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5 전통음악 공연에 대한 역사적 엿보기
  • 04. 현장 돋보기 2-일제강점기 이후
전지영

원래 전통음악 공연은 방안이나 마당에서 주로 연행되어 연주자와 관객이 엄격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면서 상호작용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서구식 무대공연 양식이 자리 잡으면서 연주자와 관객은 엄격히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예능이 연행되는 공간이 무대라고 하는 정형화된 공간이 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논리가 예술의 주요한 규정력으로 작용하였다. 서구적 양식의 공연이 이루어지면서 비평 역시 서구적 개념의 비평이 정립되었고, 서구의 양식이 표준으로 자리잡다보니 서구의 예술이 전통예술을 가치판단하는 기준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기부터 연주 주체와 청중이 엄격하게 분리된 서구적 무대공연 양식이 표준이 됨과 동시에, 당시로서는 서구의 것이면 모두 앞선 문명으로 받아 들여졌던 시기였다. 이런 서구적 개념과 현상은 매우 세련되고 선진적인 문화의 모습으로 간주되었다. 이미 서양 음악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므로 그 연주행위 역시도 대단히 엘리트적인 행위였다. 전통음악은 낡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구시대의 것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엘 리트 지식인들과 계몽적 식자층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많이 두지 않았다. 이때부터 국악과 양악이 마치 계급적 구분이 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20세기 공연예술의 가장 큰 특징인 서구식 무대공연 양식의 정착과 자본주의 시장논리의 지배는 전통음악을 연행하는 이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예술성보다는 상품성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고,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 음반자본의 상업적 판단에 의해 음악의 가치판단이 이루어졌다. 판소리와 신민요처럼 상업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음악은 시장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인기예인까지 배출하였지만, 가곡이나 영산회상처럼 예술성이 있어도 상품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음악은 도태의 위기에 처하였다. 전통음악을 담당하는 음악가들의 삶은 전혀 다른 세상에 적응하여야 하였고, 서구화된 무대에서 서구적 가치관에 조응할 것을 요구 받았다.

그 속에서 많은 예인들은 무대공연 양식에 적응하기 위해 예술단체를 만들어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개별적인 공연 활동보다는 단체 활동 속에서 활로를 찾았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활동하였던 창극이 중심이 되는 공연 예술 단체들이 많았는데, 주로 ‘협률사’라 하였다. 협률사는 원래 극장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이것이 공연단체를 지칭하는 말로 흔히 사용되었다. 예컨대 <김창환 협률사>, <임방울 협률사> 등과 같은 형태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당시 호남의 가장 유명한 협률사는 나주의 <김창환 협률사>와 남원의 <송만갑 협률사>였다. 따라서 ‘협률사 공연을 봤다’고 하면 전국을 다니면서 조립식 포장내지 천막을 치고서 창극을 비롯한 각종 공연예술을 연행하였던 단체의 공연을 봤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협률사 공연은 전국적으로 성행하였었다.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만주까지 공연을 갔다고 한다. 공, 총독이 만주 개척민 위문을 위해 공연단을 보냈는데, 이때 는 협률사 단체만이 아니라 만담꾼이나 대중음악 가수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협률사 공연은 공연전 일단 공연 장소에서 공연이 있음을 알리는 행사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공연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이를 일본어로 ‘마쯔마리’라고 불렀으며, 새납(태평소)과 타악을 앞세우면서 동네를 돌면서 선전을 하였다. 일반적인 공연 내용은 앞과장에서 민요, 무용, 가야금병창, 판소리 등으로 뒷과장은 창극 형태의 토막극으로 짜여졌다. 토막극은 예컨대 <어사와 나무꾼>,250) 판소리 춘향가에서 이몽룡이 어사가 된 이후 남원에 내려가는데, 춘향이가 죽었다고 어사를 속여서 남의 묘역에서 어사를 울게 만드는 내용이다. <어사가 춘향집 찾아간 대목>251)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내려가서 춘향모와 상봉하는 대목이다.처럼 재미와 해학이 집중되어 있는 내용으로 각색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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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률사
협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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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공연의 시작과 끝에는 징이 신호악기로 사용되었다. 공연은 가장 먼저 승무를 추면서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객석이 아직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있게 마련인데, 엎드린 자세로부터 시작하는 승무를 추게 되면 장내가 조용해지기 때문이다. 승무 도중에 법고를 두드릴 때는 두 사람이 서서 북을 들고 있어야 하였고, 다 같이 남도잡가를 부를 때는 장구잽이가 서서 반주를 하였다. 전체 공연시간은 약 2시간가량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여기에 줄타기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줄타기는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 만, 줄타기가 있을 경우는 대개 무대에서는 공간이 좁아서 줄타기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관객들 머리 위로 앞뒤로 길게 가로질러서 줄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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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
승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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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활동은 연중 내내 하는 것은 아니고 평소에는 작자 흩어져 있다가 봄·가을에 약 3개월 정도 모여서 공연을 하곤 하였다. 당시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대략 일반적인 밥 한 그릇 값의 두 배 정도의 입장료를 내야 하였다. 청중들은 지역에 따라 숫자나 반응 정도가 달랐지만 보통 대략 200∼400여 명 정도가 모였다고 한다. 당시에도 주로 중년층 이상이 많았고,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이 많았다. 극장 시설이 있는 경우에는 극장에서 공연을 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포장을 치고 공연을 하거나 동네 창고 같은 데서 하기도 하였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길 때는 트럭을 사용하였지만 근거리의 경우는 리어커에 싣고 다니기도 하였다. 천막으로 사용할 광목이나 악기는 직접 옮겼고, 천막을 칠 때 세우는 나무기둥이나 무대 제작용 판자 같은 것들은 옮기지 않고 현지에서 조달하기도 하였다.

포장을 두르고 공연을 할 경우 무대는 50∼60㎝ 정도 높이로 나무판자들로 마루처럼 짜고 그 위에는 가마니를 깔고 다시 천을 덮었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는 막을 설치하고, 징을 신호로 하여 징이 세 번 울리면 사람이 직접 막을 열었다. 객석 쪽에도 가마니를 깔아서 사람들이 앉을 수 있게 하였다. 보통 낮에는 사람들이 일을 하기 때문에 공연은 저녁 때 해야 하는데, 날이 어두워지면 천막 내부 양쪽에 석유통을 하나씩 놓고 사람이 서서 솜 방망이에 석유를 먹여서 불을 붙여서 들고 장내를 밝혀 주었다.

6·25전쟁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이런 협률사 단체의 활동 은 지속되긴 하였지만, 많은 공연단체들은 해산되었다. 당시에는 전쟁 이후 피폐해진 사회 상황 때문에 대중들이 이런 공연예술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질 수 없었고, 그나마 모든 출연진을 여성들만으로 채운 여성국극만이 그 독특함 때문에 운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국극 역시 1960년대 초반에 대부분 해체되고 와해되어 협률사의 단체활동 명맥은 급속도로 위축되어 갔다. 당시는 워낙 궁핍하였던 시대였기 때문에 단원들의 일정한 급여는 없었고, 무용복 한 벌씩과 야참비라는 이름으로 식사 값 정도만 지급하였다. 단원들은 공연이 끝나고 나면 수건을 뒤집어쓰고 여관으로 가서 잠을 잤는데, 얼굴에 진한 분장을 하였기 때문에 수건으로 가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전통예술을 담당하던 공연단체의 활로를 가장 강력하게 방해한 것은 전쟁도 아니었고, 그로 인한 절대 빈곤의 사회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영화와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이었다. 영화의 경우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미 협률사 단체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비롯한 무성영화들과 1935년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이후 영화기술의 발달은 여전히 인력을 동원한 ‘재래식’ 공연에 의존하고 있었던 협률사 공연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는 6·25전쟁 이전까지는 그렇게 전면적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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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앨범
나운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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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50년대 이후는 달랐다. 이전 시대와는 차별화된 기술적 발전과 함께 한국영화의 발전은 두드러졌으며, 여기에 전쟁의 경험과 미국에 대한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종속 및 그에 따른 미국문화의 유입, 피폐한 사회의 재건과 그에 대한 반 작용으로서의 서구문물에 대한 동경 등의 시대상이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영화는 하드웨어적으로는 새로운 물질문명의 상징임과 동시에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쟁을 딛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가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와 아울러 이른바 낡은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문명을 향한 재건과 자기반성의 지향을 담은 것이었다. 따라서 여전히 전통적인 콘텐츠를 가지고 재래적 공연방식으로 사회에서 생존하려고 하였던 협률사 단체 활동은 1950년대 중후반 이후 영화의 막강한 위력 앞에 급속도로 자생력을 상실해 갈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갖고 있는 극적 긴장감과 재미,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장면들이 주는 신기함, 대량 생산을 통한 대중적 파급력 등 모든 면에서 영화는 전통 공연 예술을 압도하고 있었다. 공, 영화와의 정면 승부는 전혀 승산이 없었던 것이다.

1956년도에는 최초로 흑백 TV방송이 시작되었다. 1957년 AFKN이 개국하고 미군 PX를 통해 흘러나온 텔레비전 수상기가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 집 안방 혹은 친구 집이나 친척 집 마루에서 ‘현란한’ 혹은 ‘신기한’ 화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61년에는 정부차원에서 흑백 TV방송을 추진하여 국영 KBS TV가 개국하였으며, 1964년 동양방송이 상용방송을 개시하였고, 1969년에는 MBC가 개국하였다. 1966년에는 최초 국내 진공관 흑백 TV가 생산되었다. 방안에서 전원만 키면 온갖 볼거리를 제공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전통 공연 예술에 있어 TV의 등장은 영화보다 훨씬 더 강력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볼거리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 굳이 공연장을 찾지 않아도 음악과 공연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상황, 게다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발달된 문명상이 화면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상황, 그와 오버랩되는 우리 고유의 전승 예능에 드리워진 낡고 고루한 이미지 등은 전통 공연예술의 생명력을 긴박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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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의 등장
텔레비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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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협률사 단체의 활동이 쇠퇴할 무렵 한국사회는 ‘조국근대화’라는 모토가 지배하고 있었다. 5.16 이후 민족주의 의식고양에 기초한 조국근대화 드라이브는 전통음악 역시 ‘근대화’ 혹은 ‘현대화’ 해야 한다는 당위를 불어놓고 있었다. 협률사 활동 같은 ‘재래식’ 공연이 아니라 ‘근대화된’ 혹은 ‘현대화된’ 공연양식이 엘리트 음악가들이 서야 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때마침 당시는 서울대학교 국악과가 막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할 때였으며, 과거와 달리 최고 교육과정을 거친 엘리트주의 음악가들은 ‘재래식’ 공연이 아니라 근대화된 새로운 무대공연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독주회와 관현악으로 대표되는 서구식 연주회 양식이 었다.

1964년은 국악에서의 기악독주회가 처음 등장한 해이면서 국악관현악이라는 양식이 처음 선보인 해였다. 당시 서울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한 이재숙의 첫 번째 독주회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연주실에서 열렸다. 그의 독주회는 당시 언론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과연 국악에서도 독주회라는 것이 가능하였다’라는 내용이 주된 것이었다. 그만큼 국악독주회라는 것 자체가 대단히 신선한 충격이었던 시대였다. 이 연주회에서는 소위 정악곡과 김윤덕류의 산조 외에 정회갑, 황병기, 이성천 등의 창작곡들이 연주되었다.

당시 이러한 독주회를 할 수 있었던 상황은 기존의 전통음악 외에 새로운 창작곡들의 작곡과 연주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재숙의 시도 이후 독주회는 ‘국악근대화’의 한 전형으로 받아들여졌고, 국악도 얼마든지 양악처럼 개인의 타이틀을 걸고 무대를 꾸밀 수 있다는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독주회라고 하면 으레 전통 음악과 창작음악의 레퍼토리 배합이 기본인 양 각인된 것도 이 첫 독주회에서 비롯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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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숙 첫 가야금독주회 팜플릿
이재숙 첫 가야금독주회 팜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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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관현악은 1964년 9월 15일에 당시 국악예술학교에서 만든 국악관현악단이 서울 시민회관에서 첫 연주를 하면서 등장하였다. 민속음악의 명인 지영희는 1963년도에 처음으로 국악예술학교 학생들을 모아서 서구식 관현악 편성을 시도하였고, 그로부터 1년 후 공식적인 첫 연주회를 가졌다. 당시 창단공연에서는 12개 레퍼토리 중에서 지영희와 이병우가 만든 두 개 만이 관현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무용과 민속악 계통의 음악이었는데, 그만큼 국악기만으로 이루어진 관현악단은 시기상조였다. 여기에는 국악근대화라는 조급한 갈망과 함께 국악기로 서구 오케스트라를 흉내내고 싶은 욕망 및 양악에 대한 동경이 뿌리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관현악 레퍼토리나 운영 시스템, 재정적 기반, 악기 속성과 음향의 고려 등이 거의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지다 보니, 형태는 국악관현악이었지만 실제 공연은 종합 국악공연의 성격이었다. 여기에 전시효과를 위해 사용하지도 않는 비파를 함께 편성하였고, 그러다보니 ‘프로그 램이 잡다하고 혼잡한 속에서 관현악단 창립의 초점이 흐려졌다’, ‘실제 연주에의 배려 없이 여러 악기를 묶어 놓았을 뿐 아니라 사용되지 않는 악기를 전시효과를 위해 내놓았다’, ‘어떤 예술적인 의식 추구보다는 대중음악으로서의 개척에 더 주안점을 둔 것 같다’는 등의 혹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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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당시 국악관현악 연주회 팜플릿
1965년 당시 국악관현악 연주회 팜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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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국악예술학교의 국악관현악단은 레퍼토리의 문제와 재정문제로 인해 운영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듬해인 1965년 서울시에서 이를 인수하여 서울시립 국악관현악단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날 서울시립 국악관현악단 창단연주회 역시 지영희의 국악관현악곡을 제외하고는 김연수, 박초월, 김소희 등의 판소리, 승무, 가야금병창 등의 레퍼토리로 꾸며진 종합공연이었다. 또한, 사용하지 않는 비파와 월금을 함께 편성하여 전시효과를 증대시키려 하였고, 이 때문에 ‘음악적 진실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국악관현악단의 등장 역시 당시 이른바 ‘신국악’의 붐과 연결되는데, 물론 신국악이 다양하게 등장한 바탕 위에서 국악관현악이 등장한 것은 아니며, 반대로 신국악의 붐이 기획한 것이 이 국악관 현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60년대 전반 독주회 양식의 시도와 국악관현악의 태동은 모두 서양 음악 공연양식을 흉내 낸 것이었으며, 양악의 흉내는 곧 국악의 ‘근대화’로 통용될 수 있었다. 5. 16 이후 ‘근대화’란 곧 서양의 모방이었고, 하루빨리 모방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이 시대적 임무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국악관현악과 국악 독주회의 성립은 당시 조국근대화를 상징함과 아울러 동시에 국악의 양악에 대한 강박관념과 동경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트 음악가들이 앞장서서 이런 서구식 공연예술 양식을 선호하면서, 그 파급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주회와 국악관현악은 필수적인 공연양식으로 자리 잡았고, 대학교육의 핵심으로 간주된 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한편, 독주회나 국악관현악과 달리 실내악은 그 이후에 시작되었다. 1980년대는 소위 국악실내악단이라 불릴 수 있는 소규모 민간악단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시기였다. 이 시기 국악실내악단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주류 국악계에서 활동을 하면서 소위 정악 계통의 곡이나 창작곡들을 특성화시켜서 소규모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하였던 <해경악회>(1980), <율려악회>(1981), <한국창작음악연구회>(1982) 등과 같은 단체가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성을 표방하면서 과감하게 국악가요를 비롯한 대중화된 음악들을 선보였던 <슬기둥>(1985)과 같은 단체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동호인적 성격이 강한 단체였지만, 주류 국악계에서 활동한 젊은 연주자들의 모임이었던 까닭으로 당시 국악 원로들과 그 영향을 받고 있었던 일부 언론에 의해 꽤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레퍼토리가 소위 ‘정악곡’에 한정되거나 ‘정악곡’ 풍의 창작곡들에 집중되고 있었다.

한편, <슬기둥>의 경우는 주류 국악계의 화려한 후원을 등에 업 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정 정도의 사회성 있는, 그러면서도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들을 표방하면서 주로 방송 쪽으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얻어 갔다. <슬기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를 보였는데, 신디사이저와 기타를 함께 편성해서 대중적 감각에 익숙하게 다가서려고 하였고, 보다 쉽고 친숙한 소위 국악가요라는 장르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슬기둥>의 이런 작업은 이후 본격적으로 대중적 호흡을 염두에 두는 양상으로 국악의 흐름이 변화되게 된 첫 시발점이라는 면에서도 의의가 있다. <슬기둥>의 성공은 이후 그를 따르려는 많은 실내악단의 탄생을 낳게 해서, 본격적인 국악 대중화 지향의 시대를 열어가는 서막이 되기도 하였다.

<슬기둥>을 필두로 한 대중적 국악실내악단은 독주회나 국악관현악 양식과 달리 본격적으로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연주자들의 자발적 의도에 기초하고 있었다. 단순히 서구적 양식의 모방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음악가들이 생존하기 위한 방안으로 결성하기 시작한 것이 국악실내악단이었고, 그러다보니 실내악단들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는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가 첨예하게 발달함과 동시에 국악계의 청년실업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려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연주자들의 자구책이자, 정규 악단의 인원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전통음악 전공자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바로 소규모 실내악단의 대량 생산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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