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5 전통음악 공연에 대한 역사적 엿보기
  • 02. 무엇을 어떻게 보았나?
전지영

공연이 이루어지기 위한 두 축은 담당층인 연주자와 수용층인 감상자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수용층은 주로 지배계급이자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그렇다면 자신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였으며, 어떠한 관점에서 보았을까? 이는 비평의 문제와 연결된다. 20세기 이전에도 음악에 대한 비평은 존재하였으며, 음악에 대한 가치판단 역시 다양한 문헌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음악은 어떠해야 하는 것이며, 당대 음악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주장과 논쟁은 존재하였다. 이러한 논의들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가장 큰 변화는 역시 20세기 이후였다. 이런 변화의 궤적 속에서 당대 음악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던 지식인들의 고심과 음악을 바라보며 보다 나은 세상을 지향하던 이들의 욕망을 살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음악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집중된다. 따라서 본격적인 공연에 관한 관심이나 비평 역시 조선시대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비평을 전문적으로 하는 비평가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대개 학자나 관료들이 음악에 관심을 갖고 비평적 시각에서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즉, 비평과 학문이 구분되지 않았으며, 음악비평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기록들 중 상당수는 지식인들의 개인 문집에서도 ‘잡설(雜說)’, ‘잡론(雜論)’ 등과 같이 오늘날 개념의 ‘기타’ 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음악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그만큼 낮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이념적으로는 음악이 치란(治亂)을 반영한다는 유교적 예악론에 경도되어 음악적 이상에 대해서는 매우 중시하는 경향도 강하였다. 이는 아악으로 대표되는 바른 음악의 이상에 대한 추구와 현실 음악에 대한 관심이 괴리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주로 ‘지금의 음악’으로 해석되는 ‘금악(今樂)’이라는 것이 아악의 이상과 멀어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였었다. 흔히 유교에서는 고대를 이상사회로 간주하고 현실을 타락한 사회로 간주하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음악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악(古樂)은 아악의 이상이 실현되었던 시기였고 당대는 고악이 사라져 버린 타락한 시기로 간주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음악의 본질이나 이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현실 음악에 대한 관심은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성리학적 시각에서 바른 삶을 추구하였던 지식인들이 이런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상은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17세기부터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고악과 ‘금악’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금악도 고악이 될 수 있다는 이념적 절충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중국의 음악뿐만 아니라 조선 고유의 음악도 ‘바른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사고가 비로소 등장하게 되고, 조선 고유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그 결과 18∼19세기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음악 환경은 비약적인 풍성함을 맞게 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조선 건국 이후 음악을 잘 갖추어서 백성을 교화하고 통치를 효 과적으로 하기 위한 노력이 강화되었다. 조정에서부터 개별 집안에 이르기까지 악(樂)을 잘 갖추게 되면 교화가 이루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지는 ‘화행속미(化行俗美)’의 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악(樂)이란 성정(性情)의 올바름에 근원하여 성문(聲文)을 갖추어서 표현되는 것이다. 종묘의 악(樂)은 조상의 훌륭한 덕을 찬미하기 위한 것이고, 조정의 악(樂)은 군신간의 존엄과 존경을 지극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향당(鄕黨)과 규문(閨門)에서까지도 각기 일에 따라서 악을 짓지 않음이 없었다. 따라서 그것이 그윽해지면 귀신이 강림하고[祖考格] 명확해지면 군신이 화합하며[君臣和], 이를 향당(鄕黨)과 방국(邦國)으로 확대하면 교화가 실현되고 풍속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니[化行俗美], 악의 효과[樂之效]는 이처럼 깊은 것이다.233) 정도전, 『朝鮮經國典』 禮典, 摠序.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음악을 관장하는 국가 기구가 여러 설립되고, 아악을 비롯한 여러 음악을 정비하고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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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 『이원기로회도』 부분
장악원, 『이원기로회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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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이후에는 이런 여러 기구가 장악원으로 통폐합되는데, 이 장악원이라는 이름은 전 시대의 잘못된 음악을 바로잡고 올바른 음악을 만들어 이끌어 가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옛날 후기(后夔)가 전악(典樂)으로 당우(唐虞)의 치세를 함께 하고 『주례(周禮)』 「대사악(大司樂)」에서 성균(成均)의 법도로 국자(國子)들을 가르친 것은 또한 육률, 오성, 팔음이 크게 합치되는 악으로 귀신에게 바치고[致鬼神] 만민을 조화시키고[諧萬民] 빈객을 편안하게 하고[安賓客] 멀리 있는 사람들을 기뻐하 게[悅遠人] 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한(秦漢)시대까지는 악관(樂官)이 여럿이었는데, 태악서와 고취서가 있었고, 그 일은 영승(令丞) 협률랑(協律郞)이 맡았다. 당·송시대 이후에는 관제(官制)가 잘 갖추어졌지만, 의례의 문장이 너무나 번거로워서 태고의 원기를 깎아 내리는 것이었다. 신라와 고려대에는 각각 악을 관장하는 기관이 있었는데, 그 소리들은 모두 민간의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이거나 천하고 음란한 소리이거나[流蕩而哇嗌] 슬프게 원망하고 질책하는 소리[哀怨而悲咤]였기 때문에 ‘상간복수지음(桑問濮水之音)’이나 ‘정위지음(鄭衛之音)’과 다름이 있었으니, 결국 상하군신간의 질서가 어지럽혀져서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우리 세종대왕께서는 전대의 이런 좋지 않은 음악을 싫어하고 고악을 회복하고자 하여, 아악을 태상시(太常寺)에 속하게 하고 관습도감을 설치하여 향당지악(鄕唐之樂)을 가르쳤으며, 맹사성과 박연 등을 제조(提調)로 삼아서 악을 제정하는 임무를 위임하였다.234) 성현, 「掌樂院題名記」.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15세기 악에 대한 이러한 기대와 희망은, 그만큼 당시가 유교적 예악론에 대한 구현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컸던 시기였음을 반증한다. 하지만 16세기가 되면 상황이 바뀌는데, 15세기적인 사회적 역동성이 사라지고 음악에 대한 관념 역시 다소의 매너리즘적인 경향이 생겨났다.

즉, 15세기적인 구체성과 희망이 사라지고 이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공허한 이념적 지향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현실 음악에 대한 비판의 시각이 강해진다. 특히, 당시 사회가 15세기처럼 안정되지 못하고 정치도 다소 어수선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불안정성의 원인으로 음악의 ‘음란함’이 지목되었다. 유교적 이념에서 “잘 다스려질 때의 음은 편안해서 즐겁고, 그 정치는 조화를 이루며, 어지러운 시대의 음은 원망스러워서 노엽고 그 정치는 어그러진다. 망한 나라의 음은 슬퍼서 구슬프고 그 백성은 곤경에 빠지니, 성음의 도리는 정치와 통하는 것이다.”는 신념은235) 『예기』, 「樂記」. 곧 사회가 전 시대보다 혼란스럽고 안정화되지 않은 것은 음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식의 해석을 낳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16세기 지식인들은 당대 사회에 대한 불만을 현실 음악에 대한 불만으로 연결시켰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중국 고대의 이상사회와 대비되어 조선 고유의 음악문화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다. 현실은 고대에 비해 타락한 시대이고, 당대의 음악 역시 고대의 아악에 비해 타락한 음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고유의 음악은 뚜렷한 이유 없이 타락하고 음란한 음악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으며, 특히 사림파의 이상주의적 관점에서는 이런 모습이 더욱 강하였다.

우리나라의 가곡은 대개 음란하여 말할 것이 없다. <한림별곡>과 같은 것도 문인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긍호(矜豪)·방탕(放蕩)하면서도 속되고 게으르고 경박하니, 군자가 숭상할 것은 아니다. 최근에 이별(李鼈)의 육가(六歌)가 유행하였는데, 이것은 좀 낫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시 세상을 조롱하면서 공경하지 않는 뜻을 지니고 있어서 온유하고 돈후(敦厚)한 뜻이 적다. 노인은 비록 음률에 정통하지는 않았지만, 세속의 노래들이 듣기 싫은 것임을 알고,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틈을 내어 성정에 감응하는 것이 있으면 매번 시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시는 옛날 시와 달라서 읊을 수는 있어도 노래할 수는 없다. 만일 노래를 하고자 하면 반드시 세속의 말로 해야 하니, 나라의 풍속과 음절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236) 이황, 「陶山十二曲跋」.

(평양)감사가 연회 자리를 펴고, 흰 과녁을 능라도에 걸고서 군관으로 하여금 짝을 지어 활을 쏘게 하였으며, 찬(饌)을 갖추어 상을 차렸는데, 포구(抛毬), 향발(響鈸), 무동(舞童), 무고(舞鼓)의 기예가 요란하기가 어제보다 더욱 심하였다. 우리나라의 악은 가곡이 음란하고 성음이 애초(哀楚)하여 사람 의 마음을 슬프게 하며, 그 춤의 진퇴하는 절도가 경박하고 촉급하므로 똑바로 볼 수가 없는 데도, 세상 사람들은 바야흐로 또한 이를 즐겨보며 밤낮으로 싫증을 아니 내니 무슨 마음에서인가? 이와 같은 것으로 신과 인간을 조화시키고 상하의 질서가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은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237) 허봉, 「荷谷朝天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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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감사향연도 제1폭 감사행영, 작자 미상, 18세기 후반
평양감사향연도 제1폭 감사행영, 작자 미상, 18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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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글들을 보면 음악을 바라보는 16세기 지식인들의 면모를 잘 살필 수 있다. 지식인들이 중국의 고대 이상사회 음악을 강하게 지향할수록 조선의 현실 음악에 대해서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성리학적 이상에 대한 지향이 강할수록 조선 고유의 음악에 대해서는 폄하의 경향이 강하였다.

이황은 바람직한 노래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허봉은 잘못된 현실에 대한 분노와 나라에 대한 충정을 바탕으로 한 비분강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충정으로 인해 오히려 조선의 음악(중국의 음악이 아닌)은 음란한 음악으로 간주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모습은 15세기적인 역동성과 이상에 대한 구현 가능성의 기대가 사라지고 사회적 안정성도 떨어진 16세기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음악에 대한 관념과 기대 역시 사회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런 상황이 또 다시 변화한다. 전대미문의 엄청난 전란을 겪고 난 이후 사람들은 조선 전기에 가졌던 절대적 신념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한다. 즉, 중국의 아악으로 대표되는 ‘바른 음악’을 잘 갖추면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런 믿음이 전란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여전히 변함없는 유교적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제 이념적 타협을 하기 시작한다. 중국의 아악만이 바른 음악이고 이 상적인 음악이 아니라, 그 동안 속된 음악이라고 배척하였던 조선 고유의 음악 역시 바른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등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속악(俗樂)’으로 배척받았던 만대엽 이후 조선 고유의 음악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서 공식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이념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따라서 18세기 이후 영산회상, 삭대엽(가곡) 등 많은 조선 고유의 음악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 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새롭게 꽃을 피운 조선 고유의 음악들은 이른바 ‘금악(今樂)’으로 불렸으며, 비록 여러 성리학자들이 ‘금악’은 고악(古樂)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을 하기도 하였지만,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으면서 화려하게 성장하였다.

그대가 보내준 글에서 말하기를, 그대는 내가 거문고 만대엽을 즐겨탄다는 말을 듣고 이 곡의 음이 심히 느리고 산만하여 실로 정위지음(鄭衛之音)이라 하였네. 아! 내가 음률을 익히 알지 못하여 설파하기 어렵긴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싶네. 무릇 거문고 악조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평조, 낙시조, 계면조, 우조가 그것이네. 이것은 사시(四時)에 따른 만화(萬化)를 빗대는 것인데, 평조만대엽은 제곡(諸曲)의 조종(祖宗)으로 조용한원(從容閑遠), 자연평담(自然平淡)한 까닭에, 삼매(三昧)에 든 사람이 이것을 타면 부드럽기가 마치 봄 구름이 허공에 퍼지는 듯하고 넉넉하기가 마치 따뜻한 바람이 들판의 사람을 어루만지듯하여, 천년 묵은 여룡(驪龍)이 여울 속에서 읊는 듯하고 반공(半空)의 생학(笙鶴)이 소나무 사이에서 우는 듯하니, 소위 사악함과 더러움을 씻고 찌꺼기와 앙금을 없애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네. 이는 아득히 당우(唐虞) 삼대의 시절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니 망국지음(亡國之音)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네.238) 이득윤, 「答鄭評事書」.

중국의 소위 가사(歌詞)는 고악부(古樂府)가 곧 신성(新聲)이며, 관현을 입 힌 것이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음을 내는 것이 문장을 가지고 말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중국과 다르긴 하지만, 그 정경(情境)을 함께 지니고 궁상(宮商)이 해화(諧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읊을 수 있게 하고 손과 발로 춤을 추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따진다면 다를 게 없다.239) 신흠, 「書芝峯朝天錄歌詞後」.

만대엽은 임진왜란 직전부터 유행한 조선 고유의 음악이다. 이 음악은 조선 고유의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속된 음악이 아니라 “사악함과 더러움을 씻고 찌꺼기와 앙금을 없애 주는” 음악이고 요순시절의 이상적인 음악을 닮아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조선의 음악 역시 바른 음악이라는 생각에 기인한다. 또한, ‘정경(情境)을 함께 지니고 궁상(宮商)이 해화(諧和)’한 것이라면 조선의 음악이나 중국의 음악이나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금악’에 대한 가치평가가 크게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리학자들의 일반적인 관념 중 하나는 ‘옛 것은 위대한 것이고 올바른 것이며, 지금의 것은 타락한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또한, 일부 음악이 갖는 소비적이고 사치스러운 모습은 자연스럽게 학자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18세기에는 많은 새로운 음악들이 전례 없이 유행하였는데, ‘신성(新聲)’이라고 불렸던 그 음악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금악’과 ‘신성’은 같은 음악을 지칭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두 단어가 갖는 어감은 조금 달랐다. ‘금악’은 말 그대로 당대의 음악을 객관적으로 지칭하는 것이었고, 신성은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음악문화를 지칭하는 어감이 강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세종 때 악률을 정하였는데 그 뜻은 진선진미(盡善盡美)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전해지는 음악을 가지고 상상해보면 여 민락과 같은 음악은 마땅히 악보가 남아있고 보허자와 같은 음악은 화평한 소리를 방불케 한다. 임진왜란 전에는 민간에 <둥둥곡(登登曲)>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번음촉절하여 어지럽고 떠들썩한 것이었다. 그후 아속악(雅俗樂)이 점점 촉급해져서 옛날의 뜻이 거의 없어졌다 …… 근년 이래로 중대엽 이하 음악들이 거의 사라졌고, 노인들도 모두 죽었으며 이야기하는 사람 역시 없어졌다. 세속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둥둥곡>보다 더욱 심한 것들이다. 중년 초동목수와 걸인행상들 사이에 수혼조(隨魂調)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을 장례지내는 소리로 슬프고 처량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통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국가(鞠歌)라는 것이 있는데 그 소리는 머리를 흔들고 부채를 두드리는 것으로, 절주가 촉급하고 소리가 음란하여 올바른 청자[正聽者]들이 차마 들을 수가 없다. 지금 온 나라를 뒤흔드는 노래로는 입만 열면 이 외에 다른 노래가 없으며 상(賞)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이 외에는 다른 음악이 없다. 그 소리와 춤에 의탁하는 사람들은 취한 듯 미친 듯하니 비록 축씨팔풍(祝氏八風)이라도 마땅히 이런 귀신과 같지 못할 것이다. …… 그 조잡함은 잠시라도 심성과 본분이 있는 자라면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칭찬하니 이는 여항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장(官長)이 그것을 따르고 장려하면서 전두(纏頭)에 돈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아! 심하도다. 옛날 풍요를 채집하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무어라 말하겠는가! 지금의 시부(詩賦)는 노래를 입히지 않았어도 그 근본은 음악이 생성된 것에 말미암는다. 대개 문체가 점점 오염되면 음악도 모두 그와 일치한다. 아! 누가 우리나라를 옛날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 해변의 곤궁한 곳에서 한밤중의 감회를 이길 수 없도다.240) 위백규, 「格物說」.

세속의 찌꺼기들과 속된 벼슬아치들이 온 세상에 넘치고, 경적(經籍)을 원수로 여겨서, 사람이 또한 이런 일 때문에 서로 기약할 수 없으니 어찌 감히 제작(制作)이 있겠는가? 생각건대, 예(禮)는 밖에서 나오고 악(樂)은 안에 서 나온다고 하고, 선생님(공자)의 가르침은 먼저 시(詩)를 하고 나서 예(禮)를 하라고 하였다. 나라의 풍속이 예학(禮學)에 심히 힘을 쓰고 있지만, 그릇된 유학자나 편협한 선비들[曲儒狹士]이 눈을 부릅뜨고서 따지고 들지 않음이 없어도 유독 악에 대해서만큼은 과연 뜻을 남긴 자가 있었던가? 나의 글에 대해서 비록 한 두 사람이 거론한 바가 있긴 하지만 역시 주선(周旋)과 음률에 관한 것일 뿐 도무지 마음으로 깨달은 자가 없으니, 방탕한 자들이 음란한 음악을 일삼아서 공당(公堂)에서조차 술병을 두드리며 노래하는 자들이 생겨나는 지경이다. <추강기(秋江記)>에 이르기를 ‘우찬성이 타량무(打凉舞)를 잘한다’고 한 것 역시 이런 모습 중 하나이다. <악기>에 이르기를 ‘악(樂)이 지나치게 되면 천박해지고, 예가 지나치면 각박해진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뜻하는 것은 방탕한 자들이 하는 음악은 반드시 음란한 음악이 지나친 것이고, 파벌을 이루어 화(禍)를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잘못된 예(禮)가 지나친 것이라는 것이다.241) 이형상, 「答李仲舒」.

관서지방은 본디 번화하고 강산누대(江山樓臺)의 경승지로 일컬어졌고, 술을 마시고 노는 것이 지나쳐서 족히 정사에 방해될 만한데, 거기에 여악이 보태졌으니, 이런 까닭으로 관서 고을에 나가는 자는 대부분 백성과 사직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사죽(絲竹)을 사치스럽게 하는 것에 힘써서, 백성의 기름을 짜내는데 힘이 부족할까 염려하는 듯하였다. 예컨대 하루아침 기생에게 주는 비용을 손 가는 대로 집어 흩어주며 적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니, 기생들은 능라(綾羅)에 싫증이 나는 데도 백성들은 입을 옷이 온전치 못하고, 기생들은 좋은 음식과 고기에 싫증을 내는 데도 백성들은 술지게미와 쌀겨도 충분치 않다. 지금 민생이 한쪽은 가난하고 한쪽은 부유하여 균등하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시경의 뜻에 부끄러움이 있거늘, 오히려 저들을 수탈하고 이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밝으신 임금께서 법을 만드시어 윤리를 돈독히 하고 교화를 중히 여기시니, 촌마을 여자 중에 음란하고 방자한 이들 역시 법으로 금지시켜야 함에도 오히려 그들을 인도하 여 음란한 데로 이끄니 금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마땅히 이 모든 것을 혁파하여 정절과 신의로 스스로 지켜갈 수 있도록 한다면 위로는 교화가 이루어지는 빛이 될 것이고 아래로는 고을의 폐단을 없애는 것이 될 것이니 어찌 번성하지 않겠는가?242) 성해응, 「罷妓樂」.

백성의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화려함만을 일삼는 이들의 소비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신성’은 이처럼 강렬한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었다. 많은 학자들이 당대 음악에 대해 ‘초쇄(噍殺)’하다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빠르고 슬픈 음악의 모습을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망국지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이런 신성(新聲)에 대한 비판, 소비적 음악문화에 대한 비판 등은 비교적 현실의 음악문화에 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을 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비평이 이념이나 편견을 뛰어 넘어 현실적 측면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에 비해 적지 않은 발전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면서 더 이상 전통음악은 전체 음악문화의 중심에 서지 못하였다. 20세기 전반은 국악에 있어서 식민지 경험과 서양 음악 유입으로 대표되는 엄혹한 시기였다. 서양 음악이 유입되면서 전통음악에 대한 주류 사회의 관심 자체가 희미해졌다. 조선시대는 학문과 비평이 분리되지 않았던 만큼 지식인들이 음악비평을 담당하였고 실제 음악가들은 비평의 대상이었지 비평의 주체는 아니었다.

이는 20세기 들어서면서 변화하게 되는데, 지식인들 그룹의 비평적 관심이 국악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문명이었던 서양 음악의 유입에 집중되고 있었고, 비평 역시 국악 자체보다는 선진 문물로 간주되었던 서양 음악의 유입 속에서 어떻게 조선의 노래를 창출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서양 음악을 빨리 수용해서 ‘근대화’를 이룰 것 인가 등과 같은 문제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비평의 주체였던 지식인 집단뿐만 아니라 서양 음악을 학습한 이들이 주도적으로 서양 음악 중심의 음악비평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반면, 비평의 주체를 확보하지 못한 국악은 일부 민족주의적 지식인이나 이왕직 아악부 관계자들의 단편적인 기록 외에는 비평의 공간에서 멀어지거나 잊혀지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국가의 쇠락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의 고유한 것에 대한 가치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전통이 낡고 고루한 것으로 각인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 속에서 전통음악 역시 낡은 이미지로 채색되고 있었다.

우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서양악은 입체적이요 동양악은 평면적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악은 마치 서양의 고층 건축과 같고 동양악은 평면적인 단층 건축과 같은 것이다. 비록 시대가 변천되었다고 한들 단층 건축물을 헐어서 고층 건축물로 개축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 일일까.243) 홍난파, 「동서음악의 비교」.

홍난파의 이 글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서구 우월주의와 동양에 대한 비하로 가득 차있고,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한 전형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1930년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식민지 지식인들의 사고에서는, 정복 당한 자신들의 전통은 모조리 극복하고 타파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통은 나라를 잃게 만든 나약하고 부끄러운 잔재였고, 정복자들의 문화와 문물은 앞선 것이면서 반드시 하루빨리 본받아야 할 것들이었다. 그것이 나중에 식민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여유는 없었으며, 특히 일본을 통해 전해진 서구문물이야말로 가능한 빨리 우리가 소화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수탈이 가져올 역기능과 전통문화의 쇠퇴는 당장 떠올릴 수 있는 반작용은 아니었고, 힘을 길러서 식민통치를 벗어나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온 당시 지식인들이 조선의 피폐한 현실과 일본의 상황을 비교할 때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었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음악인들이 조선에서 할 일은 전통을 하루빨리 극복하는 것과 일본에서 배운 것을 하루빨리 이식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음악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월한’ 서양 음악으로 ‘열등한’ 우리의 음악을 대체하는 것이 많은 엘리트 음악가들의 목표가 되었다.

이것은 분명 식민지 지식인들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처럼 타자의 것으로 자신의 것을 대체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음악은 타자의 것이다. 전통음악은 여전히 편견에 둘러싸여 있으며, 끊임 없이 타자의 것과 접목되면서 그 고유성이 벗겨질 것을 강요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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