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1 여성의 몸, 숭배와 통제 사이
  • 02. 생육(生育)의 몸
  • 계승자로서의 몸, 계승자를 낳는 몸
김선주

사회가 분화되면서 여성의 출산은 노동력 확보만이 아니라, 가계 계승에 있어서도 중요해졌다. 그렇지만 고대에는 아들만이 가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라에서는 여성을 매개로 가계 계승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돌백사 기둥에 붙인 글 주석을 상고해 보면, 경주 호장 거천의 어머니는 아지녀요,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요 명주녀의 어머니 적리녀의 아들은 광학대덕과 대연삼중인데, 형제 두 사람이 다 신인종에 입문하였다(『삼국유사』 권5, 신주6, 명랑신인).

거천의 가계는 아지녀-명주녀-적리녀 등 여성들이 매개로 설명되고 있다. 신라에서는 여성이 한 가계의 구성원으로, 필요할 때에는 가계 혈통을 이어가는 자격을 보유하고 있었다. 신라의 첫 여왕인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를 신라에서는 딸도 아들과 꼭 같은 계승 자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성골 남자가 없을 경우에는 같은 골품의 여자로 그 뒤를 잇게 하는 것이 다른 골품의 남자보다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쉬웠을 것으로 본다.49) 정용숙, 「신라의 여왕들」, 『한국사시민강좌』 15, 1994.

신라에서는 딸을 매개로 사위, 혹은 딸의 자식, 즉 외손으로 가계 계승을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신라에서는 왕위 계승에서 이성(異性) 사위나 외손이 즉위할 수 있었다. 첫 석씨왕인 탈해왕이나 첫 김씨 왕인 미추왕은 전왕의 사위였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던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이기도 하지만 외손이었다.

사위나 외손 계승은 통일기에서도 보인다. 선덕왕은 성덕왕의 외 손이었다. 선덕왕의 계보는 아버지, 그 위는 친할아버지가 아닌 외할아버지인 성덕왕으로 계산되고 있다. 신라 하대 다시 등장하는 박씨인 신덕왕은 헌강왕의 사위였다. 이는 신라에서 딸을 매개로 가계가 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대 국가가 정비되고 남성 중심으로 체제가 정비되면서, 아들을 낳은 것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부계 질서가 정착되면서 가계 계승을 위해 아들이 보다 중요하였다. 자식은 곧 아들을 의미하였다. 아들에 대한 선호는 삼국시대 이전 기록에서도 찾아진다. 동부여의 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과 강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부여는 고구려와 함께 북방민족에 속하는데 가부장권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장의 아버지는 대를 이를 자식이 없었으므로 불교에 귀의하여 천부관음에게 가서 자식 하나 낳기를 바라 축원하였는데, “만약 사내 자식을 낳는다면 희사하여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을 만들겠다.”고 하였다.50) 『三國遺事』 卷4, 義解第五, 慈藏定律條. 자장의 아버지는 대를 이을 자식, 그것도 사내 자식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중고기에 비상적인 상황에서 여왕의 즉위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대를 이을 자식으로 딸보다는 아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통일기 혜공왕의 탄생과 관련된 다음 기록은 대를 이을 아들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왕이 하루는 표훈 스님에게 말하기를 “내가 복이 없어 자식을 얻지 못하니 원컨대 스님은 상제(上帝)에게 청하여 아들을 점지하도록 하라.” 하였더니 표훈이 하늘로 올라가 천제(天帝)께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하느님의 말씀이 딸이면 곧 될 수 있으나 아들은 안 된다고 하시더이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딸을 아들로 바꾸어주기 바란다.”고 하니 표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하였다. 하느님이 말하기를, “그렇게 될 수는 있으나 그 러나 아들을 낳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하였다. … 표훈이 내려와서 하느님이 하는 말로써 이르니 왕이 말하기를. “비록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아들 자식이나 얻어 뒤를 이었으면 그만이겠다.” 하였다. 그 뒤 만월태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경덕왕은 아들을 낳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들 낳기를 고집하고 있다. 경덕왕대를 배경으로 하는 ‘안민가’라는 향가에는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자비로운 어머니요, 백성은 아이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당시 아버지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가부장적 질서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부장적 질서 하에서는 자식, 그것도 아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의 몸은 출산, 그 중에서도 대를 잇는 아들을 낳아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들은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기 이후에는 왕비라도 아이를 낳지 못하면 폐출되었다. 신문왕대 왕비는 소판 흠돌의 딸이었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혼인하였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나중에 그 아버지의 반란에 연루되어 궁중에서 쫓겨났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왕비의 폐출에는 아들이 없었다는 것도 작용하였다. 후대 만월부인에게서 아들은 얻는 경덕왕 역시 첫 왕비인 삼모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왕비를 폐하여 사량 부인으로 봉하였다.

남아에 대한 존중은 다음과 같은 포상 기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문무왕 10년에 한 여자가 3남 1녀를 낳자 국가에서는 200석의 곡식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이후 문성왕대 2번, 헌덕왕대 2번, 헌강왕대 1번의 다태(多胎) 산모에 대한 출산 포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기록은 대부분 남아의 수효가 더 많거나 동수인 경우였다. 다태 아(多胎兒)에서 여아가 더 많았던 경우도 있었을 텐데 이들 만이 기록된 것은 국가적으로 남아를 선호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제 여성의 몸은 아들을 낳는 것이 중요해졌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야 하였지만, 아들을 낳게 되면 여성은 확고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경덕왕대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난 삼모 부인을 대신하여 왕비가 된 만월 부인은 아들을 낳았고, 그 뒤 아들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태후로서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공적인 영역에서 소외된 여성은 아들을 낳으므로 어머니로서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성으로서 가장 존중받고 확고히 보장된 자리는 어머니였다. 건국 신화에서 신적인 존재로 존숭받았던 여성들은 건국 시조를 낳은 ‘어머니’였다. 김유신이 창기 집을 드나들다가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발걸음을 끊었다는 것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진정이라는 승려 역시 어머니의 권면에 의해 출가를 하게 되었다.51) 『三國遺事』 卷5, 孝善第九, 眞定師孝善雙美條. 신라에 불교를 전해준 고구려의 아도 역시 어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52) 『三國遺事』 卷3, 興法第三, 阿道基羅條. 이는 출산이 여성에게 갖는 의미가 보여준다. 이와 같이 어머니로서의 의미가 중요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때로는 목숨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아이, 특히 아들을 낳으려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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