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2 음악과 일상 생활
  • 04. 종교와 노래: 굿음악
  • 종교와 노래: 굿음악
  • 삼현육각(三絃六角)
이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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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 김홍도
무동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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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의 노래와 춤을 반주하는 음악은 삼현육각(三絃六角) 반주와 타악기 반주로 구분할 수 있다. 타악기만으로 연주하는 동해안과 제주도를 제외하면, 우리나라 굿판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삼현육각 반주로 하기 마련이다. 삼현육각은 6개의 악기(목피리·곁피리,68) 피리는 대개 두 대로 편성된다. 두 대의 피리 중에서 주선율을 연주하는 피리를 목피리라 하고, 나머지를 곁피리라 한다. 젓대,69) 이 글에서는 ‘大笒’이라는 악기명을 의도적으로 피한다. 그 이유는 ‘笒’자를 ‘금’ 또는 ‘함’으로 읽는데, 악기명에 쓰기 위한 한자는 ‘속밴대[實中竹名]’라는 의미의 ‘함’자로 발음해야 맞을텐데 현재 우리 국악계에서는 ‘금’자로 발음하고 있어서 앞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안확은 이 악기를 ‘大笒’이라 표기하고(「조선음악의 연구 (1)」, 『조선』 149, 1930), 북한에서도 ‘대함’이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민간에서 흔히 부르는 ‘젓대’라는 악기명을 쓰고자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용식, 『한국음악의 뿌리 팔도 굿음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9, pp.35∼36 참조. 해금, 장구, 북)로 삼현풍류(三絃風流)를 연주한다는 의미이다. 삼현풍류는 흔히 대풍류(竹風流)라고도 하는 음악으로서 관악기 편성의 합주를 의미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전통음악에서 현악기인 해금은 관악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해금은 명주실을 꼬아 만든 두 줄을 말총으로 만든 활을 문질러 연주하는 찰현악기이지만 주로 피리·젓대와 더불어 편성되면서 관악기의 선율을 연주하기 때문에 관악기 취급을 받는다. 이렇게 피리, 젓대, 해금의 악기 편성은 궁중 등의 행차에서 행차 본진의 뒤편에 편성되는데, 이를 세악수(細樂手)라 한다.

삼현육각 편성은 김홍도(金弘道, 1745∼?)나 신윤복(申潤福, 1758∼?)의 그림에 자주 나타난다. 조선 영·정조 이후 궁중이나 민간의 무용에 흔히 쓰이는 악기 편성이나 현재 쌍피리(목피리와 곁피리가 함께 편성되는 경우)와 북이 편성되는 삼현육각으로 굿을 반주하는 경우는 굿의 규모가 큰 경우이고, 그렇지 않으면 피리, 젓대, 해금이 각각 하나씩으로 이루어진 삼(三)잽이 편성에 장구를 더하는 것을 보통 삼현육각이라고 한다. 굿의 규모가 이보다 작을 경우는 피리와 해금의 양(兩)잽이 편성으로 연주하고, 그 규모가 이보다 작을 경우는 피리 혼자, 즉 외(單)잽이로 무악을 연주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피리 2, 젓대, 해금의 선율악기가 장구, 북과 함께 어우러지는 악기 편성은 조선 후기, 특히 17세기 후반 이후의 역사자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런 악기 편성은 ‘삼현육각’이라는 이름보다는 ‘세악’이라는 이름으로 명기되었다. 17세기 말엽의 『어영청초등록(御營廳抄謄錄)』(숙종 23년, 1697)에 ‘세악수’란 말이 문헌에 처음 나온다.70) 우에무라 유키오, 「조선 후기 세악수의 형성과 전개」, 『한국음악사학보』 11, 1993, p.474.

<사료 1> 세악수는 재년으로 인하여 궐원이 있어도 보충하지 말 것.71) 『어영청초등록』, “細樂手回灾年有闕勿補率.”

이후 18세기 전반부터 세악수는 어영청, 훈련도감, 오영문 등의 군영 악사로 널리 편성되었다.72) 우에무라 유키오, 앞의 논문, pp.474∼476 ; 이숙희, 『조선 후기 군영악대』, 태학사, 2007, pp.206∼210. 이들 세악수는 열무(閱武)의식 등 각종 군영의 의식에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들은 또한 군영 의식 외에도 민간의 의식이나 잔치에서도 음악을 연주하였다.

『숙종실록』에 “총융사 이우항이 개인적인 잔치에 군영의 세악수를 거느렸다.”는 기록을 보면,73) 우에무라 유키오, 앞의 논문, p.474, 세악수가 민간에서도 음악을 연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 2>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 “총융사 이우항이 자기 소속 군대의 세악수를 친히 거느리고 과거에 오른 연인가(連姻家)에 가서 종일토록 잔치를 벌렸습니다. 자신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이런 놀랄 만한 일이 있었으니, 청컨대 총융사 이우항을 종중추고(從重推考)하소서.74) 『숙종실록』 권38, 숙종 29년 2월 18일.

세악수가 17세기 말에 처음 언급되었고 18세기 후반의 각종 역사기록이나 도상자료에 나타난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18세기에 제작된 <정조대왕 화성행차 반차도(正祖大王華城行次班次圖)>, <통신사행렬도(通信使行列圖)>나 정선(鄭歚, 1676∼1759)의 <동래부 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김홍도의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1786), <수원행행 반차도(水原幸行班次圖)>(1794) 등 궁중이나 군영의 행진을 기록한 그림이나 김홍도의 <무동도(舞童圖)>, 신윤복의 <검무도(劍舞圖)> 등의 각종 민간 행사를 기록한 그림에 두루 세악수(삼현육각) 편성의 악대가 등장한다. 이런 도상 자료에 세악수(삼현육각) 편성이 갑자기 두드러지게 그려진 것은 이 악기 편성이 18세기 무렵에 크게 성행하였고, 이를 도상 자료로 남겨야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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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행렬도(숙종 37)
조선통신사 행렬도(숙종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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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육각 편성으로 굿을 반주하는 지역은 동해안과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서울·경기 무악권은 현재까지도 삼현육각으로 반주를 한다. 전국적으로 가장 규모가 크고 근대에까지 존재하였던 수원의 재인청(才人廳)이 장용영이 있었던 경기 남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서울·경기 무악권의 세습무가 현재까지 전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황해도와 평안도에서는 요즘은 규모가 큰 굿일 경우 피리·호적(태평소)을 연주하는 악사가 따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타악기 반주만 따른다. 그러나 황해도에서도 “감영에 소속된 노비 중에서 음악을 아는 자(府奴之解樂者)”가 세악(世樂)을 담당하였다는 기록을75) 『조선시대 사찬읍지』 황해도 권3, 한국인문과학원, 1989∼1990 ; 이숙희, 앞의 책, p.203 재인용. 보면, 황해도에도 감영에 소속 된 세악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황해도의 세악수를 ‘부노(府奴)’라고 표기한 것을 보면 이들도 다른 지역의 세악수와 마찬가지로 무당 집안의 남성 악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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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화성행차 반차도 일부
정조대왕 화성행차 반차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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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의 삼현육각 악사는 은율탈춤, 강령탈춤, 봉산탈춤 등 황해도 탈판에서도 반주음악을 맡았고, 이들은 탈판에서부터 굿판에 이르는 광범위한 민속음악판과 감영의 잔치판을 넘나드는 악사였다. 황해도 해주 삼현육각은 긴짜, 중영산, 염불, 자진염불, 도드리, 타령, 자진타령, 시나위 등의 음악을 연주하였는데,76) 이보형, 『삼현육각』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4, 문화재관리국, 1984. 이는 경기도 삼현육각 음악과 같은 것이다. 또한, 평양에서는 신임 수령의 도임연 회에 삼현육각 악사의 반주로 대규모 잔치를 벌였다는 자료를 보면, 평안도에서도 삼현육각 악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예전에는 평안도·황해도에서도 삼현육각 악사가 굿판을 비롯한 민속음악판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주역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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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의 삼현육각 악사(양주별산대)
탈춤의 삼현육각 악사(양주별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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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이남 세습무권의 삼현육각은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통영을 중심으로 하는 남해안 굿까지 삼현육각 편성으로 연주한다. 경상좌도 수군통제영이 위치하던 통영에서는 현재까지도 삼현육각으로 굿뿐만 아니라 승전무·검무 등의 민속무용, 제승당 제향이나 둑제 등의 의식에서까지 폭넓게 삼현육각으로 연주되고 있다.77) 이보형, 앞의 책. 통영 삼현육각은 염불, 타령, 자진타령, 굿거리 등을 연주한다.

전라도에서는 현재 삼현육각 악기가 아닌 아쟁·가야금이 편성되어 경기 남부 지방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아쟁·가야금으로 편성된 것은 주로 진도 등 특정 지역에 한정된다. 더구나 진도를 포함한 전라도에서도 예전에는 피리·젓대·해금으로 연주하였었다는 기록을 보면,78) 이보형, 『한국민속 종합조사보고서』 14: 무의식편. 진도를 포함한 전라도도 본래는 삼현육각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라도에 아쟁·가야금이 편성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아쟁의 경우는 1970년대에 진도의 명인이었던 강한수가 아쟁을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이 악기가 씻김굿의 슬픈 정서를 표현하기에 적합해서 아쟁이 급속하게 많이 쓰이기 시작하였다.79) 황루시,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화산문화, 2001. 이렇게 진도에서 아쟁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전라도 타 지역에서도 최근에는 아쟁이 편성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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