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2 생활공간
  • 03. 내외관념에 따른 공간의 분리
  • 남녀칠세부동석, 거주 영역을 구분하다
김미영

내외(內外)란 안과 밖, 곧 남자와 여자를 뜻하는 것으로 일상생활에서는 ‘내외를 분간한다.’ 혹은 ‘내외한다.’는 말로 표현된다. ‘내외분간’이란 남녀유별을 의미하는데, 이를테면 남녀의 도리, 남녀의 역할, 남녀의 공간 등이 각각 구별되어 있음을 일컫는다. 반면 ‘내외하는 것’은 남녀가 유별하기 때문에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내외분간을 하는 일은 남녀의 다름을 깨우치는 것이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남녀의 다름을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내외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외유별의 행동양식을 제도적으로 규정해 놓은 것을 내외법(內外法)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내외법은 여성의 상면(相面)제한과 외출금지로 대별된다. 내외법에 관한 문제는 일찍이 조선 초기부터 거론되고 있는데, 『태조실록』에 “옛날(중국)에는 이미 출가한 자는 부모가 돌아가신 후 친정에 다니러 가는 풍습이 없었으므로 근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려[前朝]의 풍속이 퇴폐하여 사대부의 처가 너 도나도 친정을 찾아가고 조금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 식자(識者)는 이를 수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앞으로 문무양반 부녀는 친형제자매·친백숙구이(親伯叔舅姨, 백부모와 숙부모, 고모, 외숙부, 이모) 이외에 상면을 불허하여 풍속을 바로 잡아주소서.”44)『태조실록』 권2, 태조 1년 9월 기해.라는 대사헌 남재(南在)가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이 실려 있다.

이는 부모형제와 3촌에 해당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남녀가 대면하는 것을 금지시키라는 말이다. 여성들의 외출도 마찬가지다. 『경국대전』의 「금제조(禁制條)」에 “사족(士族)의 부녀가 산간이나 물가에서 놀이잔치를 하거나 야제(野祭), 산천이나 성황의 제사를 직접 지낸 자는 곤장 백 대에 처한다.”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

내외의 원칙은 가족 내에서도 적용되었다. 『소학』에 “남자는 집안일에 대해서는 하는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바깥일에 대해서는 하는 일을 말하지 않는다. 제사나 상사(喪事)가 아니면 남녀가 서로 그릇을 주고받지 않는다. 서로 주고받을 때는 여자는 광주리에 받는다. 광주리가 없으면 남자가 꿇어앉아 그릇을 땅에 놓은 다음 여자도 꿇어앉아서 가져간다.”라고 적혀 있다. 물건을 광주리로 받고, 광주리가 없으면 일단 땅에 놓은 후에 이를 다시 줍는다는 말이다. 이는 남녀의 신체적 접촉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비록 이들 사이에 물건이 놓여 있더라도 남자의 손과 여자의 손이 동시에 앞으로 나가게 되면 닿을 염려가 있으니, 이를 미리 방지하자는 생각이다.

이들 관념에 기초하여 주거공간에서도 남녀의 영역 구분을 철저히 따랐다. 특히, 『예기』에 “예는 부부간에 서로 삼가는 데서 시작하니, 집을 지을 때는 내외를 구분하여 남자는 바깥에 거처하고 여자는 안쪽에 거처하되,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남자는 내당에 들지 아니하고 여자는 밖에 나가지 아니한다.”라는 대목이 있듯이, 반가에서는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와 남성들의 공간인 사랑채를 철저히 구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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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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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집의 경우 남자아이는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함께 안방에서 지내다가 젖을 떼면 건넌방의 할머니와 거처하게 된다. 그러면서 할머니에게서 버선 신는 법이나 대님 매는 법 등과 같이 신변을 정리하는 일상의 교육을 받는다. 그런 다음 6, 7세가 되면 안채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할아버지가 거처하는 큰사랑방으로 옮겨간다. 대략 7세 전후는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연령이라고 여겨,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언설도 이에 기인한다. 이때부터 성별 구분이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의미이다.

대개 사랑채에는 온돌방 2, 3칸과 대청이 구비되어 있는데, 큰 사랑방에는 아버지가 거처를 하고 작은 사랑방은 아들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다. 그런데 “조손겸상은 있어도 부자겸상은 없다.”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아버지와 아들이 한방을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지낸다. 그리하여 손자는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으면서 글공부를 시작하는가 하면, 일상의 예절도 하나둘씩 익혀 나간다. 일상의 교육 가운데서 가장 주된 것은 ‘쇄소응대(灑掃應待)’, 곧 물 뿌리고 빗질을 하는 일인데, 아침에 눈을 뜨면 이불을 개거나 방 청소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잠자리까지 봐드리는 일을 한다. 양반집의 경우 하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이들은 위급한 상황 이외에는 방안 출입을 좀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시중은 전적으로 손자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사랑채는 평소 여자들이 출입하지 않는 남자들의 전용 공간이다. 이는 부인이나 며느리의 경우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사랑채에 관련된 일은 전적으로 남자들에게 맡겨지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었는데, 양반집의 여성 중에는 숨을 거두는 날까지 사랑방 출입을 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안동 지역 광산 김씨 유일재 노종부45)안동시 와룡면 가구동 김후웅(85세).는 젊은 시절 종손을 먼저 보내고 홀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나, 시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안채는 노종부가 지키고 사랑채에는 시아버지가 기거하는 그야말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만 하더라도 집안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시중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세상이 바뀐 탓에 집안사람들조차 발길이 뜸해지게 되었다. 가장 곤란했던 것은 시아버지께 밥상을 갖다드리고 이런저런 시중을 들기 위해 사랑방을 출입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였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전통예법에 익숙해져 있는 두 사람 모두 허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밥상을 차려 사랑방 툇마루에 올려두고는 “아버님! 진지 드시소”라는 말을 남기고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면 시아버지가 직접 밥상을 들여 식사를 하는가 하면, 시아버지 역시 빨랫감 등이 있을 때 툇마루에 슬그머니 내놓는 방식으로 난 감한 상황을 그럭저럭 피해왔다고 한다.

남자들의 안채 출입 역시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물론 부인이 안방에 기거하고 있는 경우에는 예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러내 놓고 출입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은밀한 시간에 은밀한 방문만이 허용되었을 뿐, 밝은 대낮에는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안동 지역 의성 김씨 지촌(芝村) 종손46)안동시 임동면 지례동 김구직(89세). 역시 어린 시절을 회고하기를, 추운 겨울철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외출을 했다가 예정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랑방에 미처 불을 넣어두지 않았을 경우가 간혹 있다고 한다. 그런데 차디찬 냉골인 사랑방에서 식사를 할 수 없기에 하는 수 없이 안방에 발을 들여놓는데, 이때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갓을 쓴 채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 다음 종손이 아랫목을 차지하고 중간에 아들과 손자들, 그리고 윗목에 여자들이 각각 앉아서 식사를 하였다.

가족이나 친족과 달리 외부 남성과 여성은 대면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남성들의 전용 공간인 사랑채를 대문과 가까운 곳에 배치했으며, 그 뒤편으로 안채를 세움으로써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차단하였다. 아울러 안채 앞에 중문을 설치하여 사랑마당에 들어선 방문객이 안채를 쉽게 엿볼 수 없도록 했는데, 이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중문 앞에 내외담을 쌓아 이중삼중으로 보호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뿐만 아니라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았을 때 중문 너머가 보이지 않도록 흙벽이나 판자 등으로 만든 내외벽이란 것을 설치하기도 했다.

한편, 여성 방문객들이 솟을대문을 거쳐 안채로 들어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안채의 옆담이나 뒷담에 만들어둔 작은 문을 통해 출입하곤 했다. 집 안의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다. 부엌 옆에 나 있는 작은 문을 통해 뒤뜰의 채소밭에 드나들었다. 특히, 화장실 사용에서는 남녀구별을 더욱 엄격히 했는데, 여성들은 안채 옆에 있는 내측(內廁)을 사용했으며 남성들은 사랑채에 딸려 있는 외측 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상류계층의 가옥은 실용적 측면보다는 내외관념에 따른 남녀유별을 중시하는 유교이념에 근거하여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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