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1 음악의 근원
  • 03. 의례와 상징
  • 의례의 특성
송지원

의례란 ‘정형성’과 ‘반복성’, 혹은 고정성(fixity)과 주기성(periodicity)을 그 특징으로 하는 정형화된 행동(stylized action)체계이다.31) 윤이흠, 「종교와 의례」, 『종교연구』 16, pp.2∼3, 1998 ; J. 해리슨, 오병남·김현희 공역, 『고대 예술과 제의』, 예전사, 1996, p.55. 의례의 정형성과 반복성은 곧 의례행위의 전범, 혹은 표준화된 틀을 유도하게 되며, 일정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특징을 갖추게 된다. 정형성과 반복성을 지니는 의례의 ‘정형화된 행동’은 시간과 공간의 축에 의해 의례 규범의 가시화된 틀로 형성된다. 그 가시화된 틀에는 하나의 집단이 추구하는 문화가치와 상징을 담게 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행해졌던 ‘정형화된 행동체계’로서의 의례에서 조선왕실의 문화와 상징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조선왕실에서 길례·가례·빈례·군례·흉례의 오례로 규정되어 행해지던 의례의 시행 절차인 ‘오례의주(五禮儀註)’는 『경국대전』의 여타 법 규정과 마찬가지의 효력을 갖는 법적 위상을 부여받았다. 조선시대에 시행된 오례의 개별 의례들이 『경국대전』에 규정된 ‘육전 (六典)’체제의 법 규정과 유사한 효력을 갖는다는 개념은 낯설 수 있다.32) 전통사회에서 ‘법’ 개념에 대한 시각에 대해서는 함재학, 「동양에서의 변법과 개혁 ; 경국대전이 조선의 헌법인가?」, 『법철학연구』 7, 2004에서 제시된 바 있다. 이 논문에서는 법이라는 개념이 과거와 현재에 다르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법 개념’ 인식의 혼란이 파생되었다고 전제한 후 조선시대 사람들이 인식한 법의 함의는 무엇인지 고민하였다. 이어 조선시대의 법전으로 『경국대전』만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여 예를 조문화시킨 『국조오례의』도 국가가 제정한 법전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경국대전』 「예전」에서 이미 『국조오례의』가 법전에 준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음에도 조선시대의 ‘예’를 ‘법’에 준하는 법전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학계의 시각은 뒤늦은 감이 있다. 현재 『국조오례의』로 대표되는 국가전례서와 거기에 수록된 국가전례에 대한 연구는 일부 한정된 소수의 학자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으나 앞으로 보다 다양한 시각이 투영되어 다각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조오례의』가 법전인 『경국대전』과 다른 의례의 시행세칙만을 기록한 단순한 ‘의례서 일 뿐’이라고 인식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경국대전』 예전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 왕실에서 거행한 개별 의례들이 법전에 준하는 의미로서의 ‘오례의주’라는 점을 인식하고 오례서의 기록과 의례를 바라본다면 그간 학계에서 왕실의 의례를 바라보는 시각과는 다른 틀로 오례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오례’라는 틀로 행해진 여러 의례들의 시행과 관련하여 논의되는 내용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편년서의 기록을 통해 읽어 보면, 그 논의 하나하나에 ‘법’ 해석을 하듯 치밀한 시각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대담론 혹은 미세담론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담론에는 그 시대, 그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성과 당시 국정운영의 추이가 담겨 있음도 자명하다.

실제 편년서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예’ 관련 기록은 당시 시행되는 예법, 의례에 관해 논의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당시 시행되고 있는 의례들이 법전이나 오례서 등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과 같은지 다른지, 다르다면 왜 다른지, 변화가 생겨 달라졌다면 그 변화된 내용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수렴하여 기록으로 드러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들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당대인들이 ‘예법’·‘예와 법’의 준거틀과 ‘시용(時用)’, 즉 당시 준행하고 있는 예서, 법전의 내용이 당시의 현실과 맞지 않아 기록의 간극이 생겼을 때, 그 거리를 어떻게 조율할지 고민하는 과정임을 드러내고 있는 치밀한 ‘진술’의 일부임을 알려 준다.

예컨대 흉례에서 복식을 어떻게 갖추어야 하는 지에 관한 복제(服 制)의 문제, 혹은 길례에서 제사에 참여하는 관원의 위격 규정, 혹은 왕이나 왕비, 왕세자를 위한 의장의 규모나 악대의 용도, 규모의 차별화, 제사에 참여할 때 제사의 규모에 따라 차등화하는 재계(齋戒)하는 날 수, 제사를 지낼 때 단(壇) 규격의 규정, 제사지내는 대상의 위격에 따른 제기의 종류와 숫자의 차등화, 기타 의례에서 사용하는 제반 용어 등이 모두 위격, 신분 등과 밀접하게 관련하여 규정되고, 그러한 위격, 신분 등이 지니는 함의는 한 의례의 전체 구성을 각각 차별화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조선 왕실에서는 의례와 관련된 수 많은 논의들이 치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볼 때 하나의 사건에 대해 ‘법전’에서 그 준거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시행되는 의례에 대해 ‘오례서(五禮書)’에서 준거를 찾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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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 수하도(王世子受賀圖) 『왕세자입학도첩』
왕세자 수하도(王世子受賀圖) 『왕세자입학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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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에서 행해지던 각종 의례에 대한 연구는 ‘정형성’과 ‘반복성’을 통해 획득한 정형화된 행동을 통해 당대 사람들의 의례행위와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예법적 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더구나 각 시대마다 일정 맥락을 지니고 제정된 특정 의례들은 그 시대의 사회적, 역사적 변화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충실히 담지하고 있는, 일종의 ‘지표’와 같은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특정 사회의 변화와 변화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한다.33) 이와 유사한 논의에 대해서는 궁정예법이 사회와 지배형식을 구축할 때 매우 중요한 상징적 기능을 하였다는 점에 대해 프랑스의 궁정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상세한 분석을 가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관점이 도움이 된다(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박여성 옮김, 『궁정사회』, 한길사, 2003).

이처럼 의례란 한 사회에서 행해지는 가치체계의 정형성을 담고 있는 상징이다. 따라서 특정한 의례가 어떠한 상징 체계를 지니며 어떠한 방식으로 양식화되고 형식화되는 지 본다면 의례 제정의 과정 및 상징화하는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 이에 사람이 드나드는 문을 통해서 문의 상징과 의례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어떠한 방식을 만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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