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1 여성의 몸, 숭배와 통제 사이
  • 02. 생육(生育)의 몸
  • 생산자로서의 몸
김선주

생식은 출산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고대의 문헌 기록에는 남녀의 만남이나 사귐이 개방적으로 나타난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왕족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길에서 보고 한눈에 반해 부모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관계를 하였다.40) 『三國史記』 卷41, 列傳第一, 金庾信上條.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 문희 역시 정식 혼인 전에 김춘추와 관계를 하여 훗날 문무왕이 되는 법민을 임신하였다.41) 『三國遺事』 卷2, 紀異第二, 太宗春秋公條. 유학자로 유명한 강수 역시 대장장이 딸과 야합을 하였다.42) 『三國史記』 卷46, 列傳第六, 强首條. 원성왕대 김현이라는 사람은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만난 처녀와 바로 관계를 가졌다.43) 『三國遺事』 卷4, 感通第七, 金現感虎條.

여기에서 남녀의 사귐은 성(性)이 포함된 것이었다. 물론 연애가 자유롭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혼인이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혈통이 중요하게 여기는 전근대 사회에서 혼인에서 신분내혼이 중요한 법칙이었다. 이는 고대라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혼전에 성을 동반한 남녀의 사귐이 비교적 자유롭게 나타난다는 모습은, 고대에는 여성에게 혼전 순결이 강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뿐만 아니라 재가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다. 궁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요구하는 진지왕에게 도화랑은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그런데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는 진지왕의 말에 여자는 좋다고 대답하였다. 결국 도화랑의 남편이 죽자 혼령이 된 진지왕이 찾아와서 관계를 가졌으며 그 사이에 아이까지 두게 되었다.44) 『三國遺事』 卷2, 紀異第二, 桃花女鼻荊郞條.

재가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던 것은 광덕의 사례에서도 찾을 수 있다. 광덕이 죽자 친구인 엄장은 광덕의 아내와 함께 장사를 치르고 바로 함께 살 것을 제안하고 있다. 광덕의 아내 역시 좋다고 응낙하여 두 사람은 그날부터 함께 동거하였다.45) 『三國遺事』 卷5, 神呪第六, 廣德嚴壯條. 통일신라시대 문장가였던 설총 역시 원효와 요석궁에 혼자되어 살고 있던 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46) 『三國遺事』 卷4, 義解第五 元曉不羈條.

이러한 사례는 당시 신라 사회에서 혼전 순결이나 재가 금지 등에 대한 강제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고대 사회에서는 사회적 재생산이 무엇보다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노동력이 사회적 기반이 되는 고대 사회에서 임신과 출산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순결이니 수절이니 하는 이데올로기보다 중요하였던 것은 ‘출산’이었다.

고구려의 특징적인 혼속으로 여겨지고 있는 서옥제(婿屋制)의 모습 역시 고대 사회에서 ‘출산’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풍속에 혼인을 할 때 구두로 이미 정하면 여자의 집에서는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만드는데 서옥이라 이름한다. 저녁에 사위가 여자의 집에 이르러 문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꿇어앉아 절하면서 여자와 동숙하게 해 줄 것을 애걸한다. 이렇게 두 세 차례 하면 여자의 부모가 듣고는 소옥에 나아가 자게 한다. 옆에는 돈과 폐백을 놓아둔다. 아이를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에 비로소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남녀 결합이 가변적임을 알 수 있다. 여자는 결합 후 자신의 집에 남아 생활하다가 아이가 태어나 장성한 뒤에 아이와 함께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의 존재였다. 아이가 생긴 뒤에야 여자는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47) 김선주, 「고구려 서옥제의 혼인형태」, 『고구려연구』 13, 2002.

그렇다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가 없더라도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기도 하겠지만, 사실 남자의 집으로 갈 계기를 마련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후대이지만 고려 태조 왕건의 첫 부인인 유씨는 왕건과 결합 후 친정에 있다가 출가를 하였다. 나중에 소식을 듣고 왕건이 달려와 정식 부인으로 삼기는 하였지만,48) 『高麗史』 卷88, 列第第一 后妃一, 神惠王后柳氏條. 유씨는 끝내 아이가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왕건이 늦게 유씨를 정식 부인으로 삼은 것이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계기가 마련되지 못하였던 이유가 아닐까 한다. 동숙(同宿)이 이루어졌더라도 아이가 없을 경우에는 관계가 해소될 수도 있었다.

서옥제와 함께 고대 특징적인 혼속으로 들고 있는 ‘취수혼(娶嫂婚)’ 역시 초점은 ‘출산’이었다. ‘형이 죽은 뒤에 동생이 형수를 취한다’는 의미인 취수혼은 여성의 입장에서 남편이 죽은 뒤 남편의 형제나 친척과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태어난 아이는 죽은 남편의 아들로 여겨졌다. 취수혼은 남편이 없는 여성을 보호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남편이 죽은 뒤에라도 남편의 아이를 낳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노동력이 경제기반이었던 고대에는 출산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에서는 출산이 곧 노동력의 최선의 확보였다. 특히, 의료가 발달하지 않아 죽음이 흔하였고, 전쟁이 많은 시대에는 출산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과도 관련이 있었다. 서옥제나 취수혼과 같은 형태의 혼인은 아이를 낳은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던 사회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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