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를 내면서
정연학

집은 인간의 삶과 생명의 지속성이 이루어지는 중심 장소로서 오래 전부터 우리에겐 하나의 소우주로 인식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집이 주거공간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집터를 선정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다지는 일, 상량의식, 그리고 성주 등의 가신을 맞이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생활하는 주거공간으로 탄생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집과 관련된 주거문화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 집을 지을 터를 살피는 일과 각기 다른 주거공간에서의 다양한 생활문화, 그리고 그 각각의 주거공간에 필요한 생활용품과 집 안 곳곳에 깃들어 있는 다양한 가신들을 섬기는 일 등으로 구분하여 집과 관련된 주거문화를 살펴보았다. 제1장에서는 전통적 취락의 입지 원리와 풍수, 제2장에서는 생활공간, 제3장에서는 가신, 제4장에서는 주생활용품 등으로 나누어 주거문화를 소개하였다.

먼저 제1장에서는 전통적인 취락의 입지원리와 풍수에 대해 살펴 보았다. 취락(聚落)이란 가옥의 집합 개념으로, 일정한 영역을 두고 적게는 가옥 몇 채에서 많게는 수만 단위 이상의 집합체로 구성된다.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의 전통 취락 중에서도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촌락 중심의전통적인 취락의 입지 원리와 풍수에 대해 살펴보았다.

보통 우리나라의 주요 취락의 입지는 취락이 형성되는 초기에 한 번 정해진 다음에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또 취락이 처음 조성될 때 당시 주민들의 자연관이나 지역관 등 자연과 인문환경이 취락의 입지 선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취락의 입지 요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취락 입지 원리가 아닌, 그 터를 처음 잡을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가치체계와 인식체계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풍수는 당시 사회를 풍미했던 자연관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계층의 지역관 혹은 가거관(可居觀)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지리조(地理條)에 제시된 수구(水口)·야세(野勢)·산형(山形)·토색(土色)·수리(水利)·조산(祖山)·조수(朝水) 등은 풍수 용어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취락 입지 조건으로도 중요시되는 배산임수의 지형, 굳은 지반, 좋은 수질, 양지바르고 탁 트인 지세 등의 개념과도 부합하는 것들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인간의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고 믿었으며, 만약 이러한 자연과 접할 수 없으면 성품이 거칠어진다고 생각해 왔다. 따라서 번잡한 세속에서 잠시 벗어나 즐겨 찾을 수 있는 곳, 즉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자연 풍경이 있는 곳은 선비에게는 학문과 수양의 터[藏修之所]가 되고 나아가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 이상향이 되기도 했다. 마을 하천이 굽이쳐 흐르는 계곡이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경치 좋은 곳을 택해 정자·서당·정사(精舍) 등을 배치한 것도 바로 이러한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만약 마땅한 장소를 확보할 수 없을 때는 마을 전면의 조용하고 전망이 좋은 곳에 정자·서당·정사 등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경제적 기반으로서의 생리(生利)와 사회적 환경으로서의 인심(人心)도 중요한 취락의 입지 원리로 작용하였다. 철저한 유교적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봉제사 접빈객(奉祭祀接賓客)’과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를 따르기 위해서는 적정 규모의 농경지와 노비 확보, 경제적 기반 마련이 중요하였다. 또한, 주변 마을과의 관계, 풍속, 교육환경, 주민들의 생활양식 등을 포함한 사회적 환경도 그에 못지않은 고려 요소가 되었다.

풍수는 죽은 사람이 묻힐 땅을 찾는 ‘음택풍수’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 만한 곳을 찾는 ‘양택풍수’로 구분한다. 양택풍수는 다시 규모와 대상에 따라 한 나라의 수도를 정하는 국도풍수, 고을과 마을의 입지를 정하는 고을풍수와 마을풍수, 절의 입지를 살피는 사찰풍수, 집터를 찾는 가옥풍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장에서는 전통적인 취락의 입지 원리를 양택풍수의 측면에서 도읍풍수와 고을풍수, 마을풍수 등으로 구분하고 몇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제2장에서는 생활공간이라는 측면에서 가옥 내의 다양한 공간이 지닌 각자의 역할과 기능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첫 번째로는 소통을 위한 매개적 공간인 마당과 마루를 살펴보았다. 집의 공간 중 마당은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매개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완충적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상류계층의 가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양반 집안인 경우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띤 마당들이 있다. 마당은 각종 만남이 이루어지는 소통의 공간이고, 일상 및 비일상의 주된 활동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곡물 건조장으로, 여름철 피서지로, 혼례와 회갑연 잔치 마당으로, 신앙공간으로 이용되었다.

마루는 집 안에서 가장 으뜸인 공간이자 동시에 신성공간이다. 대청은 손님접대를 비롯하여 각종 행사나 가사노동을 하기에 적합하여 매우 유용하였다. 옛날에는 관청을 마루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로 신성공간에서 제정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때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불렀던 것 역시 신성공간인 마루에서 제정을 주관했던 데 기인한 것이다.

마루는 가족 간의 소통뿐만 아니라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매개 역할과 더불어 무더운 여름철엔 가족들에게 시원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기도 하고 식사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등 일상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그런가 하면 관혼상제 등을 거행하는 의례공간, 성주신을 모셔두는 신앙공간 등과 같이 비일상적 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등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드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신분과 지위에 따른 위계적 공간으로서의 집을 신분에 따라 그 규모를 제한한 가사제한령, 거주자의 권위와 품위를 엿볼 수 있는 사랑채와 행랑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유교가 거대 담론으로 작용했던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덕목의 실천이야말로 인격체를 완성하기 위한 주된 요소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일상생활 가운데 유교적 도덕 이념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남녀유별 관념에 따른 주거공간의 변천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가옥의 앞쪽에 사랑방과 그에 딸린 누마루가 한 칸씩 있는 형태가 보편화되기에 이르며, 조선 중기에는 사랑채라는 별도의 독립된 건물을 구비한 방식이 서서히 자리 잡는다. 조선시대에는 ‘남녀칠세부동석’·‘남녀부동식(男女不同食)’ 등의 언설처럼 남자와 여자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을 최고의 도덕적 덕목으로 삼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유교 이념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는 조선 중기 무렵이 되면 상류계층의 가옥에서 안채와 사랑채가 점차 분화된다.

사랑채는 위락공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전통사회에서 남성들의 각종 모임이나 여흥을 위한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사랑채는 대 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기 때문에 다른 건물에 비해 화려하고 웅장한 형태를 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높은 기단과 누마루로, 사랑주인의 권위와 품위를 엿볼 수 있는 장소였다.

상류계층의 가옥에는 서민가옥과는 달리 살림채를 포함하여 여러 채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전통가옥에서 살림채란 안채와 사랑채, 별채 등을 일컬으며 나머지 건물들은 부속채로 분류된다. 주로 가축을 사육하거나 농기구를 보관하는 등 주된 생활의 보조적 기능을 위한 공간들은 가옥의 가장 바깥쪽에 배치했다. 즉, 가축과 물건을 수용하기 위한 건물이기 때문에 살림채에는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살림채가 주인의 격을 갖는 것이라면, 부속채는 주인을 모시는 종의 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부속채에는 하인들이 기거하는 행랑채도 포함된다. 따라서 부속채는 기능적 측면만이 아니라 주거 구성원의 측면에서도 살림채에 대해 종속적인 성격을 갖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행랑채를 ‘아래채’라고도 하는데, 이는 살림채보다 아래에 위치한다는 의미와 함께 아랫사람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내외(內外)란 안과 밖, 곧 남자와 여자를 뜻하는 것으로 일상생활에서는 ‘내외를 분간한다’ 혹은 ‘내외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내외분간’이란 남녀유별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남녀의 도리, 남녀의 역할, 남녀의 공간 등이 각각 구별되어 있음을 일컫는다. 반면 ‘내외하는 것’은 남녀가 유별하기 때문에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내외를 분간을 하는 일은 단지 남녀의 다름을 깨우치는 것을 의미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남녀의 다름을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내외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내외유별의 행동양식을 제도적으로 규정해 놓은 것이 바로 내외법이다.

이러한 내외법에 따라 남자들의 안채 출입 역시 엄격하게 규제하 였다. 물론 부인이 안채에 기거하고 있는 경우에는 예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러내놓고 출입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은밀한 시간에 은밀한 방문만이 허용되었을 뿐이며, 이는 밝은 대낮에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여성들의 전용 공간인 안채에는 안방과 건넌방이 있다. 이때 안방에는 주부권을 가진 여성이 기거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가장과 주부는 남녀 역할 구분에 따른 명칭으로 가장이 바깥일을 주로 행하고 주부는 집안일을 담당한다. 이런 이유로 가장을 ‘바깥주인’·‘바깥어른’·‘바깥양반’, 주부를 ‘안주인’·‘안어른’ 등으로 불러왔다.

『주자가례』에서는 임종이 가까워지면 ‘천거정침(遷居正寢)’이라고 하여 병이 깊어진 환자를 정침으로 옮기도록 명시하고 있다. 사당은 산자들의 거주공간인 생(生)의 공간과 달리 4대조 이하의 신주를 모셔두는 죽음의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조선 중기 이유태(李惟泰, 1607∼1684)의 기록을 통해 유학자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집에 대한 관념을 소개하였다.

제3장에서는 가신(家神)에 대해 살펴보았다. 가신은 집, 토지, 집안 사람들과 재물을 보호하는 신이다. 우리나라 가신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띤 사례가 적으며, ‘신’·‘왕’·‘대감’·‘대주’·‘할아버지와 할머니’ 등의 용어만이 남아 있다. 가신에게 정기적으로 천신을 하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을 타서 가정에 불행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혹은 부정기적으로 가신에게 제물을 바쳤으며, 그 해 수확한 양식을 제일 먼저 집 안의 가신에게 올렸다. 또한,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면 아무리 사소한 음식일지라도 가신에게 먼저 바친 후 먹었다. 만약 집안에 우환이 생기는 경우는 제대로 가신을 모시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신이 좌정한 장소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주가 머물러 있는 대들보나 상량에 못을 박는다든지 물건을 놓거나 성주 단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 노여움을 산다고 여겼다. 또한, 단지 안의 쌀도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데, 가정에 식량이 떨어져 그 쌀을 써야 할 때라도 반드시 빌려가는 형식을 취하였다. 업가리도 함부로 만지면 탈이 난다고 믿었고, 터주의 헌 짚가리도 깨끗한 곳이나 산에 버렸다.

가신에게 드리는 제사는 주로 새로운 곡식을 수확하는 10월 상달에 치러지고, 단지나 바가지 등에 넣어두었던 곡식을 햇곡식으로 교체하였다. 이러한 신앙행위는 정월 초하루, 보름, 칠석, 한가위 등 절기에도 이루어지고 있어, 가신신앙은 세시와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가족 생일이나 조상 제사 때 가신에게도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보아 가족주의의 혈연강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신에게 바쳤던 곡식은 가족끼리만 나눠 먹는 것도 그러한 이유를 반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가신의 신체(神體)로 여긴 것들의 유형을 구분하면, 동물·식물·기물·복식·그림·사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동물로 등장하는 신체로는 주로 업과 관련된 뱀(긴업)·족제비·두꺼비 등이 포함되고, 식물로는 쌀과 보리·콩·미역·짚 주저리·엄나무·솔가지, 기물로는 바가지·단지·고리·포와 한지·돌·돈, 복식으로는 괘자·모자·무복, 그림으로는 문신과 세화, 사람으로는 인업 등이 있다.

가신의 신체로 삼는 대상 중에는 곡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괘자나 벙거지를 고리짝에 담아 신체로 삼는 점에 근간을 두고 가신신앙이 곡령신앙이나 애니미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하였다. 신체를 크게 용기류와 한지류로 구분하기도 하였고, 바가지형 신체가 단지 같은 용기류 신체보다 더 고전적이라고 보았다. 김알지를 탄생시킨 황금궤짝을 조상단지의 기원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 필자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가신의 신체로 보지 않으며,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첫째, 가신에 대한 명칭은 신·왕·대감·장군·할아버지·할머니 등 인격성을 부여하면서도 정작 신체의 형태에는 인격이 없다. 결국 신격이라고 부르는 여러 유형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자 양식이고, 폐백이자 옷이다. 신에게 바친 물건 그 자체에도 영험함을 부여함으로써 함부로 이동시키거나 만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대감이라고 모신 무복은 신과 무당을 연결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지 신격 자체는 아니며, 단지나 바가지에 들어 있는 쌀과 콩 등의 곡물도 신에게 바치는 양식일 뿐이다. 조왕과 칠성신에게 바치는 물도 정화수이지 신체로 보기에는 곤란하다. 삼신에게 바치는 쌀과 미역도 마찬가지다.

둘째, 신체 표시 없이 관념적으로 모시는 것을 ‘건궁’이라고 하는데, ‘건궁터주’·‘건궁조왕’이라고 해서 흔히 ‘건궁’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런데 ‘건궁성주’라고 해도 가정에서는 성주에게 축원을 하며, 성주는 보이지 않는 신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신의 그림이나 신상 없이 가신에게 고사를 지내는 모든 행위는 ‘건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보이지 않는 신에게 쌀 등의 양식과 천이나 옷 같은 폐백을 드리는 것이다.

가신을 대할 때는 정성을 다해 모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령들이 삐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신령의 태도도 인간이 하기 나름인 것이다. 만일 신에게 정성을 보이지 않으면 그 가신이 집안을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제물을 바쳤던 것이다. 폐백과 음식을 바친 장소도 신이 봉안되어 있는 신성한 영역이라고 믿었다.

셋째, 사찰의 조왕은 그림이나 글씨로 신상(神像)을 표현하는 반면 일반 민가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둘 사이에 모순점이 있다. 사찰 의 조왕신은 민가의 가신과 같은 기능을 하며, 사찰에서는 조왕에게 새벽 4시에 청수를 바치고, 오전 10시에 공양을 한다. 민가에서 아침 일찍 조왕단지의 물을 바꾸어는 것은 청수를 바치는 행위이며, 아침에 먼저 푼 밥 한 공기를 부뚜막 한쪽에 두었다가 먹는 것도 공양을 하는 셈이다.

넷째, 우리나라에서도 신상 그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용설화에 신라인들이 역신이 집 안을 넘보지 못하도록 처용의 화상을 걸었다. 무당들은 신당에 몸주신과 그 외에 자신이 모시는 신의 형상을 그림이나 신상, 글씨, 종이를 오려 전발로 모신다. 부군당이나 성황당의 신들도 그림이나 신상, 글씨 등으로 표현하는데 유독 가신들만 인간을 닮은 신상의 그림 등이 없는 것은 ‘건궁’인 셈이다.

다섯째, 대주를 상징하는 성주를 시작으로 조상, 삼신, 조왕, 터주, 업, 철륭, 우물신, 칠성신, 우마신, 측신, 문신 등이 나름의 질서 체제를 유지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삼신이 성주나 조령보다 우위에 있는 곳도 있고, 조왕을 성주나 삼신보다 상위의 신격으로 여기는 곳도 있어서 가신의 위계질서가 정연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주·터주·제석·조령·터주 등은 남성, 조왕·측신·삼신 등은 여성으로 성별을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령의 경우 남성보다도 여성인 경우가 많다. 경기도 화성 지역의 무당이 부르는 성주굿에서는 조왕이 할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로 등장하기도 한다. 사찰의 조왕은 아예 남성이다. 조왕이 남신으로 등장하는 것은 부권 중심의 유교문화의 영향이며, 애초에는 여성신이었으나 점차 남성신으로 대체되었거나 혹은 남녀 신이 공존하게 되었을 것이라고도 하나, 반대로 원래부터 조왕신은 남성이었으나 부엌이 여성들의 공간으로 인식되면서 신체의 개념도 바뀐 것이다. 측신도 성별에 대해 대부분 여신임을 강조하나, 뒷간신으로 ‘후 제(后帝)’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을 들어 애초에 남신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불교, 유교, 기독교 등 외래 종교가 우리나라 종교의 주축을 이루는 현시점에서 원시적 종교 형태인 가신신앙(家神信仰)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점은 종교의 또 다른 생명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주부들이 폐쇄적인 공간인 ‘안채’를 중심으로 가신을 섬겼기 때문이다. 안채는 남성들이 드나들 수 없는 여성들만의 공간이고, 특히 외지인이 들여다볼 수 없는 ‘금남(禁男)’의 공간이다. 집을 매매할 때도 안채는 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따라서 안채를 중심으로 한 가신신앙은 오랜 전통성을 유지하고 존속할 수 있었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원시 형태를 비교적 잘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과 관련된 쌀, 천, 짚, 물, 동전 등이 그러한 예이다.

한국의 가신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처럼 집의 일정한 영역에서 각각의 기능을 수행한다. 성주는 집의 중심이 되는 마루에서 집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조왕은 부엌에서 가족의 건강을, 터주는 집 뒤꼍에서 집터를 보호하고, 문신은 대문에서 잡귀나 액운을 막는다. 그리고 성주를 비롯한 건물 내의 가신들은 건물 밖에 좌정한 신들보다 그 지위를 높게 인정했으며 고사 순서나 시루의 크기도 달리 하였다. 사찰의 조왕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가신의 신상(神像)은 보이지 않는다. 신은 본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인데, 인간이 후에 신상을 만들어 공경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우리나라 가신의 형태는 종교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4장에서는 주생활용품을 다루었다. 필자는 주거생활에서 쓰였던 기물들은 장소와 역할에 따라, 또는 사용자와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서실의 학문을 위한 기물, 제(祭)를 위한 기물, 식생활(食生活) 관련 기물, 의복을 위한 기물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생활용품은 기본적인 기물이 있고, 효율성과 편 리성 혹은 보존 목적을 위한 기물이 따로 있으며, 크기도 아주 작은 형태에서부터 큰 형태까지 다양하게 주거공간에서 쓰였음을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欌)·뒤주·관복장·경(거울과 빗접), 조명기물 용구(등기구) 등의 일상용품과 예와 관련되는 생활용품으로 제례와 소품, 제사를 위한 가구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서(書)와 관계된 용품으로는 문방기물·책장과 탁자·함 등을, 옷과 관계된 기물로는 장(欌)과 가구를, 먹는 것과 관련해서는 찬장·탁자·뒤주·소반을 중심으로, 궤(櫃)와 관련해서는 앞닫이 궤와 윗닫이 궤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궤의 균형과 짜임, 지역별 분류와 장석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2010년 11월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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