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1. 불교의 시대, 여성 계보의 중요성
  • 어머니로 구별되는 정체성
권순형

고려가 다른 시대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여성의 계보가 매우 중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 초의 왕실에서부터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초 왕실 자녀들은 여성을 통해 구분되었다. 태조 왕건은 무려 29명의 후비를 두었고, 그 사이에서 수많은 왕자와 공주가 태어났다. 왕자들은 ‘광주원군(廣州院君)’이나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처럼 모계 지역 명을 붙여 봉군하였다. 이는 단순히 명칭만 붙인 게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그 지역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지역은 그들의 주요한 세력 기반이 되었다. 예컨대 장화왕후의 아들 혜종은 어머니의 고향인 나주를 자신의 향리로 삼았고, 나주인들은 자기들의 지역을 ‘어향(御鄕)’이라 하였다. 여성 출자의 의미는 또한 왕실혼에서도 보인다.

다음의 표는 태조의 여러 후비 자녀들의 혼인 관계를 그린 것이다. 진한 글씨로 표시한 것은 이복 남매간의 혼인이다. 태조는 자신의 왕자와 공주들을 상당수 이복 남매간에 혼인시켰다. 특히, 공주들은 이후에도 거의 족내혼(族內婚)만을 하였다. 예컨대 태조 왕건의 세 번째 비였던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 劉氏)(2)의 아들 태자 태(泰)는 태조 왕건의 후비 중 한 명인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 洪氏)(11)의 딸 일후(一後)와 혼인하였다. 그녀의 또 다른 아들 광종 역시 이복 남매였던 신정왕태후 황보씨(神靜王太后 皇甫氏)(3)의 딸(대목왕후)과 혼인하였다. 그녀의 딸 흥방공주(興邦公主)도 정덕왕후 류씨(貞德王后 柳氏)(5)의 아들 원장 태자(元莊太子)의 배필이 되었다. 이처럼 이복 남매끼리 혼인하는 것은 왕권의 신성화를 가져오려는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겠지만, 어머니가 다르면 남이라는 의식이 확고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한 아버지의 자식은 모두가 형제’라는 부계중심적 관념이 미약하였기에 이러한 혼인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표> 태조 자녀의 혼인
  태조후비 아들 며느리 사위
1 장화왕후
오씨
혜종 의화왕후 임씨 경화궁 부인 광종(3촌)
후광주원부인 왕씨
청주원부인 김씨
궁인 애이주
2 신명순성왕
태후 유씨
태자 태 공주 일후
(흥복원부인 소생)
낙랑공주 김부
정종 문공왕후 박씨 홍방공주 원장태자
(정덕왕후 소생)
문성왕후 박씨
청주남원부인 김씨
광종 대목왕후 황보씨
(신정왕태후 소생)
경화궁부인 임씨
(혜종딸, 모성) 3촌
문원대왕 정 문혜왕후 류씨
(정덕왕후 소생)
송통국사  
3 신정왕태후
황보씨
대종 선의왕후 류씨
(정덕왕후 소생)
대목왕후 광종
(신명순성왕 태후소생)
4 신성왕태후
김씨
안종 3촌 헌정왕후 황보씨
(신정왕태후, 조모성)
   
5 정덕왕후
류씨
왕위군   문혜왕후 문원대왕
(신명순성왕태후 소생)
인애군   선의왕후 대종(선정왕태후 소생)
원장태자 흥방공주
(신명순성왕 태후소생)
공주 의성부원대군
조이군      
6 헌목대부인평씨 수명태자      
7 정목부인
왕씨
    순안왕 대비  
8 동양원부인
유씨
효목태자      
효은태자  
9 숙목부인 원녕태자      
10 천안부원부인
임씨
효성태자
(3촌)
정종 딸
(문성왕후 소생)
   
효지태자  
11 홍복원부인
홍씨
태자 직  
공주 일후
태자 태 (신병순성왕태후 소생)
12 소광주원부인
왕씨
광주원군      
13 성무부인
박씨
효제태자      
효명태자  
법등군  
자리군  
14 의성부원부인
홍씨
의성부원 대군 공주(정덕왕후 소생)    

가까운 친척과 혼인하였을 때 왕비들은 어머니나 할머니, 외할머니 등 여성 쪽 성씨를 사용해 근친혼(近親婚)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대목왕후(大穆王后)(3)는 광종과 혼인하면서 어머니 성씨를 따라 황보씨라 하였고, 혜종 딸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1)은 삼촌인 광종과 혼인하면서 어머니 성씨를 따라 임씨(林氏)를 청하였다. 안종의 아들을 낳은 헌정왕후(獻貞王后)(4)는 어머니(선의왕후)도 본래 왕씨였기 때문에 할머니 성씨를 따서 황보씨를 칭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후비들이 칭한 성씨 역시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즉, 할머니 신정왕태후(3)의 성씨를 취해 황주 황보씨를 칭하였던 경종비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는 그녀의 섭정 기간 내내 황주를 자신의 통치 기반으로 하였다. 아들 목종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그녀도 섭정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그녀가 간 곳은 황주였다. 이처럼 모계 쪽 성씨를 취하고, 그 곳을 자신의 기반 지역으로 하였다는 것도 여성 쪽 계보가 중요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 하겠다.

여성 계보의 중요성은 소군(小君)과 서녀(庶女)의 존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소군이란 양인이나 천인 출신의 궁인이 낳은 아들이며, 서녀는 그들이 낳은 딸이다. 고려시대에는 소군을 승려로 만들었으며, 서녀를 관료와 혼인은 시키되 그 남편과 자식의 관직을 규제하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고종 때 관리였던 손변은 실무에 능하였으며 사건을 심판하는 것이 마치 물 흐르듯 신속하고 정확해 가는 곳마다 성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의 처가가 왕실의 서족이기 때문에 대성(臺省), 정조(政曹), 학사(學士), 전고(典誥) 등의 관직에 임용될 수 없었다. 그의 처가 손변에게 “당신이 천한 나의 친정 탓으로 유림(儒林)으로서 지날 수 있는 청환 요직(淸要)에 오르지 못하니 차라리 나를 버리고 세족(世族) 가문에 재취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손변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벼슬길을 얻기 위하여 30년 동거한 조강지처를 버린다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하물며 자식까지 있지 않는가? 그럴 수 없다.”라고 끝내 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들 손세정(世貞)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였다.80) 『고려사』 권102, 열전15, 손변.

즉, 손변(?∼1251)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단지 왕실 서녀 와 혼인하였다는 이유로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부계 의식이 강한 사회라면 아버지의 혈통이 절대적이지 어머니의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 서얼 개념이 약한 것도 이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왕의 자식이라도 어미가 미천하면 차별되었다. 명종 때 관리 민식(閔湜, ?∼1201)은 소군을 무지개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무지개가 한 끝이 하늘에 속하고 한 끝은 땅에 연접된 것처럼 소군은 귀한 왕의 자식이지만 천한 어미의 핏줄을 떨쳐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81) 『고려사』 권101, 열전14, 민영모 부 식. 이처럼 고려시대에 여성 측 계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계를 중시한 의식은 여러 법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선 공음전시(功蔭田柴)와 전정연립(田丁連立)의 규정을 들 수 있다. 공음전은 아들이나 손자가 없을 경우 사위·조카·양자·의자(義子)에게 상속할 수 있었다.82) 『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공음전시 문종 27년 정월. 여기서 부계 친족인 조카보다 사위가 앞서고 있다. 또 전정연립도 아들·손자·친조카·양자·의자·서손과 함께 여손도 규정하고 있다.83) 『고려사』 권84, 지38, 형법1 공식 호혼. 즉, 직역의 계승이 부계적 관념에서 볼 때는 남이라고 여겨지는 딸의 자손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아들이 없어 외손이 대를 이은 사례도 보인다.

문종 때 재상이었던 황보영(皇甫潁)은 왕에게 외손주 김녹숭(金祿崇)을 양자로 삼게 해달라고 청해 왕이 이를 승인하고 녹숭에게 9품 관직을 주었다.84) 『고려사』 권7, 세가7, 문종 원년 3월 신묘. 외손에 대한 당시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음의 사례도 있다. 충선왕 이래 충정왕 때까지 활약한 김태현의 아들 김광재(金光載, 1289∼1363)는 김승택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아들 흥조가 신돈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김흥조는 딸 하나를 낳았다. 반면 김광재의 딸은 박문수에게 출가하였는데 아들 둘을 낳았고, 외손자와 증손자까지 있었다.

이에 목은 이색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 선생의 덕행과 정사의 뛰어남이 이와 같으니 당연히 자손이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군기감(흥조)의 후손이 없으니 이는 하늘이 정해주지 않은 것이고 또 하늘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아 슬프다. 다행스러운 것은 박씨가 있는 것이다. 선비가 공을 세워 그 장인을 빛나게 한 이가 사서에 끊이지 않고 쓰여 있으니 박씨는 힘쓰고 또 힘쓸지어다.85) 김용선, 「김광재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p.987.

즉, 사위와 외손도 자신의 계보로 생각하는 의식이 고려 말에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고려사』나 묘지명에 보면 아들이 없던 수많은 집안에서 동성 양자를 삼아 가계를 계승시킨 사례가 없다. 오히려 양자 사례들은 이성 간의 것이 더 많다. 예컨대 무인 집정기에 최우(崔瑀, ?∼1249)는 대경(大卿) 임경순의 아들 임환(任恒)이 글씨를 잘 쓰자 그를 사랑하였다. 이에 그를 양자로 삼아 성을 최씨로 고치고, 장군 벼슬을 주었다.86) 『고려사』 권129, 열전42, 반역3 최충헌 부 우. 무신집권기 말기 실력자 김준(金俊, ?∼1268)은 고성현으로 귀양 갔을 때 고을 사람 박기(朴棋)의 은덕을 많이 입었다. 김준은 그를 양자로 삼고 여러 관직을 거쳐 승선까지 주었다.87) 『고려사』 권130, 열전43, 반역4 김준. 이처럼 전혀 친족 관련이 없는 사람을 양자로 삼는가 하면, 친족 딸을 양녀로 삼거나 처가에서 양자를 구하기도 하였다. 원 간섭기의 관리 이공수(李公遂, 1308∼1366)는 자녀가 없었는데 친족의 딸을 길러 성균 생원 안속에게 출가시켰다.88) 김용선, 「이공수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p.1008. 인종 때 관리 배경성(裵景誠, 1083∼1146)의 딸이었던 서공(徐恭)의 부인은 총명하고 정숙하며 예의를 알았는데 자녀가 없자 자신의 친정 조카를 데려다 길렀다.89) 김용선, 「서공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p.1156. 뿐만 아니라 사위에게 권력을 물려주려한 사례도 있다. 최우는 사위 김약선(金若先)에게 대권을 물려주려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승려로 만들기도 하였다.90) 『고려사』 권129, 열전42, 반역3 최충헌 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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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성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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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위 관료 자손이나 공신 자손일 경우 시험을 보지 않고도 관직에 나갈 수 있던 음서제도도 아들과 손자 뿐 아니라 외손, 형제의 아들[姪]과 자매의 아들[甥], 사위와 수양자에게도 주어졌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공신 자손의 음서의 경우이다. 5품 이상의 고위 관료 자손에게 주는 정규 음서에 비해 공신 자손의 음서는 10세손에 이르는 먼 자손에게까지 특혜를 주기도 하였다. 고종 40년(1253)에 태조의 6공신, 삼한공신의 ‘내현손의 현손의 손(內玄孫之玄孫之孫)’, ‘외현손의 현손의 자 협칠녀(外玄孫之玄孫之子 挾七女)’에게 관직을 준 기록이 보인다.91) 『고려사』 권75, 지29, 선거3 전주 공신자손등용. 내현손의 현손의 손은 아들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계보의 자손이다. 외현손의 현손의 자는 중간에 딸이 들어가는 계보의 자손이다. 협칠녀란 그 계보의 중간에 들어가는 딸의 수가 7명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공신-딸-아들-딸-딸-딸-딸-아들-딸-딸-음서 받을 후손’이 가능한 것이다. 즉, 거의 9∼10세대 이후의 딸의 후손까지 추적이 가능하고 이들에게 특혜를 줄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조선 초에도 계속된다. 『안동권씨성화보』나 『문화유씨가정보』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족보들에서는 족보 안에 권씨나 유씨보다 타성의 비중이 훨씬 크다. 딸의 자손들도 상당히 오래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화보』에서는 총 8 천 명 중 권씨 남자가 380명, 『가정보』에서는 3만 8천 명 중 유씨 남자가 1천 4백 명에 불과하다. 이는 딸이 시집가도 남이 아 니며 내 핏줄이고 그 자손 역시 우리 자손이라는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계(女系)를 중시한 것과 관련해 여성들은 아들과 동등한 피의 계승자였으며 이는 혼인을 해도 변함이 없었다. 고려의 혼인은 남귀여가(男歸女家)로 기본적으로 처가살이로서 처가와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였다. 혼인은 두 가문의 성원이 결합한 것이지 여성이 남성 집에 영원히 귀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자식이 남편 집단의 사람임과 동시에 자신의 친족 집단의 자손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여자의 재산이 혼인 뒤에도 남편에게 흡수되지 않았고, 자식이 없을 경우 그녀 사후 다시 친정으로 되돌아왔다는 점을 잘 말해 준다.

고려시대에 딸은 아들과 마찬가지로 자식으로서 같은 몫을 상속받았으며 제사를 지내고, 부모를 봉양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여성은 아들 못지않았는가? 남성과 다름없었는가? 아들 못지않았다는 것은 상속이나 부모 봉양, 제사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아들과 마찬가지로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과 다름없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고려시대도 가부장적인 사회로서 남녀의 성별 분업이 확실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본 불교나 국가의 법제에서 잘 드러난다. 여성의 공적 활동이 금지되고 오직 혼인해 아이 낳는 것만이 허락되었던 시대에, 여계의 중시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는 결국 혼인과 가족제도 속에서 여성이 수행하였던 역할을 통하여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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