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
  • 04. 청화 반상기를 수놓은 길상문
  • 북학파의 질타와 중국 그릇에 대한 열망
방병선

18세기 이후 서울을 생활권으로 하는 경화사족들은 정조대를 거치면서 정치와 경제, 사회 등의 면에서 더욱 크게 대두하였다. 정계와 경제계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핵심적 문벌로 학계를 주도하였다. 여기에 대청, 대왜(對倭) 무역의 확대로 조선 사회는 국제적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특히, 국제 무역의 활성화에 따라 청과 왜의 자기들도 유입되었고 이들의 양식을 모방한 조선 백자들도 제작이 시도되었다.

사상적으로는 영조 후반 이후 청조 문물과 학술, 문예의 수용을 주장하는 북학이 대두되었고 이후 고증학이 성행하면서 정통 주자학보다는 중국이나 서양의 선진적인 문물에 관심을 표명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도자 부분에도 나타나 북학파와 이용후생학파 등의 조선 백자에 대한 관심 표명과 제작기술의 문제점, 소비 관습 등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반성이 제기되었다.

먼저 대표적 북학파인 박제가(1750∼1805)는 연경사행을 통해 중국의 자기 실용과 자기 제작기술의 발전을 직접 목도하였고, 중국과 일본자기와 비교하여 조선 그릇의 제작기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도자 정책과 제도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선진기술과 정책을 소개하면서 조선도 이를 본받을 것을 주장하였다.316) 박제가, 『북학의』 내편 자. 북학파의 도자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정양모·최건, 「조선시대 후기백자의 쇠퇴요인에 관한 고찰」, 『한국현대미술의 흐름』 석남이경성선생 고희기념논총, 일지사, 1988, pp.348∼359 ; 최건, 「조선시대 후기 백자의 제문제」, 『도예연구지』 5, 한양여자전문대학 도예연구소, 1990, pp.103∼117 ; 장남원, 「조선 후기 이규경의 도자인식: 『오주연문장전산고』 의 「고금자요변증설」과 「화동도자변증설」을 중심으로」, 『미술사논단』 6, 1999, pp.205∼232 ; 방병선, 「조선 후기 도자관」, 『조선 후기 백자연구』, 일지사, 2000, pp.166∼205.

이희경(1745∼1805 ?)은 자기 사용의 보편화와 중국처럼 정교한 그릇의 생산에 관심을 둘 것을 촉구하였다.317) 朴宗綵, 『과정록』 권3. 정조의 갑기 금지령의 폐해를 지적하면서,318) 李喜經, 『雪岫外史』. 갑기를 금하거나 채화를 없애는 것이 결국은 자기의 질을 저하시킨 주 요인으로 여기고 이를 비판하였다.319) 방병선, 「초정 박제가·윤암 이희경의 도자인식」, 『미술사학연구』 238·239, 2003, pp.213∼234. 조선의 가마 구조나 성형, 채색 등은 중국과 비교할 때 너무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성형기술 역시 상하 접합에 의한 대형 항아리의 성형은 유지되지만 비대칭의 불안정한 형태에 정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불순물이 많고 유색도 균질하지 못하였다.

확대보기
분원리 가마 전경
분원리 가마 전경
팝업창 닫기

또한, 조선의 자기 소비는 서울에서도 아직 동이나 유기에 비해 활발하지 못한 것으로 지적되었다.320) 유득공, 『경도잡지』 권1, 풍속 器什條. 이에 비해 중국은 자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여 대조적인 소비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321) 홍대용, 『담헌서』 외집 燕記 권10. 또한, 중국과 비교해 우리도 분원이 설치되어 진상자기를 제작하는 막중소임을 다하고 진상 후 남은 것은 민간에 내보내는 사번의 형태를 취하여 시행하고 있으나 제도와 재료의 사용에서 몹시 낙후되었다고 비판하였다.322) 이희경, 앞의 책.

19세기 중반 고증학이 유행하면서부터는 보다 실증적인 기록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들 수 있다.323) 서유구의 생애와 사상은 유봉학, 「서유구의 학문과 농업정책론」, 『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 일지사, 1996, pp.187∼230이 참조된다. 이 책에 의하면 당시 서울 부호들이 사용하던 중국산 자기들은 대부분 완과 접시 같은 청화백자였다.324) 서유구, 『임원경제지』, 「贍用志」 권2. 또한, 중국 골동 그릇들이 선호되어 송대 가요(哥窯) 자기나 금화칠보, 금벽채를 사용한 일본의 화려한 합과 우리 관요 것을 비교하면 품질에서 우리 것은 감상할 만한 대상도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325) 앞의 책. 또한, 조선에서는 조석 반찬지기를 반상기로 부른다 하여 반상기의 정의와 칠첩에 해당하는 각기 구성을 서술하였다.326) 앞의 책.

대개 정조 이후 상차림에 있어 반상기법이 정형화됨에 따라 각양각색의 반찬과 이를 담는 그릇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반상풍조는 경제적 여유로 생긴 다채로운 음식 수요의 증대와 당시의 사치풍조와 맞물려 상류층뿐 아니라 중인들에게까지도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조선 수요층의 중국 자기에 대한 애호는 이를 모방, 제작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빙허각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중국의 단색유자기를 모방하여 청채나 철재를 가한 채색자기가 제작되었음을 기록하였다.327) 빙허각 이씨 저, 정양원 역주, 『규합총서』, 보진재, 1975, pp.170∼173. 또한, 이규경은 골동으로 꽤 조선에서 인기를 끌었던 가요문자기 등의 제작 방법을 소개하고 있어 청 자기에 대한 선호 경향이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328) 이규경, 『五洲書種』 자기류. 실례로 왕실 궁궐 안을 장식하였을 책가도 병풍에도 고급 중국 도자와 고동기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이를 완상하던 당시 지배계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329) 강관식, 「조선 후기 궁중 책가도」, 『미술자료』 66, 국립중앙박물관, 2001, pp.79∼95 ; 방병선, 「이형록의 책가문방도 팔곡병에 나타난 중국도자」, 『강좌미술사』 28, 2007, pp.209∼238.

중국 골동에 대한 관심은 경화사족인 신위(申緯, 1769∼1847)가 자신이 소장한 골동품 목록을 읊은 1820년의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중국의 역대 고동기와 문방기명에 ‘고려비색존(高麗秘色尊)’과 ‘고려오니휴병(高麗烏泥携甁)’ 등을 기록하여 눈길을 끈다.330) 손팔주 편, 『신위전집』 1, 齋中詠物三十首, 태학사, 1983, pp.460∼469 ; 이현일, 「조선 후기 古董玩賞의 유행과 紫霞詩」, 『한국학논집』 37, 2003, pp.143∼144 ; 김미경, 「19세기 조선백자에 나타난 청대 자기의 영향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또한, 19세기 후반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소장한 골동품 안에도 역시 ‘고려비색청자’와 함께 ‘서양화존(西洋畵尊)’이라는 청의 법랑채자기가 포함되어 있었다.331) 이유원, 『임하필기』 권34. 여기서 고려청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매병이나 철채상감병 등이 아닐까 추정된다. 실제 중국 골동에 대한 관심의 정도는 ‘大明宣德年製(대명선덕연제)’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화백자팔괘문투각연적이나 접시 등을 통해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는 같은 조선 청화백자이면서도 훨씬 중국 골동의 분위기를 자아내어 상품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확대보기
이형록, 문방책가도
이형록, 문방책가도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