. 기술 혹은 축조 재료에 원인이 있었는지 혹은 와부의 단점을 개선할 수 있었던 때문인지, 중국식 입부를 세우려던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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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번천리9호 가마터 평면도
광주 번천리9호 가마터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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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의 구조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다른 하나가 조선 후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이희경(1745∼1805)의 기록이다. 연암 박지원의 제자였던 이희경은 『설수외사』에서 “분원을 지날 때 자기 굽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모두 와요였다”고 적고 있으므로, 이들 기록을 종합하면 관요는 15세기는 물론 19세기까지도 변함없이 와요가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사이에 운영된 광주 분원리 관요발굴에서도 등요가 출토되어 기록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까지 발굴된 조선 전기의 관요는 모두 등요이며, 구조 파악이 어려운 것을 제외하고 다수가 하나의 방처럼 꾸며진 단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10∼15도 정도의 구릉이나 경사면에 앞이 낮고 뒤가 높게 축조하여 불길이 잘 빠지도록 만들었다. 가마는 터널모양으로 천장의 구조가 돔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없어 가마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길이는 26∼27m 내외이지만 차이가 있고 너비는 1∼2.2m로 운영 시기가 경과하며 뒤쪽이 약간 넓게 벌어지는 경향이 있어 가마의 아래쪽과 뒤쪽 너비의 편차가 커지기도 한다.

가마를 약간 경사지게 하고 앞쪽에 비해 뒤쪽의 폭을 좀 더 넓게 만드는 것은 가마 속에서 불길이 원활하게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만든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가마가 조금씩 변화되며 가마 중간에 2개 정도의 불기둥[停焰柱]이 설치되었는데, 불길이 한쪽으로 몰리지 않게 분산시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한 새로운 시도였다.196) 전승창, 「조선시대 백자가마의 발굴성과 검토」, 『도자고고학을 향하여』, 한국상고사학회, 2003, pp.79∼107.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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