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3 가신
  • 02. 가신의 종류
  • 가신의 종류
  • 8. 문신
정연학

문신(門神)은 절의 사천왕과 마찬가지로 대문으로 들어가는 잡귀나 부정을 막는 문에 깃든 신이다. 그 외형(外形)은 중국에서는 주로 그림이나 글로 묘사되지만, 우리의 경우 민간에 구전되는 경우가 많다. 제주도에서는 육지 대문에 해당하는 정살과 정주목에 있는 신을 ‘남선비’라 부르고,137)『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제주도편, 문화재관리국, 1974, p.101. 경기·충청도 지역에서는 대문을 지키는 신을 ‘남해대장군’이라고 일컫는다. 이는 대문이 흔히 남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장군이라는 호칭에서 문신이 무관(武 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의 문신에서도 비슷하다.

무속에서 무당들은 출입문의 신을 ‘수문(守門)대감’이라고 한다. 과거 문헌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처럼 문신을 붙인 사례가 보이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민간에서 대문신은 실제 형상이 없는 ‘건궁’으로 섬기고 있다. 신(神)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문신이 중국의 문신보다 원형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의 가가호호 대문에는 갑옷을 입은 장군들이 칼이나 도끼를 들고 위엄 있는 얼굴로 서로 바라보는 문신 그림이 붙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문신을 붙이는 풍습은 볼 수 없으나 문헌들을 통해 과거 대문에 문신을 붙이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서는 문신으로 신도(神荼), 수성선녀(壽星仙女), 직일장군(直日將軍), 귀두(鬼頭) 등을 붙였으며,138)『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서울편, 문화재관리국, 1979, p.73.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무속고』에서는 궁중에서 신도(神荼), 울루(鬱壘), 위지(尉遲)와 진숙보(秦叔寶) 그리고 갈(葛), 주(周) 장군을 문신(門神)으로 삼았으며, 세화(歲畵)로 수성선녀(壽星仙女), 직일장군(直日將軍), 종규(鐘馗), 귀두(鬼頭) 등을 대문에 붙였음을 적고 있다.139)이재곤 역, 앞의 책, 1976, p.57.

조선시대 문집에서도 문신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면암집(勉庵集)』에는 제석날 대문 가운데 그림 대신에 ‘신도울루(神荼鬱壘)’의 4자(字)를 크게 써서 대문에 붙이기도 하였다고 적고 있다.140)『면암집』 제석, “闕內及諸宮家 卿相家閭巷 以大壯紙 畵金甲將軍 除夕貼大中門 卽古鬱壘符遺意也.” 경상북도 안동 퇴계종택 중문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문신(門神)에 대해 시로 표현하고 있다.

단청으로 그린 부적 울루라고 불리우니 / 符貼丹靑鬱壘名

황금 갑옷 입은 장부 무섭고 사납네 / 丈夫金甲貌獰猙

일 년 내내 문 지키는 그대의 덕택으로 / 終年賴爾持門力

요망한 귀신들 감히 들어오지 못하네 / 百種妖魔不敢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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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위지와 진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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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와 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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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에게 고사 지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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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고사(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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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장군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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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에 그린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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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와 장비 문신
관우와 장비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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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풍속은 중국에도 있는데, 대문에 글씨를 새기는 것은 그림을 대신한 것이므로 그림 이후에 생긴 것이다. 이는 호랑이 그림 대신 ‘虎’자를 써서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기록한 『세시기』에는 대문 내외에 다른 문신의 그림을 붙였음을 적고 있다. 대문 밖에는 갑옷을 입은 무사(甲士)가 마주 보게 붙이는데, 한 명은 왕을 호위하는 위장(衛將)들이 많이 쓰는 철로 만든 복두와 금비늘이 달린 갑옷에 대쪽처럼 생긴 금간(金簡)을 든 당나라 장군 진숙보(秦叔寶)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른 한 명은 구리로 만든 투구(兜䥐)와 금비늘이 달린 갑옷에 도끼[宣化斧]를 든 울지공(尉遲恭)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문 안에는 재상(宰相)이 마주 보고 있는데, 모두 검정색 복두를 썼으며 대홍색 포(袍)를 입고 각각 꽃을 꽂은 위징(魏徵)과 저수량(褚遂良)이라고 적고 있다.141)趙秀三, 『秋齋集』,『歲時記』, “門貼神影 外則甲士一對 一 鐵幞頭 金鱗甲 植金簡 云唐將秦叔寶 一 銅兜䥐 金鱗甲 植宣化斧 云尉遲恭 內則宰相一對 皆烏幞頭 大紅袍 各簪花 云魏徵褚遂良.”

위의 기록에 따르면 대문에 무신(武神)을 주로 붙였음을 알 수 있는데, 중국의 문신 유형의 변천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중국 초기의 문신은 무관이었으나 후에 문신(文臣)으로 점차 바뀌어가고, 근래에는 벽사보다는 길상과 복의 의미를 가진 아동(兒童)이 문에 자주 등장한다. 조선시대 이덕무의 기록에서는 문신 가운데는 의장(儀仗) 또는 지휘 용도로 사용하는 깃발을 들고 있는 신선을 묘사한 글이 있다.142)李德懋, 『歲時雜詠』 正月, “最憐對對仙官像 幢節高擎儼守閽.”

18세기에도 서울 사람들은 대문에 위징이나 울지경덕(尉遲敬德) 등의 문신을 붙였다. 위징은 꽃 모자를 쓰고, 울지경덕은 사자 띠를 둘렀다고 표현하고 있다.143)李德懋, 『歲時雜詠』 正月, “京人尙門畫 彩色競新奇 花帽知魏徵 獅帶是尉遲.” 위징이 꽃 모자를 둘렀다는 것은 문관을, 을지경덕이 사자 띠를 둘렀다는 것은 장군을 의미한다.

『해동죽지』에도 울지공(尉遲恭)과 진숙보(陳叔甫) 등 문신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 문신은 옛날 궁중에서 두 신장의 모습을 그려 내외 친척과 각 궁에 나눠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동지에 붙이는데 ‘문비’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144)『해동죽지』 門神符, “舊俗 自大內 畵兩神將之像 頒于戚里各宮 或云此是尉遲恭陳叔甫之像 冬至日 貼于大門 名之曰 門婢.” 또한, 금갑옷과 마귀를 물리치는 도끼[斧鉞]와 절(節)을 들고 있는 이가 신도(神荼)와 울루(鬱壘)임을 표현하고 있다.145)『해동죽지』 門神符, “一雙金甲降魔斧 知是神荼鬱壘圖.”

우리나라 최초의 문신은 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인들이 처용의 그림을 벽사의 의미로 문에 붙였음을 적고 있다.146)『삼국유사』 권2, 기이2, “國人門帖 處容之形 以辟邪進慶.” 이 같은 기록이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의 풍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147)『慵齋叢話』 권2, “淸晨附畵物於門戶窓扉. 如處容角鬼鍾. 頭官人介胃將軍. 擎珍寶婦人畵鷄畵虎之類也.” 그러던 것이 도교의 유입과 시대적 변천에 따라 문신으로서의 위용보다는 주술적 성향이 강조된 부적으로 간주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용재총화』·『동국세시기』·『열양세시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처용(處容)은 직일장군(直日神將), 위지공(慰遲恭), 진숙보(秦叔寶), 귀두(鬼頭), 종규(鍾馗), 각귀(角鬼), 위정공(魏鄭公) 등과 함께 문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처용(處容)을 제외하고 다른 신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신이다. 이능화는 『조선무속고』에서 이들 풍속이 고려 중엽 예종 때 도교와 함께 유입되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처용이 문신이 된 유래는 『삼국유사』에 보인다.148)『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망해사 조. 신라 제35대 헌강왕(875∼886) 때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복한 역신(疫神)이,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인 집에는 돌림병이 들어가지 않도록 막겠다고 맹세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연희에서 보이는 처용탈과 처용을 나타난 개운포(開雲蒲, 현재의 울산)라는 지역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처용을 서역에서 온 외국인으로 보고 있다. 처용의 형상과 비슷한 토용이 신라 무덤에서 발견되고, 당시 개운포가 신라 무역의 중심항으로서 많은 외국인들이 왕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처용이 외래인이든 아니든 오랜 기간 동안 우리나라 문신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편, 김학주는 처용과 종규의 발생설화와 문신의 성격에 공통점이 있다는 점을 들어 상호관련성을 제시하였고, 처용이라는 말 자체도 종규로부터 나왔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149)金學主, 「종규의 연변과 처용」, 『아세아연구』 4, 고려대학교, 1965, pp.137∼138. 그러나 성현의 『용재총화』에 처용과 종규가 동시에 등장하고, 인물의 생김새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 성현은 처용의 생김새와 유래, 기 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처용은 사람도 귀신도 신선도 아닌 시뻘겋고 풍만한 얼굴에 하얗게 성긴 이, 솔개 어깨에 반쯤 걸친 청운포(靑雲包)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150)成俔, 『虛白堂集』, 「除夕」. 또한, 처용의 얼굴을 붙이는 풍속은 신라 때부터이며, 사악한 요괴를 물리치기 위해 정월에 붙인다고 묘사하고 있다.

한편, 중국의 문신으로는 신도(神荼)와 울루(鬱壘), 진경(秦瓊)과 위지공(尉遲恭)이 대표적이다. 신도와 울루는 중국 최초의 문신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정귀(訂鬼)편에서 『산해경(山海經)』을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산해경』은 중국 최초의 지리 및 신화전설을 기록한 책으로 대략 전국시대 초기의 서적이다. 이들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중국에서 신도와 울루는 전국시대에 이미 존재한 문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도와 울루는 도삭산(度朔山)의 신선으로 악신을 갈대 줄로 포박하여 호랑이에게 먹이는 역할을 한다. 민간에서 신도와 울루의 그림이나 글씨를 써서 대문에 붙인 것은 이러한 기록에서 기인한 것이다.

동한 때 응소(應邵)의 『풍속통의(風俗通意)』시전(祀典)에는 민간에서 도인(桃人), 갈대, 호랑이 그림 외에도 지속적으로 신도와 울루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 풍속에 대해서 적고 있다. 신도와 울루의 문신은 수나라 때도 성행하였으며,151)『彔異志』, “侯白, 隨人, 性輕多戲言, 嘗唾壁誤中神荼像, 人因責之. 應曰, 侯白兩足墜地, 雙眼覰天, 太平太地, 步履安然, 此皆符耳, 安敢望侯 白哉.” 『유설(類說)』 권6과 『세시광기(歲時廣記)』 권5에서는 『형초세시기』를 인용하여 민간에서 1월 1일 신도와 울루를 문에 그리고, 그들을 문신으로 섬겼음을 언급하고 있다. 당나라 때 『삼교원류수신대전(三敎源流搜神大全)』 권4에서도 복숭아나무 판에 신도와 울루의 그림을 그린다고 적고 있다.

진경(秦瓊, ?∼638)과 위지공(尉遲恭, 585∼638)은 중국의 대표적인 문신이다. 이들은 당 태종 시기의 인물이며, 명나라 만력(1573∼1619) 기간에 쓴 『전상증보삼교수신신대전(全相增補三敎搜神新大全)』 권7에 문신이 된 유래를 적고 있다. 이것을 통해 진경과 위지공은 원나라 와 명나라 사이에 문신으로 자리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 때에는 화본과 희곡이 널리 펴져 사람들이 자연스레 진경과 위지공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에 역사적인 인물이 문신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데 『전상증보삼교수신신대전』에서 위지공의 성을 호(胡)로 표기하고 있다.

진경은 자는 숙보(叔寶)이고 산동성 역성현(歷城縣) 사람이다. 수나라 말기에 이세민(李世民)을 도와 당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당 태종은 그를 좌무위대장군(左武圍大將軍)에 임명하였다. 죽은 뒤에는 호국공(胡國公)으로 개봉되고 능연각(凌煙閣)에 초상이 모셔졌다. 진경의 이름은 장회(章回)의 소설 『설당연의(說唐演意)』를 통해 민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위지공과 더불어 당 태종의 충실한 신하였다.

위지공은 자는 경덕(敬德)이고 산서성 삭주(朔州) 사람이다. 진경과 함께 이세민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그는 경주도행군총관(涇州道行軍總管), 양주도독(襄州都督) 등의 관직을 거친 후에 악국공(卾國公)으로 봉해진다. 죽은 뒤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들이 문신이 된 유래담이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당 태종이 궁궐에 귀신들이 나타나 시끄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려워서 이 사실을 신들에게 알리자 진경과 위지공이 함께 문을 지킬 것을 자청하였다. 그 이후 궁궐에는 아무 일이 없어 태종을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장군이 밤에 잠을 자지 않는지라 태종은 화공(畵工)에게 두 사람을 그리게 하였는데, 그들은 손에는 도끼를 들고 허리에 활과 화살을 차고 얼굴은 분노한 모습이다. 이 그림을 궁궐 문 좌우에 붙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따랐고 문신이 되었다.152)『全相增補三敎搜神新大全』, “門神卽唐之秦叔寶 胡敬德二將軍也. 按傳唐太宗不豫 寢門外抛磚弄瓦 鬼魅呼號 … 太宗懼之 以告群臣 秦叔寶出班奏曰 臣平生殺人如剖瓜 … 愿同胡敬德戎裝立門以伺. 太宗准其奏 夜果無驚 太宗嘉之 謂二人守夜無眠. 太宗命畵工圖二人之圖像 全裝手執玉斧 腰帶鞭鐗弓箭 … 懸于宮掖之左右門 邪祟以息 後世沿襲 遂永爲門神.”

진경과 위지공의 문신 그림을 보면, 둘 다 갑옷을 입고 있고 허리 에는 활과 화살을 차고 있으며, 등에는 깃발을 꽂은 무장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진경은 얼굴의 홍색이면서 표정이 선량한 반면, 위지공의 얼굴은 흑색이면서 위엄 있고 무서운 형상을 하였다. 또한, 진경은 칼날이 없는 쌍칼을 들고 있고, 위지공은 채찍과 같은 쇠에 마디가 있는 ‘쇠도리깨’를 양손에 들고 있다. 말을 탄 두 장군의 모습도 보이는데, 한 손에는 무기 대신 보물이 든 옥쟁반을 들고 있어 문신은 물론 재물신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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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 북촌댁
안동 하회 북촌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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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과 위지공은 우리나라 문헌에 많이 등장하며, 안동 하회마을 북촌댁에는 진숙보와 호경덕의 세화를 소장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정조, 순조 때 예조·호조 참판을 지낸 류이좌(柳台佐, 1763∼1837)가 왕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세화는 중국의 것과 마찬가지로 인물의 그림 형상이 같다. 이것은 중국의 세화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재총화』에서 언급한 여러 대문 그림 가운데 개갑장군,153)“除夜前日 … 淸晨附畵物於門戶窓扉 如處容角鬼鐘馗 幞頭官人介冑將軍 擎珍寶婦人畵鷄畵虎之類也.” 『추재집(秋齋集)』154)趙秀三, 『秋齋集』 卷8, 『歲時記』 元朝, “門貼神影外則甲士一對一鐵幞頭金鱗甲植金簡云唐將秦叔寶一銅 鍪金鱗甲植宣花斧云蔚遲恭.”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경도잡지(京都雜誌)』,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금 갑장군(金甲將軍)은 바로 진경과 위지공을 가리킨다. 진경과 위지공의 모습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추재집(秋齋集)』에는 진숙보는 철복두에 금비늘 갑옷을 입고 금간(金簡)을 들고 있고, 위지공은 투구에 금비늘 갑옷을 입고 꽃으로 장식한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두 장군이 사자 띠를 두르고 있다는 세밀한 관찰력을 보여주기도 하는데,155)『靑莊館全書』 卷2, 「歲時雜詠」, “嬰處詩稿, 獅帶是蔚遲.” 사자나 호랑이의 띠는 용감한 장군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무덤을 호위하는 장군 석상의 허리띠에 호랑이 모양이 장식된 것도 그 때문이다.

『경도잡지』를 비롯한 『동국세시기』에서는 황금 갑옷의 두 장군의 길이가 한 길이 넘었고, 한 장군은 도끼를 한 장군은 절(節)을 들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156)柳得恭, 『京都雜志』 卷2, 「歲時」元日條, “又金甲二將軍像 長一丈持斧一持節 提于宮門兩扇曰門排.” ; 洪錫謨, 『東國歲時記』, “又畵進金甲二將軍 像長丈與 一持斧 一持節 揭于闕門兩扇 名曰門排.” 그 길이가 한 길이 넘은 것은 문짝 크기 정도의 장군 그림을 붙였기 때문이다.

한편, 몽골 복드칸 궁전은 몽골 혁명(1921) 전 제8대 마지막 생불인 복드칸의 겨울 궁전으로 중문에도 진경과 위지공의 모습이 보이는 것을 보면 대문 신앙이 몽골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종규도 문신으로 등장한다. 종규는 자가 정남(正南)이고 섬서성 종남산(終南山) 지역의 수재였으나, 그 생김새가 추악해 사람들이 무서워하였다. 또한, 종규는 과거에 장원하였으나 황제가 보니 인물이 흉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를 내몰았다. 종규는 이를 비관해 혀를 깨물고 자살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후회하여 그를 ‘구마대신(驅魔大神)’으로 봉했다. 종규의 이름은 당나라 때 사전인 『절운(切韻)』에 이미 보인다. 『북사(北史)』에도 북조시대 때 본명이 종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가 ‘벽사(僻邪)’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 종규에 대한 전설이 일반인에게 보편적으로 퍼져 종규라는 이름과 기능을 쓰게 된 것이다.

송나라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 권3에서 『사물기원』을 인 용해서 말하기를 “당 현종이 병을 얻은 후 꿈에 붉은 옷을 입은 자가 한 쪽은 신을 신고, 한쪽 발은 맨발이며, 허리에 신발 하나를 매달았다. 코는 소 모양으로서 양귀비의 향주머니와 명황의 옥피리를 훔쳐가서 소리를 지르니 종규가 나타나 그를 잡았다. 종규의 모양은 찢어진 모자에 푸른색 옷을 입었고, 붉은 띠를 둘렀다. 종규는 과거에 떨어진 후 계단에 머리를 박아 죽었는데, 꿈에서 깨어난 왕은 병이 치료되었고, 오도자를 불러 그림을 그렸는데 정말 똑같이 그렸다”고 한다.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 권14에도 종규 그림을 문에 걸었음을 기록하고 있고, 청나라 때 소설인 『종규참귀전(鍾馗斬鬼傳)』과 『당종규평귀전(唐鍾馗平鬼傳)』에서는 종규가 문신이 된 시점이 당 덕종(德宗)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북송 신종(神宗) 때는 궁궐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종규 그림을 인쇄하여 제석 때 신하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157)沈括(宋) 『補筆談』 卷2, 「異事」.

『평귀전(平鬼傳)』에는 신도가 박쥐로 변하고 울루가 보검이 되어 종규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 책 16회에는 “정월 1월 1일에 집마다 종규의 신상을 그리는데 눈은 박쥐를 바라보고 손은 보검을 들고 있다. 그 그림을 중당(中堂)에 걸어두고 문에 신도와 울루의 이름을 쓴다.”고 적고 있다.

송나라 때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권10에는 12월에는 종규의 그림이 목각 판화로 찍혀서 민간에 나돌았음을 적고 있다. 화가가 문신을 그리던 것에서 판화의 발전으로 민간에게까지 문신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동경몽화록』 권10 제석에는 종규가 궁중 나희에 등장하였음을 적고 있다.

한편, 민간에 보이는 종규의 그림은 붉은 얼굴에 납작한 코, 덥수룩한 수염, 홍포를 입고 한 손에 칼을 들고 박쥐를 보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요괴를 바 라보고 있는 그림도 보이는데 이는 금방이라도 악귀를 잡아먹을 태세다. 종규 그림에 박쥐가 등장하는 것은 복을 상징하는 박쥐가 늦게 찾아온 것에 대해 질책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158)김윤정, 「조선 후기 세화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p.57.

우리나라에서도 종규는 문신으로 등장하며,159)정병모, 「民畵와 민간년화」, 『강좌 미술사』 7, 1995. 그 전래 시기를 신라와 고려시대로 보기도 한다.160)김상엽, 「金德成의 ‘鐘馗도’」, 『東洋古典硏究』 3, 東洋古典學會, 1994. 우리나라 종규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김덕성의 그림과 간송미술관의 작자 미상 그림 등이 있다. 이들 그림은 수묵화로서 문신 그림이 채색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문신을 그린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161)김윤정, 앞의 글, pp.58∼59.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작자 미상 <종규도>는 종규상의 전형을 하고 있으며, 채색화이면서 크기도 알맞아 문신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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